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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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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볍지 않은 SF




과학 기술에 대한 선망과 두려움과 이 모든 것들의 집약체인 이 장르는 또 지극히 현실의 문제를 적나라게 보여준다. 너무 솔직해서 때론 불편하기도 하다.
눈 앞에 펼쳐질 이상적인 꿈에 도취되는 속도를 눈으로 느낄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때때로 철학자의 눈으로 인류의 성찰을 담은 이야기는 과학기술의 양면성, 윤리적 딜레마에서 항상 생각하게 만든다.



책상 위에 몇 권이 쌓여있는 소설들은 나의 이온 음료가 된다.
그래서 책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읽는 책이기도 하고, 뭔가 피곤해질 때 손을 뻗는 책이기도 하다. 아껴 놓은 비상식량 초코바 같은 것이다. 때론 카페인의 역할도 분위기 전환의 친구이기도 하다.  갑자기 구차하게 변명같지도 않은 것으로 핑계를 대려고 버벅거리고 있는 내가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조금은 뒷북 치고 있는 것 같아 머슥해서다.
이렇게 젊은 SF작가 김초엽을 조금 늦게 만난 핑계를 대고 있다.


한때 우리에게 가장 가까웠던 곳,
어느 순간에 와서 가장 먼 곳이 되버린 상황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안나가 맞이한 운명처럼 말이다.


열심히 한 시대를 살았던 안나, 그녀가 몰두한 시간 뒤에 찾아 온 것은 기약없는 기다림이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슬렌포니아 행성행 티켓은 그저 떠날 수 없는 그녀의 안타까움만 안겨 주었다. 자신이 맡은 연구만 끝나면 먼저 슬렌포니아로 이주한 가족에게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현실에 놓인 안나는 가족과 생이별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본주의 계산기는 실효성과 합리성의 원칙 아래  이러한 개개인의 삶은 무시한다. SF소설의 과학적 상상은 어느 정도 현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무시할 수 없는것이다.


지구에 남겨진 안나의 삶은 작은 희망의 티켓을 들고 그저 기다리고 기다린다. 가족이 있는 행성으로 가는 길이 그녀의 목적이었고, 사실상 그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언젠가는,


이 막막한 단어의 숨막힘을 다시 한 번 경험한다. 퍽퍽한 밤고구마를 삼킨 답답함을 연상케하는 단어들이 꽤 있다. 그 중 ‘언젠가는‘ 이 단어의 답답함은 정말 막막하고 가슴을 치게 한다.  책 속의 안나와 대화하는 청년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리고 누군가의 답답한 심정에 감정 이입이 돼 웃픈 현실을 마주한다. 맞장구를 치면서 아주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안나는 자신이 연구한 냉동 수면 기술로 동결과 각성의 반복으로 이 긴 기다림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녀의 연구가 비록 세상에서 빛을 볼 수 없었지만 그녀에겐 달랐다. 그녀가 쏟아부었던 시간이었다. 그로인해 잊혀진 시간과 살아보지 못한 시간에 대한 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나는 이 시간에 단단히 묶여서 풀고 나갈 수가 없었다. 안나에게 이 시간의 배신이 얼마나 고통이었을지 생각하면, 안나의 심정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열정과 그 시간의 배신 속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고통을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안나의 이 말이 가슴을 때리고 머리를 울린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의 객관성을 따진다는게 참 가혹한 현실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녀의 이 가볍지 않은 SF는 장편 소설인

<<지구 끝의 온실>>

  일기예보처럼 당연히 그날의 미세먼지 체크는 일상이 되버린 지금이다. 매년 봄의 불청객 황사만을 걱정하던 시간이 있었다. 여기에  미세먼지라는 녀석으로 어느새 계절을 벗어나 황사마스크가  우리 일상에서 익숙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로  집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에게 마스크는 일종의 의복이 되버린 현실을 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진보된 과학 기술과 발달, 이 모든 것은 환경 오염과 지구 온난화로 그 맥락이 이어진다.


책은 더스트로 인해 인류는 대멸종의 시간을 버티고  7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인류 재건의 시기에 돌입한다. 인류가 만든 과오를 인류가 수습하는 단계인 것이다.
더스트 이후의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태계로 그들의 삶을 바꿔 놓았다. 지금의 조건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세상을 이 책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멸망과 재건의 시대

더스트를 피하기 위해 당시 세계 곳곳에 사람들은 거대 돔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돔은 오로지 인간만을 위한 돔이었다. 당연 돔으로 피할 수 없었던 다른 생물들은 살아 남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돔으로 피할 수 없었던 생물들이 인간 이외의 생물만이 아니었다.  언제든 우리에게는 억지로 소외되거나  제외되는 인간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어떤 종은 멸종을 맞이 했고, 어떤 종은 적응하며 변이를 맞이했고, 또 어떤 종은 거의 멸종 직전 회생의 기회를 얻는다.
살아 남기 위한 각자의 방식으로 적응하는 과정은 돔 안에서도 돔 밖에서도 치열했다.

죽음과 가능성

죽음과 탄생은 늘 공존, 극과 극의 모순을 가지고 있지만 늘 통한다는 사실이다. 멸종과 그 위에 다시 쌓아 올려지는 다른 종류의 삶은 인류의 역사이며 시간의 흔적이다. 지금 우리의 삶도 누군가의 삶을 바탕으로 차곡차고 쌓여진 문명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더스트는 땅 위의 모든 살아있는 것을 손상시킨다. 작은 틈을 파고들어, 숨 쉬는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 ˝

˝메말라 붙은 숲 위에 새로운 종의 식물들이 덧 씌워 졌다. 이제 예전과 같은 숲은 없었다.˝


더스트 폴로 인해 수십 년 전 대멸종을 겪은 인류는 재건 이후의 생태계 변화를 조사하게 된다.
개량종으로 뒤덮인 산, 자연은 인간의 무수한 개입으로 인해 파괴되고 또 멸종위기라는 재앙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 위기에서 ‘적응‘하고 버티기 위해서 인간은 또 인위적인 개입을 하게 된다.  적응하고 변이된 생태계 또한 자연스런 적응이 아닌 인간의 개입에 의한 적응인 것이다. 이는 문제해결을 위한 영원한 답을 찾은 것이 아닌 일시적인 시간 벌기다. 이렇게 지금도 인간은 그때 그때 임시방편으로 모면하고 있는 것이다.

분열과 내분

모든 것은 이해관계에서 시작되었고 이해관계에서 틀어졌다. 어떠한 공동체라도 그 성립은 계약관계에서 서로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거래의 성사가 이루어질 때 우리의 관계는 이어진다. 하지만 이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그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다.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온실‘ 그 희망을 위해 서로가 감내해야 했던 힘듦도 참아냈던 그들은 서로의 이해관계로 인해 무너진다. 안전하다는 경계 그 경계에서 치뤄지는 다툼들이 점점 늘어났다.  처음의 목적은 이제 사라지고 서로를 공격하며 분열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흩어졌다.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에 대한 개입이 인류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그 가능성에 대해 시나리오를 보여주는 것 같다. 멸망과 재건의 과정에서 인류의 역사는 늘 쓰여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명감이란 단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보통 대단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분들에 대해서 우리의 목소리는 늘 그들의 훌륭한 정신에 대해 칭송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른다. 그들의 속내를 말이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인류를 구한 인물에 대해 칭송할 때 책은 말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 뿐이었다고.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했고 그 호기심이 족쇄가 되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것만이 다였다고. 거창한 사명감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세상을 구했던 모든 행동들이 이타적인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자신도 살아야 했고 자신의 시대를 꽤 착실히 살았던 결과라고 말한다.

우리는 안다. 보이지 않는 목적을 위해서 달려가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부질없는지 우리는 때때로 느낀다. 나 자신이 가끔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만, 예측할 수도 없지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살아내며 하나씩 채워 간다는 것이다. 살면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걸 생각하면 누구나 비슷하고 누구나 가능성은 남아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희망을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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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17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김초엽작가님 작품에 관한 글을 두번째 봅니다!ㅎ 이쯤되면 읽어야만 한다는 계시네요!ㅎ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

이뿐호빵 2020-12-17 22:56   좋아요 1 | URL
ㅎㅎ젊은 작가의 감성과 함께
짧은 시간, 즐독하실겁니다~~

막시무스 2020-12-17 22:57   좋아요 0 | URL
근데, 지구 끝의 온실은 알라딘에서 검색이 안되네요! 오프라인 전용인가요?

cyrus 2020-12-18 08:46   좋아요 2 | URL
To. 막시무스님 // 내년 초에 <지구 끝의 온실> 단행본을 만날 수 있어요. 그런데 밀리의 서재 단독 전자책의 개정판으로 나올 수 있대요. 작가님이 소설을 다듬는다고 보시면 돼요. 이상 작가님 오피셜입니다. ^^

이뿐호빵 2020-12-17 2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 그럴겁니다ㅜㅜ
밀리의 서재 정기구독 책이라...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지음, 김석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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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즐길 줄 아는 자, 혼자 놀 수 있는 자


자유로부터의 도피행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것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



불안과 무기력함에서 새로운 동아줄을 찾는다. 그리고 그 동아줄을 잡는 것에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나의 고독과 불안을 벗어버릴 수 있다면, 나는 누군가가 이끄는 줄을 잡고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이의 선동에 동요하고 그대로 녹아들지도 모른다.

무엇으로부터의 도피인지, 그 결과가 어떻게 일어날지 의심하지 않는 삶을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중세는 근대적 의미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립되어 있지도 않았다. 사회적 역할을 통해서 자신을 인식했던 시대였다.

근대에 와서 인간은 자유로워졌다. 더 독립적이고 자립적이고 비판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고립되고 고독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책은 말한다.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는 과거 권위주의 권력이나 규제에서 쟁취한 자유를 말한다. 전통적인 규제에서 조금씩 벗어나면 날수록 우리에게 새로운 적이 등장했다. 하지만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자유를 완전히 실현되는 것을 막는 ‘내적 요인‘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지는 데 매혹되어, 자유가 전통적인 적들한테 거둔 승리의 의미를 ‘내부‘의 제약과 충동과 두려움이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p120)

우리의 인격 발달에 큰 영향을 준 자본주의는 개인주의적 활동이 중요하다. 자본주의는 외부로부터의 속박을 해방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자유를 얻어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개인을 더 고독하게 만들었고, 고립된 존재로 만들었으며 개인이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에서 항상 개인은 외부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이었다.  인간이 어떤 목적에 대한 수단에 불과한 존재가 되자 결국에는 ‘히틀러‘라는 괴물의 하인 역할도 충분히 받아들 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의 민주주의가 가져다준 자유는 개인에게 불안과 고독을 가져다 주었다. ‘고독‘ 혼자라는 참을 수 없는 고립감은 살기 위해 새로운 유대 속으로 떠밀려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자아를 자기와는 별개의 실체로 잊어버리도록 버려둔다. 그러면서 새로운 안전을 발견하게 된다.


자유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것

도피의 메커니즘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인 경향은 극과극이다.

˝정반대의 욕망인 것 같지만 심리학적으로 이 두 경향은 모두 자신이 외로움과 무력함을 참지 못하는데에서 생겨나는 하나의 기본적 욕구의 결과다.˝ p173

힘의 두 가지 의미

‘지배‘나 ‘능력‘ 중 하나를 뜻할 수 있다. 이 두 성질은 서로 배타적이다.
˝지배라는 의미에서 파워는 능력의 도착이다.˝

가학-피학적인 사람을 특징짓는 것은 언제나 권위에 대한 태도이기 때문에 ‘권위주의적 성격‘이라는 용어로 대신 사용해도 된다고 한다.

자동 인형형 순응

주관적으로 느끼는 개인의 감정과 감각까지도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입된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질적이거나 나의 생각과 느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자신의 것처럼 느낄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 자신의 정신적 행위가 자발적이라고 확신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어떤 특수한 상황 아래서 누군가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것을 그 실험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가짜 생각, 내 머릿속의 생각들에 대해서

외부에서 주입된 생각 ‘가짜 생각‘들이 반드시 비논리적인 요소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론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근거에서 설명하려는 합리화에서 고찰 할 수 있다. 비합리적인 합리화를 시킨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

합리화는 단지 내 속에 있는 감정적 편견을 확인해 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합리화는 현실을 통찰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을 기존의 현실과 조화시키려는 사후의 시도라는 것이다.
우리는 감정에서도 진짜감정인지 가짜감정인지 구분해야 될 필요가 있다.


근대 사회의 자동인형화한 개인은 무력감과 불안감의 증대로 인해 언제든지 새로운 권위에 기꺼이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이를 역사적 나치즘에서 찾았다.
히틀러 그는 무력한 집단하고만 싸워 자신의 용기를 쌓아나갔다. 기회주의자에겐 유화책이 오히려 증오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개인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이를 인정하고 더 높은 힘 속에 자신을 용해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높은 힘에 용해되어 이 높은 힘의 기운과 영광에 참여하는 것에 개인은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히틀러의 주장이었다.
개개인의 힘이 모여 하나의 큰 힘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 이 사라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진실은 힘없는 사람의 가장 강력한 무기의 하나다.˝

이 진실이라는 것도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와 욕구에 뿌리를 둔다는 데 있다.


대중의 무리에 섞여 내가 아닌 척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안정감을 줄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안정감에 취해 자신을 놓치고 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허무감과 허망함만 남는다. 그 원인을 안다면 정말 행운아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알지 못한다.
세상과 동떨어진 생각과 분리된 괴리감은 불안 그 자체이기 때문에 내가 속한 사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조차 무서워한다.
같지 않다는 것은 무리에 섞일 수 없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처럼 심각하다.


‘자유‘는 굴레였다. 자유가 주는 불안함이 늘 나를 칭칭 감고 있다. 많은 고독과 불안을 초래하는 이 줄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만 잡고 있으면 나에겐 그래도 자유라는 것이 주어진다. 남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 한 나의 행위에 대한 제약이 거의 없는 동아줄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동아줄을 내가 잡고 있는 것이 아닌, 나를 칭칭 묶고 나는 그 줄에 감겨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할 때가 있다. 그런 안정감을 누리고 살았던 것이다. 몰랐을 뿐이다.
책에서 말한 무언가로부터의 도피 행위인 가학적-피가학적인 상황인 이 권위주의에 묶여서 나도 모르는 불안과 두통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럭키와 포조가 생각났다. 서로에게 묶여 이제는 어느 한 쪽에서 그 끈을 끊을 수도 없고, 누가 누구를 묶고 누가 누구를 끌고 가는지를 말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으면서 더 떠오른다.
정체도 알 수 없지만, 막연하게 기다리는 시간에서 온갖 방법으로 그 시간을 버텨내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세상에 투명인간으로 존재하는 삶을 말이다.
적응이라는 명분으로 순응하며 사는 삶 말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 안정감은 보장 받은 삶이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안정감이 나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요즘 깨닫는다.
자발적 행동 스스로 무언가를 찾기 시작하고 뭔가를 하나씩 깨달을 때 찾아오는 짜릿함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리오네트처럼 우리는 거대한 누군가의 줄에 매달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행동으로 끌려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무대위, 나도 모르게 입력된 정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무대 위를 활기차게 누비면서 연기하는 자동 인형들이다. 조용히 편안하게 흘러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생각했고 안정감이 최고의 행복으로 착각하고 산다. 이것이 삶에 대한 책임감이라 생각한다.



책에서 말한 적극적인 자유는 무엇인가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보다 인간의 감정적, 지적, 감각적 경험과 인간의 의지 속에서 작동할 수 있는 창조적 활동을 말한다.

˝인간은 자아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억누르지 않아야만, 자신에게 투명해져야만, 삶의 다양한 영역들이 근본적으로 통합되어야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p279)

자유라는 문제에서 해답은 자발적인 활동이라고 말한다. 소극적인 자유가 개인을 고독한 존재로 만들었다. 여기서 개인의 자아는 약해지고 위협 받는다. 하지만 자발적 활동,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본 모습을 희생하지 않아도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와 자연 그 모두와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힘이 ‘사랑‘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이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 속에 용해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서의 사랑, 개체적 자아를 보존하는 것을 토대로 하여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의 동적인 성질은 바로 이 양극성에 있다. 사랑의 분리를 극복하고 싶은 욕구에서 생겨나 완전한 일체로 이어진다. 하지만 개인이 제거되지는 않는다. ˝
(p281)

그리고 자발성을 이루는 또 하나의 요소로 일이다.
자발적으로 살 수 있을 때 자신을 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개인으로 인식하고 ‘산다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자아가 아닌 타인의 자아의 고유성도 최대한 존중해주는 성장인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과제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활동 자체에 의미를 두고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심리적 문제, 인간 존재의 물질적 토대는 물론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 정치적 구조에서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개인의 ‘적극적인 자유‘와 개인주의 실현을 위한 자아 실현으로 가는 자유는 우리가 속해 있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민주주의 실현이 완전히 실현되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한다.

에리히 프롬이 이 책을 썼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여기서 잠깐 묻고 싶다. 에리히 프롬의 문제제기, 지금의 21세기 민주주의 실현은 어디까지 왔을까. 모든 개인의 생존에 기본이 되는 활동에서 개인의 실제적인 자유와 창의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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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08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지는 못하였으나 오래 전,
에리히 프롬 선생의 <사랑의 기술>
읽고 나면 사랑 기술자가 되는고야?
하면서 친구들하고 떠든 기억이
나네요.

제목이 아주 거창하네요. 자유에서
도피하면 노예가 되는 건가?
죄송합니다, 쿨럭.

이뿐호빵 2020-12-08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사랑의 기술 전수 받고자 열심히 읽어내긴
했지만, ㅋㅋ
그런건 책으로 얻어지진 않더라고요
역시 경험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 헌법은 제1조 2항은 물론 헌법 전체를 통하여 ‘국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 유진오 초안에는 모두 ‘인민‘ 이라고 되어있었다. 초안 작성자가 국민 대신 인민이란 어휘를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가 강하여 국가 우월적 느낌을준다.

p34

 반면에 인민은 국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표현한다. 그러니 국가를 구성하는 자유인으로서의 개인을 표시하는 데 인민이 적절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초안의 ‘인민‘은 국회 헌법기초분과위원회 심의 과정에서 ‘국민‘으로 바뀌고 말았다. 국호가 ‘조선‘에서 ‘대한민국‘ 으로 변경된 것과 함께 일어난 일이다. 그 주된 이유는 북한 때문이었다. 당시 국회의원 윤치영은 "인민이란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그러한 말을 쓰려고 하느냐. 그런 말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흥분했다. 하지만 인민이란 용어는 구 대한제국의 절대군주 시절에도 사용하던 용어였다.

1948년 7월 1일부터 시작한 국회 본회의 헌법 초안 제2회독 때 국회의원 진헌식이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몇 개 조문을 제외하고일반적으로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규정하는 조문에서는 모두 인민으로 하자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역시 윤치영 의원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인민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 좋은 말을 공산주의에 빼앗긴 셈치고 포기했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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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 연습
레몽 크노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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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크노 무작정 따라하기

-책이 나왔습니다

레몽 크노의 <<문체연습>>
조재룡 교수님의 번역으로 책이 나왔습니다.
자신만의 독보적인 창작 세계를 가지고 있는 레몽 크노의 <<문체연습>>은 파격적이고 언어 실험의 극단적 예를 보여줍니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감상하는 묘한 느낌을 이 책 <<문체연습>>에서 느낄 줄은 몰랐습니다.
화제의 책으로 호기심에 선뜻 주문을 하고 받는 순간, 다양한 표정으로 표지를 덮고 있는 띠지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레몽 크노의 연속 사진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표정들은 <<문체 연습>> 의 호기심을 더 발동시켰습니다. 찌그리고 뭉개지는 레몽 크노의 표정들은 어떻게든 망가져 평범한 표정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책의 이야기가 더 궁금합니다. 호기심과 즐거운 설레임에 끌려 주문한 책 중에서 제일 먼저 넘겼습니다.

‘어느 날 정오 한 만원버스에 올라탄 그 순간의 일‘
정말 별 것 없는 이야기를 99가지 표정으로 만들어 내는 레몽 크노의 능력에 놀랐습니다.
그의 별난 표정들처럼 별나게 이야기를 다양하게 만들어갑니다.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은 바흐의 음악, 푸가의 변주에서 영감을 받고 썼다고 합니다.
그의 의식의 흐름 위에서 쓰여졌고, 자유롭게 형식 같은 것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레몽 크노의 문체의 다양한 변주는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낯선 자유를 선사했습니다. 묘하게 끌립니다. 꽤 치명적인 유혹으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당분간은 이 자유로운 레몽 크노의 개구진 재미에 빠져 있을 것 같습니다.

99가지의 변주들,

‘어느 날 정오 한 만원버스에 올라탄 그 순간의 일‘
하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다양한 방식으로 연주되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만약 그런 호기심이 생긴다면 분명 《문체 연습》의 은근한 매력에 빠질 준비가 되셨습니다.
이제 책을 넘기기만 하면 가능합니다.




ㅡ자신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레몽 크노, 그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책을 읽고 이것 저것 올라온 정보를 읽어 본 것이 고작이다. 이 가소로운 정보만 갖고 그의 책 《문체 연습》 대해서 말한다는게 부끄럽다.
이 부족함은 당연, 사람을 자신없게 만든다.

조재룡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한국판 《문체연습》은 표지부터 내 눈을 사로 잡았다.
책을 감싼 띠지, 레몽 크노의 일그러진 표정의 연속 사진은 책의 표지에 더한 정감을 부여했다. 왠지 책의 내용보다 먼저 표지에서 더 끌린다.

레몽 크노와 그의 책 <<문체 연습 >>에 대해 자신없지만, 주절거려본다.
먼저 그는 바흐의 음악 푸가의 변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하나의 이야기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는 문체는 파격적이다. 하나의 이야기는 이렇게 99가지 방식으로 변주된다. 경이롭다. 제목을 보는 순간 더 재미있는 건 상황에 따라 감정에 따라 오감을 자극하는 제목과 함께 문체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상상과 함께 레몽 크노의 문체는 나에게 하나의 작품으로 느껴졌다. 묘한 설레임과 재미 그리고 나의 작은 호기심마저 끌어 올리는 것 같다.

책을 읽거나 작품을 감상한 이들의 모든 생각이 다를 것이다. 이 책은 더 많은 느낌을 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만 그런건가. 레몽 크노의 다양한 변주곡이 나는 아주 매력적이다. 나에게 재미진 문체의 다양한 실험적 설정이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떨지 모르겠다. 다만 전해줄 수 있는 것은, 이 획기적인 문체 실험을 통해 연주되는 다양한 변주곡을 꼭 느껴보면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글을 읽고 나니 레몽 크노의 연속 사진의 다양한 표정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개구진 얼굴의 일그러진 표정들이 평범하지 않은 채 특별하게 다가온 것이다.
지루한 글쓰기에서 색다른 글쓰기의 재미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그랬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지만 ...


<설레발치다>

오호! 드디어 오늘이다
책이 도착했다

책의 띠지, 레몽 크노의 개구장이 같은 귀여운 표정은 책을 읽기도 전에 사람을 웃게 만든다

이건 뭐지!
역시, 초현실주의 레몽 크노님 답구나!
역시, 매력적이야
이 흥분된 떨림을 어쩌란 말인가
온몸에서 느껴지는 이 춤추는 감각들을 어쩌란 말인가

평범한 이야기 하나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갈갈이 찢어 놓고 합체하고 풀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평범한 이야기를 제대로 찢었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이런식으로 찢어 놓고 묘한 쾌감과 매력을 더하고 있구나!

우후!
역시 레몽 크노님!
완전 짱 멋있음!

어쩌나,
나 레몽 크노의 치명적인 덫에 걸려든 것 같은데
이 지루하지 않는 문체의 변주곡에 빠져든 것 같은데
그의 개구진 언어 실험에 그의 개구진 얼굴에 빠져서 그 유혹을 벗어 날 수가 없다

책을 놓을 수가 없네
그 황홀함에 빠져드는구나
레몽 크노의 천재성에 말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마무리

책을 중간 쯤 읽다가 책의 뒷부분에 있는 해제를 살펴가면서 제목별로 읽어 나갔다.
해제와 왔다갔다를 하다보면 의미가 조금 더 다르게 다가올 때가 있었다. 레몽 크노의 문체를 분석하는 것은 전문가의 역할이고, 나는 그저 주관적 시선으로 감상을 해 나갔다. 그게 더 편했다. 애써 모르는것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껴보았다.

이 책은 왠지 더 그래야 될 것 같았다.
클래식 문외한이  처음 클래식  음악을 접하고 입문하는 과정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조심스럽지만 새롭고, 낯설지만 흥미로운 책이었다.

낯선 음악을 처음 듣고 뭔지 모를 호기심에 빠진 묘한 기분이다. 인상깊은 작품처럼 머리에 가슴에 또 남겨진다.
그리고 자꾸만 하늘로 치솟은 수염을 한 살바도르 달리의 얼굴이 레몽 크노와 겹치는 건 뭔지 ...
개구진 그들의 실험정신일까...

그들의 실험적인 시도에 나도 슬쩍 따라가지만,
역량부족이라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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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현재사 - 당신이 말하는 청년은 ‘우리’가 아니다
김창인.전병찬.안태언 지음, 청년담론 / 시대의창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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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바라보는 청년문제

청년들이 바라보는 청년문제, 하지만 정작 일반적인 청년들에게 참 ‘낯선 단어‘로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더 많다는 것. 이때 알았다. 지극히 평범한 나에게 조차도 그동안 가진 생각이 참으로 단편적이고 실제도 특권을 누렸다는 것이다.

현 사회에서 청년문제는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가장 최우선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로 다뤄진다. 그러면서 뉴스나 포털의 지나친 과장은 정작 청년들이 느끼는 감정을 공감하지 못한다고 한다.
어떤 청년에게는 지금의 입시제도에서 밀려나 불공정에 분노하지만, 애초부터 출발점이 틀린 누군가에게는 ‘강 건너 불 구경‘이다. 이는 입시, 군대, 취업에서도 비슷하다.

청년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어 직접 인터뷰한 이 책은 당혹스런 결과를 초래한다. ‘날 것 그대로 청년들의 민낯 ‘ 은 청년문제를 공감하지 못하거나 심하게는 반감마저 가지고 있다.

결국, 눈높이의 문제다.

할 건 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청년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할 건 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국민들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언론과 미디어에서 말하는 청년문제는 다양한 청년들의 문제를 일률적이고 평면적이고 단편적으로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입체적이지 못하다.

그들이 말하는 청년실업문제는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화이트 직종을 희망하는 남성들의 어려움에 촛점을 둔다. 경제적 구조와 젠더 문제에서 사라진 청년들의 문제는 없다.
특히, 정치인들의 입에 오르는 청년들의 문제는 한국사회의 중요한 갈등을 배제하고 계급, 젠더, 지역은 점점 지워지고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더 키우는 결과를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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