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 검은 그림자의 진실
나혁진 지음 / 몽실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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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끔찍하고도 잔인한 사건이었습니다.

'N번방 사건'

피해자들을 '노예'라 부르며 성 착취 사진을 올리고 신상정보까지 공유하는 텔레그램 채팅방.

특히나 주 피해자층은 미성년자들이었고 가해자들은 10대에서부터 시작되니 정말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아직도 계속 수사는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시작과 끝을 알수 없는, 그야말로 음성화된 범죄를 매듭지을 수 있을지는 끝까지 관심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이 소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n번방, 야동, 벗방, BJ......

현재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성문제들을

통렬하게 파헤쳐 드러내고 있는


상처

 


한때 그는 우수한 형사였습니다.

황소바위 이 형사!

아내와 딸 예나와 함께 남들과 비교해 내세울 것도 없는 살림이었지만 항상 웃음꽃이 피는 집이었습니다.


2015년.

그가 경찰 생활 11년차로 격무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달에 일주일이나 집에 들어올까 말까 하는 상황 속에서도 예나는 아빠가 집에 오면 마하의 속도로 달려와 안기곤 하였습니다.

그런 예나는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 어렵사리 하루 휴가를 받아 놀이동산에 가려던 찰나.

백과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파트 강도 살해범 오흥수의 소재가 파악되어 당장 현장으로 오라는 내용.

그렇게 그는 싸늘한 아내의 표정조차 달래줄 여유없이 달려가 무사히 오흥수를 체포하고 팀원들과 늦은 저녁을 먹을 때였습니다.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

예나와 단 둘이서 놀이공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아내는 긴급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예나는 싸늘한 시체로......


내가 운전을 했더라면, 아니 내가 형사만 아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천 번, 만 번도 넘게 한 것 같다. - page 59


아내와 예나가 그의 곁을 떠나간 날.

그는 술병을 손에 잡았고 그렇게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술에 취한 밤이면 나는 DVD를 틀어놓고 옛 영상을 본다. 이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살아 있는 이유였다. 혹시 두 여자를 잊을까 봐, 기억에서 아주 사라질까 봐 보고 또 보는 것이다. - page 61


그런 그의 집 문을 누군가가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야, 호진아! 이호진!" - page 19


3년 만에 보게 된 백과장은 용현이란 젊은 부하를 데리고 그의 집을 찾아오게 됩니다.


"사람이 좀 나아지는 게 있어야지 만날 그 타령이야. 이 몸, 바싹 곯은 거 봐라, 이거."

"3년 만에 고작 그런 훈계나 하려고 오신 겁니까?"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겸사겸사 들렀지. 부탁할 것도 있고."

에둘러 말하는 사람이 아닌데 오늘 백과장은 어딘가 정말 예전가 달랐다.

"부탁이요?" - page 23


"은애가 없어진 거야." - page 28


어렴풋이 기억이 난 백과장의 딸, 은애.

이제 갓 대학생이 됐을 은애가 가출이라기엔 말이 안 되지만......

길게 탄식하던 백과장이 박용현에게 대신 말을 하라고 합니다.


"그럼 제가 말씀 드릴게요. 이번 달 초였는데요. 비번인 날이 있었어요. 집에 있다가 그냥 심심해서, 그냥 별 생각없이 인터넷에 있는 포르노 사이트를 갔어요. 제가 아직 총각이라 가끔 갑니다."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박용현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한참 이것저것 보고 있었는데, 낯익은 얼굴이 나오는 게예요. 그 얼굴이 나오는 동영상은 몇 분짜리 짧은 거였습니다. 계속 돌려봤어요.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이었습니다. 저도 형사라 눈썰미가 있잖아요. 계속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그게, 걔가......" - page 30 ~ 31


과장님의 딸, 은애였습니다.


과장님이 그에게 찾아온 이유는 자신의 딸 은애를 찾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하필이면 그를 찾아왔을까!

형사도 아닌, 지금은 알코올중독자로 살아가는 그에게......


"이 사람아, 남부끄럽게 어떻게 그런 걸 떠벌리나. 은애 앞길이 9만 리다. 앞으로 졸업도 해야 하고, 시집도 가야 하는데 사람들이 포르노에 나왔다고 수군거리면......"

남동경찰서 터줏대감 딸의 일이다. 제대로 절차를 밟아 수사에 들어가면 인천의 모든 경찰 사이에서 소문이 쫙 퍼질게 분명했다. 아버지로서 외동딸의 평판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네가 나서서 조용히 해결해 줘. 아직 아는 사람 없을 때 말이야." - page 33


그렇게나 딸을 위하면서도 한낱 평판 때문에 공개수사를 망설이는 백과장이 마음엔 들지 않았지만 이 사건을 받아들고 수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사건을 수사하면서 밝혀지는 진실은 결국 우리 어른들 모두가 공범인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유쾌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사회 문제에 대해 많은 질문을 남겼던 소설.


소설 속에서 이호진 형사가 알코올중독자가 될 수 없었던 핑계아닌 변명같은 이야기는 참으로 씁쓸하였습니다.


한낮의 뉴스쇼에는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출연했다.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두 살도 안 된 아이를 굶겨 죽은 젊은 부부와 상해 보험금을 노리고 어머니의 눈을 멀게 한 아들에 이르러서는 욕이 절로 나왔다. 지옥에도 번지수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딸을 성추행하고,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아들이 엄마의 눈을 파내는 곳이 지옥이 아니라면 달리 어느 곳이 또 있겠는가. - page 15 ~ 16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뉴스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술을 마시는 이유를 나 자신에게 떳떳이 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나 같은 알코올중독자는 늘 변명을 입에 달고 산다. 아직까지는 죄책감이 남아 있어 매일같이 술을 입에 대며 망가져가는 스스로의 모습에 이따금 괴로워진다. 그럴 때 뉴스에 나오는 이 지옥도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술을 마시지 않고, 취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느냐고 당당히 항변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유용한 동반자란 말인가! - page 18


사이버 성범죄가 이토록 잔혹할 수 있는 이유.


이는 피해자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흉터로 남아 오랫동안 따라다니기 때문이었습니다.


N번방의 가해자들이 하나둘 잡히고는 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형량은 터무니없이 낮았습니다.

과연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주홍 글씨의 낙인이 찍은 피해자들의 낙인은 누가 지워줄 수 있는지......

이런 사회를 만든 우리에게 책임의식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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