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크라테스 미술관 - 그림으로 읽는 의학과 인문학
박광혁 지음 / 어바웃어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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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면 모든 영역의 집합체와도 같았습니다.

인물, 역사, 과학, 예술, 인문학 등.

하나의 그림으로도 다양하게 읽어갈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매력적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번엔 '의학'의 시선으로 미술을 바라본다고 하였습니다.

조금은 의아하였습니다.

미술과 의학이 어우러질지는 이 책을 읽어봐야 알 것 같았습니다.


히포크라테스미술관』 

 


본문으로 들어가기 앞서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미술과 의학이 조화를 이루는지가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머리말>부터 차근히 읽어내려갔습니다.


사람의 얼굴의 빛 '낯빛'과 안색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쁠 때, 슬플 때, 화가 났을 때, 슬플 때 등 여러 감정이 얼굴에 표현되는 것처럼 그림에도 표현되는 색과 빛이 의학적 코드와도 닮아있었습니다.


맨 처음 '죽음의 빛'을 의학적으로 관찰해 기록한 이는 히포크라테스입니다. 2000여 년 전 그는, 죽음을 앞둔 이들의 '낯빛'을 사려 깊게 관찰한 기록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혈색이 극도로 창백하고 안모가 매우 야위었으며, 협골은 돌출하고 안광이 무뎌져 의식을 거의 소실한 상태에서 히포크라테스는 죽음의 징후를 간파했습니다. 의학이란 개념조차 없었던 그 옛날, 죽음에 임박한 사람을 이처럼 세세하게 관찰해 기록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의학에서는 그의 뜻을 기려 임종을 맞은 사람의 얼굴을 '히포크라테스 안모'라고 부릅니다.


모네의 <임종을 맞이한 카미유>에서 '히포크라테스의 안모'를 떠올리는 것처럼 그림에는 흥미로운 의학적 코드들이 참 많이 숨겨져 있습니다. - page 5 ~ 6


그렇게 그림 속 의학 코드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첫 장을 열었던 고흐의 <영원의 문>.

고흐가 권총으로 자살하기 두 달 전에 완성한 유화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예술가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깊은 절망감에 극심한 궁핍까지 겹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그의 심정을 표현한 작품을 묘한 데자뷰를 이룬 어느 음악가의 황망하기 그지없는 부음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차이코프스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작곡한 <비창>.

그가 죽기 아흐레 전 <비창> 초연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은 여느 때와 달리 지휘할 때 팔을 힘차게 휘두르지 않고 또 시종일관 매우 무기력하고 침울한 모습을 보였다는 진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처절한 슬픔과 고독을 겪어내야 했는지를 고흐의 작품과 함께 번갈아 보면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고흐의 그림 속 노인이 마치 차이코프스키의 가혹한 운명을 알고 있는 듯 슬픔을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치유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 그건 바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저 깊은 절망의 터널'입니다. - page 32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제 눈길을 사로잡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마담 퐁파두르 후작'

 


무능하지만 바람막이 남편이 있었고, 두 아이가 있었던(하지만 어린 나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에티올르.

하지만 타고난 미모에 지식과 교양까지 겸비되어 있었기에 한 남자의 평범한 아내로 살 수 없었습니다.

결국 루이 15세의 측근이 되고 후작의 신분을 얻게 된 그녀.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만 그녀를 탐탁잖게 여겼던 왕족들에 의해 서서히 저물어가게 됩니다.


그녀에겐 말 못할 아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바로 루이 15세의 비정상적인 호색 행위로 인해 감염된 성병과 극심한 편두통.

이로 인해 마흔셋 젊은 나이로 영면하게 되는데 그런 그녀의 죽음에도 막말을 내뱉는 이들은 정말이지...


퐁파두르 주변에는 따뜻한 지지자들 또한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고통과 아픔을 진심을 다해 챙겨줄 주치의는 없었던 걸까요? 그녀의 죽음이 못내 아쉬워 부질없는 하소연으로 그녀를 보내드립니다. - page 198


그녀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과도 비슷하게 엿보여서 참으로 씁쓸하였습니다.


'의사'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 옛날엔 무거운 왕진가방을 챙겨들고 의사가 병원을 나와 환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진료하였었는데 20세기 이후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의해 사람들은 의사라는 직업을 선호하고 선망할수록, 의사들로부터 외면받는 가난한 환자들이 늘어만 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는 최첨단 의료기기와 바이오산업으로 의사 대신 AI가 약을 처방하고, 환자는 원격으로 진료를 볼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음에 '의사'란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 가운데 이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의사는 우리 가슴에 직접 청진기를 대고 환자의 고통을 속속들이 알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환자가 필요로 할 때면 왕진가방을 챙겨들고 그의 곁으로 달려갈 수 있는 의사 말입니다.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건 그 어떤 첨단의술도 아닌, '진심'과 '정성'이라는 것을 잊고 싶지 않습니다. - page 89 ~ 90


이 그림을 보면서 지금도 K-방역 전선에서 뛰고 있는 모든 이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다시 한 번 그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고자 합니다.


하나의 명화를 의학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거의 모든 인문학이 읽힌다는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건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음에 표현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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