책은 앞표지와 뒤표지의 구분이 따로 없었습니다.
박연준 시인의 글과 장석주 시인의 글이 양쪽에서 독립적으로 시작되어 마치 서로 다른 두 책을 붙인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두 시인이 평생을 애정하고 존경해온 열여덟 명의 예술가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에릭 사티, 프랑수아즈 사강, 바츨라프 니진스키, 김소월, 존 버거, 버지니아 울프, 빈센트 반 고흐, 알바 알토, 프란츠 카프카, 페르난두 페소아, 실비아 플라스, 권진규, 나혜석, 로맹 가리, 배호, 장국영, 다자이 오사무, 그리고 박용래까지.
그들에게 자신의 내밀한 아픔과 외로움, 고독과 즐거움을 고백하는 두 시인의 편지는 읽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그 공간 속에 저도 함께하는 듯한 느낌을, 그리고 그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과 각자 다른 방에서 같은 이름을 부르던 시간은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취향도 생각도 열렬히 다른데
웬일인지 이 열여덟 명의 예술가 앞에서는 마음이 하나로 포개졌지요.
당신과 함께 그들을 추억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았어요. - page 163, 박연준
'바츨라프 니진스키'에게 쓴 편지로부터 그를 알게 되었는데...
작은 키에 짧은 팔과 다리를 가졌지만 무대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모습, 높이 비상하는 모습,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가 다시 도약할 땐 흡사 공처럼 힘차게 솟구쳐올라가는 그의 모습...
니진스키의 등장으로 발레리노는 발레리나를 돕는 역할에서 벗어나 무대의 주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던 그.
하지만 발레단을 꾸려 유럽 순회 공연을 하던 당대 무용계의 권력자인 디아길레프와의 만남과 불화, '니진스키 발레단'을 창단해 유럽 무대에 선을 보이지만 실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내와 어린 딸을 데리고 스위스의 생모리츠로 피신......
이런 불행과 절망은 그의 삶을 속절없이 꺾인 꽃대처럼 쓰러뜨렸는데...
저는 당신을 느낍니다. 당신이 쓴 시를 읽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당신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당신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아내를 보며, 당신은 생각하지요. "그때 아내는 어느 누구보다 나를 사랑했지만, 나를 느끼지는 못했던 것"이라고. 느낀다는 것은 이해보다 생각보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 앞선 것이었지요.
저는 당신의 춤을 보지 않고도 이미 압도당한 관객입니다. 당신을 느끼는 한 명의 사람입니다.
니진스키, 진짜 재능은 자신을 느끼는 거예요. 자기 안의 사랑을요! - from. 박연준
당신의 삶은 가난과 불운에 잠식당하고, 세기를 거칠게 윽박지르는 혁명과 전쟁의 와중에 걸쳐져 있지만 그런 재난이 무용에 대한 당신의 재능을 빼앗을 수는 없었어요. 마치 살 속에서 부러진 뼈가 튀어나오듯이 춤은 당신의 몸에서 붉은 동백꽃처럼 바깥으로 불거졌지요. 당신의 누이가 말했듯이 당신에게 무용은 신앙이요, 생명이요, 영혼이었지요. - from. 장석주
이 책과 결이 같았던 '존 버거'.
편지를 쓰는 동안 당신이 곁에 있다고 상상해봅니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서문에 당신이 이렇게 썼잖아요. "죽은 이들이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여러분도 나만큼-아니 어쩌면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다면 망자들은 어떻게든 우리를 도와주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땅히 귀를 기울여야 하죠. 그렇지 않은가요? (겉으로야 아닌 척하더라도 말이죠.)" 단순히 '떠도는 영혼'으로서 죽은 이들을 말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아요. 당신이 제게 그렇듯 죽은 사람은 영영 사라진 사람이 아니죠. 종종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요. 그들이 우리를 돕죠. 그들과 때때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요. 저는 당신이 써놓은 이야기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합니다.
...
존, 당신의 말처럼 창작자는 관찰된 무언가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움직이는 자예요. 만약 제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엄마와 아이에 대해 써야 한다면 저는 두 사람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려고 애쓸 거예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더듬더듬 만져보며, 목적지(글의 완성)에 다다를 때까지 "동행"할 거예요. 작가는 자기가 전하는 이야기와 끝까지 동행하는 자여야겠죠. 당신의 말대로 이야기꾼은 "듣는 사람"이어야 하고요. - from. 박연준
지금 여기의 시간은 당신이 살아보지 못한 미래입니다. 하지만 미래란 지금 이곳에 도래하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지만 그 성김으로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속에서 미래의 기척을 감지하는 사람들! 그렇습니다. 미래가 오늘에 스미고 섞인 내일의 성분들이라면 소수의 사람들은 제 예민한 직관으로 충분히 선취할 수 있는 시간인 겁니다. 밤하늘 가득한 별자리 아래서 쓴 이 편지는 미래가 과거에게 보내는 것이지요. - from. 장석주
각자의 길을 가는 도중에도 언제나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던 두 시인.
당신과 내가 쓴 편지들이 야만의 세상에 선한 영향력이라는 작은 파문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한 해 중 어둠이 가장 긴 동지의 깊은 곳 모란과 작약이 꽃망울을 피우려는 기척 속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순간이 지나갑니다. - page 159, 장석주
정말 읽는 이의 마음에 자그마한 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