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보는 그림 -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가만히 나를 붙잡아 준 것들
김한들 지음 / 원더박스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끄러운 오전 오후를 보내고나면 어느새 어둑한 밤이 찾아옵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 둘 잠을 청하게 되고 고요해진 집안.

순간 공허함과 고독이 찾아오곤 합니다.


부엌으로 가 커피 한 잔을 끓입니다.

그리고 커피향 한 모음 맡고나서 읽을 책을 골라 의자에 앉아봅니다.

그렇게 내 안을 조금씩 채우곤 합니다.


이 책의 겉표지에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가만히 나를 붙잡아 준 것들

왠지모르게 공감이 될 것 같은, 위로를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마음이 움직여 읽게 되었습니다.

혼자 보는 그림』 

 


본격적으로 그림을 보기 전.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십 년간 수많은 그림을 보며 살았습니다. 그중 발걸음을 잡는 작품은 드물었습니다. 드문 만남은 저를 오랜 시간 머물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옆의 그림으로 옮겨 갈 때도 저는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혼자 보는 그림이었습니다.

혼자 보는 그림은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마음이 어딘가에 다다르면 안정을 얻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스스로 정박했습니다. - page 9

혼자 보는 그림이란......

결국 나에게 전하는 위로였습니다.


책은 4부로 이루어져있었습니다.

'전병구' 작가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저자가 큐레이터로 지낸 '일상'의 이야기를.

'박광수' 작가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슬픔'의 이야기를.

'팀 아이텔' 작가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선택적 고독'의 이야기를.

마지막엔 '알렉스 카츠' 작가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희망'을, ''내일'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 중에 공감되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마음먹고 쉬는 것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여유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그리고 '나만 뒤처지지 않을까, 내 자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불안이 몰려오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같은 말을 되뇌었다. 같은 속도로 가는 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그러니 타인의 기준에 맞춰 조바심 낼 필요 없다고. 지금 삶의 속도에 의연하게 발을 맞추자고. - page 31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바쁜 삶을 다시 꾸릴 것이다. 세상에는 모두 때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니까. 지금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을 놓치면 안 되니까. 몸이 고되더라도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아주 가끔은 이렇게 쉼을 즐기며 살자는 다짐을 애써 해 본다.

좋아하는 미술관이 멀어도 가끔은 찾아가 전시를 보는 것. 그런 소중한 경험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차를 마시며 작품에서 받은 감동을 온기로 목 안에 남겨 놓는 것. 나이가 들었을 때 감기에서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이렇게 쌓은 온기일 것이다. 삶을 지키는 것은 결국 마음이고 마음은 이런 기억에서 온다. 이름 모를 해변에서 가장 뜨거운 지금 같은 순간에서 말이다. - page 31 ~ 32

저 역시도 '나만 뒤쳐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조바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마냥 부정적이었고 불안했었습니다.

하지만......

내 삶을 지키는 것은 결국 마음이라는 것을 한결 조바심을, 불안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박광수' 작가의 작품이 유독 인상깊게 남았습니다.

특히나 이 작품,  <검은 숲 속>, 2017

 

박광수 작가와 막걸리를 마시며 어느 때보다 즐거운 대화를 나누던 그 때.

어느 순간부터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박광수 작가는 '래빗 홀'이라는 영화 이야기를 꺼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화 속 후반부의 대사.​


 

​박광수 작가는 일명 '불사람'이 주인공으로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다 마지막에 그 숲으로 날아오던 새가 어딘가에 부딪혀 깃털을 터트리며 사라지는 애니메이션 영상을 제작해 혁오의 '톰보이' 뮤직비디오를 만들게 됩니다.

그때의 일렁이는 검은 선.

모든 것이 소멸하고 사라진 순간.

그 자리에 피어오르던 슬픔이.

그리고 이어진 저자의 이야기.

사랑했던 무엇인가가 존재했던 자리에서 슬픔은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은 작아지거나 옅어질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슬픈 경험과 기억은 내 몸과 삶에 각인되어 나와 함께 살아간다. 생각해 보면 누구나 마음 한켠에 몇 개씩의 작은 돌멩이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공평하게 말이다. - page 66

​혁오의 <톰보이>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난 지금 행복해 그래서 불안해
폭풍 전 바다는 늘 고요하니까
불이 붙어 빨리 타면 안 되잖아
나는 사랑을 응원해

젊은 우리, 나이테는 잘 보이지 않고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가는데 - 혁오의 <톰보이> 중에서


그리고 저자가 이야기하는 '고독'은 마냥 외롭고 구슬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유롭고 현연한 태도였던 '선택적 고독'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른 게 필요한 게 아니다. 시간만 있으면 된다. 스탠드 조명에 꽂힌 백열등의 노란빛으로만 가득 찬 어두운 방, 그 불븣 아래 덩그러니 놓여 있는 매트리스, 그 매트리스를 감싼 하얗고도 바스락거리는 시트, 그 시트를 덮은 포근하고도 따듯한 이불, 그리고 나. 이렇게 아무 말도 없는 고요, 그 안에 머무르는 시간.

그 시간 안에 머물면 결국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삶이라는 것은 오로지 나의 탄생과 함께 시작해 나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므로 외로움은 존재의 본질이다.

그림 앞에 홀로 주저앉아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진실하게 말하고 평담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살기를 소망했다. 나는 존재의 본질을 어느 정도 느끼며 살고 있는 걸까.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지금은 앞으로 더 선택한 고독을 마주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다. - page 117 ~ 118


이 그림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 모두가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플라뇌르!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 평화로운 사색.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따뜻한 햇볕의 온기임을.

그림을 보면서 잠시나마 그 온기를 느껴봅니다.


이 책이 좋았던 건 동시대의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동안의 미술 에세이의 경우는 유명한 화가, 명작들을 위주로 다른 이가 했던 이야기가 중복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혼자 보는 그림』은 오롯이 큐레이터 저자의 진솔한 이야기가, 그리고 작품 감상이 아닌 '공감'이 있었다는 점에서 담백하게 다가와 진한 위로를 전해주었습니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이 책을 읽는다면 그림과 저자의 이야기와 읽는 독자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작품이 되어 또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어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