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의 삶과 예술
최성숙 지음 / 스타리치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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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조각의 하나하나는 생명 그 자체, 즉 자연 속의 식물,

곤충 혹은 새들의 발견, 성장과 자석성이 자란 것과도 정확하게 닮은

시머트리의 생명 원리로서 치밀하게 구성되었다.

이 창조적 원칙의 귀결로 문신의 모든 작품은 매혹적이며 거대한 보석과도 같다."

- 자크 도판느(국제 예술평론가협회 정회원)

조각 3대 거장으로 불리며 우주의 원리와 생명력을 나타낸 '문신'.

사실 이번 기회가 아니었다면 몰랐었습니다.

"문신은 대한민국 예술의 전통을 여러 세기에 걸쳐 심어놓은 거장들의 특징을 모두 갖춘 타고난 예술가다."

- 자크 토판느(프랑스의 미술 평론가)

이제라도 '문신' 이름을 새겨보려 합니다.

우주를 조각한 거장

더 큰 세상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문신의 생애와 예술 세계를 정리하다!

문신의 삶과 예술



영국의 헨리 무어(Henry Moore)

미국의 알렉산더 콜더(Alexander Calder)

와 함께 '세계 3대 조각 거장'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의 예술가, '문신(Moon Shin)'.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그의 일생과 예술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총 다섯 개 장으로

첫 번째 장에서는 '문신의 삶'을

두 번째 장에서는 '문신의 예술 세계'를

세 번째 장에서는 '문신의 미술관'으로 문신이 1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향 땅 황무지를 개척하고 돌을 쌓아 올리며 손수 미술관을 짓는 과정부터 이를 조국에 기증하기까지의 일들을

네 번째 장에서는 문신이 타계한 후 그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추모'를

끝으로 다섯 번째 장에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문신을 보필해왔던 '최성숙, 문신을 기리다'

로 그의 모든 면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본명은 문안신.

일본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아버지와 함께 고향 마산으로 돌아오고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탄광에서 일했던 아버지가 마산에서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자 아버지를 대신해 손재주가 좋은 어머니가 뜨개질, 조개 캐기 등으로 생계를 꾸렸는데 이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어린 안신은 어머니가 조개를 캐는 동안 바닷가 모래밭에 앉아 혼자 모래놀이를 하며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문신은 어릴 적 모래놀이가 훗날 자신의 미술적 조형 작업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 page 12

열두 살 때 자주 다니던 시민극장 근처에 서양화가 박명수가 '태서명화'라는 화방을 열었는데 그곳에서 난생처음 본 서양화에 눈을 떼지 못한 안신.

박명수는 그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었고 간판 그림을 그리며 이때부터 화가라는 꿈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열여섯 살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일본으로 유학을 하고

'나는 이제 문안신이 아니라 화가 문신이다'

라는 다짐과 함께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어떤 이유인지 문신은 당시 예술인촌 전반에 유행하던 초현실주의 화풍을 따르지 않았고 크게 영향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예과와 본과를 합쳐 총 7년 동안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며 꾸준히 극장 간판과 만화 그리기, 목공 등 여러 일을 하며 이렇게 번 돈 중 학비와 생활비 일부를 제외하곤 남은 돈을 모아 마산에 계신 아버지에게 고향에 땅을 구매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훗날 문신미술관의 터전이 된 추산동 언덕배기 땅.

해방과 함께 마산으로 돌아온 문신.

모던아트협회 회원으로 다양한 화가들과 교류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술가는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된다'

고 생각한 문신은 세상을 향한 열망이 점점 커지며 프랑스로 떠나게 됩니다.

앵포르멜 사조가 시작된 프랑스에서 추상회화의 본질을 깨닫고, 관념이 아닌 체험과 납득에 따라 작품을 제작하게 됩니다.

"나는 이곳 파리에 와서 내 눈으로 오늘날 현대미술이 지향하고 있는 중요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현대 미술 작가 중 일가를 이룬 이들의 작품이 한결같이 자신의 개성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조각에 빠지게 된 것은 나의 의지라기보다는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파리 서북쪽에 있는 라브넬 성을 수리하면서 조각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더욱 견고하게 쌓아가게 되었습니다.



발카레스 조각 전시를 통해 <태양의 인간>을 선보이며 '목신'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조각가가 되지만 그의 삶은 화려하지만 않았습니다.

헛간을 개조한 아틀리에에서 작업을 하며 잦은 부상을 입었고 더욱이 타지에서 홀로 있다는 외로움과 죽음이라는 공포와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으로 돌아가 미술관을 세워 작품과 함께 조국에 기증하고 싶다는 바람이 더욱 커졌고 이후 14년간 황모지를 개간 미술관을 직접 건축하고 완공 1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저는 흙으로 돌아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예술혼을 불태우면서 장엄하게 산화하고자 합니다. 몸은 비록 내 고향에 안치된다 하더라도 살아서 못다 한 저의 예술 세계를 부활시켜 민족문화와 더불어 영생하고자 하니 문신 예술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기원합니다."

문신의 예술에서 가장 큰 특징이자 시그니처는 '시머트리'인데, 완벽한 대칭을 추구하지 않고 미묘한 차이를 가지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는 자연에서 시간이 흐르다 보면 자연스레 생기는 차이를 염두에 둔 것인데 인공적인 대칭 미가 아닌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좌우균제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표현한 그.

좌우균제는 조각뿐만 아니라 회화에서도 엿볼 수 있었는데 자연의 형태에서 벗어나 점, 선, 면 등 순수한 조형 요소로 자유롭게 표현함으로써 자신만의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나간 문신.

그렇기에 이 예술가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대한 사람이면, 또 그런 기회에 이 작가의 다른 작품 앞에 섰을 때 순간적으로

'이것이 문신이다'

라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일생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며 고독과 죽음이라는 공포와 싸워야만 했던,

한국에서조차 외로움을 느껴야만 했던 그의 아픈 삶은

생명에 대한 찬미로 이어졌고

회화와 드로잉, 채화, 조각 등 여술로 승화한 문신.

이제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숨 쉬고 있는 작품을 다시 마주하며 그의 이름은 제 가슴 속에도 새겨봅니다.

"나는 노예처럼 작업하고

나는 서민과 같이 생활하고

나는 신처럼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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