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에쿠니 가오리'

그녀와의 인연은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에서부터 였습니다.

나의 대학 시절.

첫 배낭 여행으로 '이탈리아'를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게 된 소설.

그녀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세련된 문체에 기나긴 비행 시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져들었었고 그 후론 그녀의 작품을 찾아 읽곤 하였습니다.
 

매번 소설로만 접했는데 이번엔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기에 너무나 궁금하였습니다.


읽기와 쓰기의 삶에 대한

에쿠니 가오리의

비밀스러운 일기장이 열린다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그녀의 이야기는 '쓰는 사람'으로서의 경험이 담긴 <쓰기>와 '읽는 사람'으로서의 경험이 담긴 <읽기>, 그리고 세상을 관찰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일상이 돋보이는 <그 주변>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한 권으로 조금이나마 그녀의 작가로써의, 인간적으로써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병원이 두려워서 가지 않았던 그녀.

주변 사람들의 성화에 못이겨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와의 대화에서 그녀가 천상 작가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말이죠."

​등을 쭉 펴고, 의사가 다시 말한다.

"아무튼 온 세계의 사소한 것들을, 어떻게 된 일인지 당신이 온몸으로 주워 모았다는 겁니다."

아아, 하고 나는 이제야 이해한다.

"아아, 그거군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하고 나는 말한다. 나는 소설가니까, 하고. 스툴에서 내려와 안심하고 진료실에서 나왔지만, 그 후에도 금귤베리가 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 page 17 ~ 18


그리고 그녀가 작품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편지든 소설이든, 문장을 쓸 때 나는 내 머리가 투명한 상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곳은 언어가 없으면 텅 빈 공간인데, 겨울이라고 쓰면 바로 눈 내린 경치가 되기도 하고, 미역이라고 쓰면 바로 싱그럽고 반투명한 녹색 해초로 가득해진다. 그러니 글자가 뚫는 구멍은 필요하고, 아마 사람들은 예로부터 날마다 그 상자를 오가는 많은 것들을, 글자를 통해 바깥과 이어 왔던 것이리라. 아주 조금 시간을 멈춰놓고, 머물게 할 수 없는 것을 머물게 하려고.

쓴다는 것은, 혼자서 하는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 page 53 ~ 55


온 세계의 사소한 것들을 주워모아 투명상자를 통해 이루어진 그녀의 글들.

그렇게 채움과 비움 속에 완성된 그녀의 작품이 또다시 기다려지곤 하였습니다.


그녀의 읽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디에 가든 여기에 계속해 있는 것.

떠남과 동시에 머뭄의 의미를 지닌 '읽는다'는 행위가 더없이 멋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마지막 그녀의 일상이 엿보이는 <그 주변>에 담긴 이야기들이 잔잔히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특히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라 그런지 읽으면서도 많은 생각에 잠기게끔 하였습니다.


"혼내면 안 돼."

그때, 키를 잡고 있던 배의 주인인 작가가, 불쑥 그렇게 말했다. 앞을 향한 채, 내 쪽은 보지 않고 퉁명스러운 작은 목소리로.

"걱정하는 게 싫어서 혼내면 안 되지. 그냥 보고 있으면 돼. 그러다 떨어질 것 같으면 도와주면 되고."

나는 움찔했다. 나를 꿰뚫어 본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리고 마치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어른을 보는 기분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page 162 ~ 163


그녀는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멋진 책 한 권을 읽었을 때의, 지금 자신이 있는 세계마저 읽기 전과는 달라지게 하는 힘, 가공의 세계에서 현실로 밀려오는 것, 그 터무니없는 힘. 나는 이 에세이집 안에서,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 page 212


이제서야 작가와 나 사이에 소통의 한 길이 열린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은 그녀의 작품 세계 속에 마냥 떠다니기만 하였는데 이 책을 읽고나니 그녀의 작품과 그녀의 일상과 내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가 책 제목을 읊어보았습니다.

그녀가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바.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곳으로 떠나는 일이고, 떠나고 나면 현실은 비어 버립니다. 누군가가 현실을 비우면서까지 찾아와 한동안 머물면서,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게 되는 책을, 나도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 page 129


이젠 그녀의 책을 읽으면 제가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한동안 머물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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