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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힘 - 미래의 최전선에서 보내온 대담한 통찰 10
고장원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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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진화할 것인가 퇴행할 것인가

˝성형에 버금가는 유전자‘조각‘ 수술이 성행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기 아주 애매한 상황
뭔가를 단언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 주는 상황 유전공학을 이해한다면,
왜 이런 질문과 답에서 ‘아버지인 듯 아버지가 아닌 듯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는 일단 친족 상속권과 재산권을 둘러싼 법적 분쟁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변호사의 업무 영역이 더 넓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

무슨 말이냐 할지도 모른다.

300년 전에 죽은 누군가의 생식세포나 체세포가 냉동보관되고, 그 세포들로 합성한 정자를 자신의 난자와 결합시켜 임신한 여인. 그녀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는 당연 300년 전에 죽은 이다. 이는 자신의 후손을 위해 다시 한 번 유전공학을 이용해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유전학자들의 개입이 필요하다.
자신을 태어나게 한 부모라는 개념에서 보면 생물학적 아버지와 어머니뿐만 아니라 이를 가능하게 한 유전공학자의 개입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지금의 보편적인 생각으로는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초래할 수 있는 문제는 늘 돈에 관련한 사건 사고가 될 것이다.

유전공학으로 인한 혈족관계에 대한 상상은 1970년대에 폴란드의 과학소설 작가 스타니스와 프 렘이 내놓은 것으로 당시는 허무맹랑한 판타지로 생각될 지 모르지만 앞으로 30-40년 후면 실감나게 될 것이라 예언아닌 예언을 했다. 지금 이 판타지가 실현 가능한 시대를 맞고 있다. 2003년 과학자들은 이미 인간 게놈지도를 완성했다. 그리고 이제 유전병 치료를 위한 많은 시도는 여러 분야에서 그 잠재력을 보이고 있다. 이제 가족이라는 개념도 달리 해석해야 될지 모른다. 기괴한 가족관계는 일상적일 수도 있고 막장 드라마의 요소는 이제 어색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유전공학과 생명공학의 발전이 가져다 준 혜택과 그 경계에 부딪히는 윤리적 책임에 대해 생각해야 되는 SF소설과 영화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닌 것이다.

현대의 유전공학은 동물의 DNA에 인간의 것을 뒤섞어 종간 경계도 무시하는 중간자적 존재를 탄생시키는 일도 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생체 이식 수술‘에 관한 기사문을 보았던 기억이 다시 살아난다.

뇌 이식에 관한 기사와 그 수술에 자원한 러시아의 컴퓨터 과학자 이야기는 솔직히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미국의 테슬라의 창시자 일론 머스크의 도전은 바이오 기업에서 설치류를 대상으로 하지만 뇌 이식을 위한 사전 단계의 실험을 위해 당국에 허가를 요청했다는 기사 등

반인반수가 등장하는 영화, 다른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생각하게 하는 SF의 힘은 유전공학이라는 과학적 진보에 앞서 여기서도 부의 격차는 불공평한 사회를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책을 보면서 가장 관심사인 유전공학 chapter
여기서도 꽤 많은 생각들이 자리잡는다.

다음 chapter는 우주개발이다.


SF장르를 좋아한다.
과학소설과 과학영화가 주는 많은 여지와 여운을 좋아한다. 그리고 매우 흥미진진하다.
무엇보다 잔혹함이 적나라하게 노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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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고 그럭저럭 괜찮은 식단이란


어느순간 바쁘다는 핑계로 내 몸에 아무거나를 막 집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늘어난 몸무게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울 정도가 되었다. 몸무게 변동이 거의 없었던지라 체중에 그닥 신경쓰지 않고 살았었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어느새 슬금슬금 쌓인 지방이 감당불가다. 그래서 요즘 살면서 첨으로 ‘다이어트‘라는 단어에 관심이 간다.

잘 먹고 운동하기

나에겐 쥐어짜도 생길까 말까한 의지가 바로 ‘운동‘이다.
여지껏 꾸준히 실천한 운동이라곤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숨쉬기‘ 운동이며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이 다였다. 운동의 필요성을 알지만 쉽지 않은 움직임은 유독 여기서 게으름를 피운다.
차라리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싶어 마음 먹은게 요즘 유명한 ‘간헐적 단식‘이다. 이른 저녁을 먹고 군것질부터 끊고 과다탄수화물의 섭취를 줄이는 방식으로 식습관을 다시 개선해 보자고 다짐했다. 그러던 차에 눈에 들어온 책들은 식사에 관한 책이며 비만에 관한 책이었다.

<<식사에 대한 생각>>

평범한 식사가 사라진 식단의 ‘양극화‘

건강 불평등을 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인 패스트푸드 음식들
지역마다 나는 식재료의 음식과 고유의 음식이 사라지고 있다.
전 세계인의 비슷한 식사는 이제 비슷한 입맛으로 바뀌어간다.
넓어진 선택권으로 이제 우리의 식사를 대체할 음식들이 많다.
매일 끼니 걱정은 못먹는 굶주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먹느냐‘에 따른 걱정이다.
풍요속의 빈곤은 이럴 때도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지.

‘‘음식은 부족해서가 아니라 흘러넘쳐서 우리를 괴롭힌다. 속이 텅 빈 풍요다.˝

지금도 나는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있다. 일상의 많은 고민들 중 식사의 고민도 무시할 수 없는 고민거리다.

현대인에게는 식사시간 조차 사치로 치부된다.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식사시간은 이미 접어둔 것 같다.
‘훌륭한 식사‘가 의미하는 것이 뭘까.
식사 준비는 시간과 비용 그리고 노동력이 든다. 하지만 요즘은 이 모든 것을 줄일 수 있는 간편함에 익숙해져 간다.
지금 세대의 식문화는 배달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하고 모든 절차는 사라진 채 포장된 음식을 소비한다.
내가 먹은 음식에 대한 인증샷은 필수처럼 되버린지 오래다. 그래서 sns상의 음식들이 다양한 것 같지만 결국에 비슷비슷한 음식들로 채워져있다. 먹지 않아도 먹은듯, 맛들이 짐작되는 음식들을 먹고 사는 것 같다.
식사를 같이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넘어 sns상의 사람들의 소통을 플러스한 현대인의 식사시간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 차원을 달리하는 시간이 된다.

˝음식이 곧 정체성이라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일 다중인격자다˝

식품 트렌드가 만들어 낸 변화와 문제

‘‘식재료의 변화와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이야기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브런치가 있는 카페로 가면서 새로운 음식에 대해 상상한다. 소셜 미디어가 우리 식생활에 너무나도 강력한 영향을 갖게 되면서 온라인은 나누고 싶은 음식들이 즐비하다. 그러면서 플레이팅을 위한 각양각색의 야채들과 과일들 흩뿌려 장식한 꽃잎들 sns가 만들어낸 유행이다.‘‘

이제는 전 세계인들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 이웃처럼 알 수 있다.
인간은 늘 식사와 관련해서 네오포비아(neophobia,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와 (neophilia, 새로운 것을 향한 사랑)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다고 한다.

퀴노아 종자의 소유권 문제, 식량 주권의 문제

아보카도, 이 낯선 과일이 언젠가부터 우리 식탁이나 마트에서 흔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보카도 재배지 멕시코에서 생산량은 세 배나 늘었고 이는 산림 파괴와 지나친 물 사용으로 이어졌다.
식품 트렌드의 문제는 세계의 음식 소비 패턴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게 된다. 그러면 식재료를 더 많이 재배해야 하고 재배 경작지를 위해 산림을 파괴해야 한다는 문제를 낳는다. 무엇보다 생산자들의 고통은 그들이 부유해져도 위험에 처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변화에 어떤 영향이 미치는지에 대해 따져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도 문제가 된다.
오늘날 식품 트렌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쁜 현대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즐거움과 건강,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규칙적으로 식사를 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책은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진짜 음식이 무엇인지조차 잊은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고 있다.

칼로리에 ‘가치를 입히는‘ 기업

우리가 먹는 음식은 예전보다 다양해진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음식을 만드는 식재료는 점점 단일화되어 간다고 한다. 그러면서 단일품종으로 대량 생산되고 그 식재료에 익숙해진 맛은 다른 품종의 재배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만든다. 경제적 이유로 돈이 되는 것만 생산하게 된다.

건강한 음식에 대한 생각

완벽한 건강한 음식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건강한 음식과 건강하지 않은 음식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대인이 집착하는 것이 ‘영양소‘이다. 그래서 식탁위에는 영양제가 골고루 구비되어 있다.

˝식탁에서 행복해지려면 음식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

완벽한 식사를 위한 집착은 일상의 괜찮은 식사를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우리 앞에 놓인 음식의 이름을 알고 우리 입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의식하는 것이 좋은 시작일 수 있다.˝

이는 더욱 균형 잡힌 쪽으로 뱡향을 틀게 만들 것이다.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한 이해는 음식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의식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식사시간을 위해 무언가를 투자해야 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먹는 원재료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생각은 적어도 바른 먹거리를 위한 노력이다. 원래 기름진 음식과 육류를 그닥 좋아하진 않지만 요근래 인스턴트 음식과 패스트푸드를 다량 섭취하는 나, 왠지 내 몸에 죄책감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소소하지만 별 것 없던 집밥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고칼로리 저영양의 식탁에 대해서도 반성하게 되었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를 음식으로 한끼 때우는 식의 식사가 나의 삶의 질도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 반성했다.

마지막으로 평범하고 그럭저럭 꽤 괜찮은 식단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먹거리 하나로 파생되는 사회 문제가 전 지구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 또한 무시 못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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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0년 4월 미래

‘역사 임무‘

역사를 직접 체험하며 배운다?
아니다. 자세히 말하면 재확인하고 보완 작업일 수도있겠다.
미래에서 과거 역사 속으로 슝.
그곳에서 살아 있는 역사를 직접 관찰하는 미래 역사학자들의 시간 여행, 이 익숙한 설정은 아이들 학습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설정으로 학습 만화를 한 번이라도 접했던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 한 시점으로 돌아가 그들이 배운 미래의 역사적 사실을 눈으로 확인 관찰하고 보고서를 적는 식의 임무는 미래 역사학자들의 모습이었다.
가끔 기록된 한계의 아쉬움은 늘 안타까움과 답답할 때가 많다. 역사적으로 큰 사건들을 직접 겪게 된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에는 늘 막막한 감정만 남긴다.
하지만 꽤 매력적이고 설레이는 일이기도 할 것 같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과거 시간 여행을 기대하지 않을까 싶다.

책 속의 시간적 배경은 2060년이다.
역사 학자들의 시간 여행이 가능한 미래, 이제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줄 기적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들은 ‘제 2차 세계 대전‘ 시기인 1940년대로 가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시간과 공간적 편차로 인해 과거 시간 속에 갇혀버리게 된다.

2060년 옥스퍼드
역사 학자들의 임무가 갑자기 조정된다. 이들은
시간 여행을 위해 자신들의 임무에 대한 역사적 자료와 지식을 전반적으로 공부하고 심는다. 그리고 자신의 포지션도 정하고 그에 맞는 설정 작업은 기본이다.
하지만 일정이 바뀌거나 조정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초기화 시키는 제로작업이다. 불만을 제기하지만 정작 책임자인 교수는 만날 수가 없다. 결국 조정된 임무로 시간 여행을 가게된다.

시간 여행 중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은 한 부분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시간 여행에서 자꾸만 깊이 관여하게 되고 관찰자로의 임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전쟁 속의 참혹한 과정을 눈 앞에서 경험한다. 이 속에서 진정한 영웅은 일반인으로 ‘이름 없이 희생하고 사라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급박하고 모든게 파괴될 수 있는 시간에서도 그들의 일상은 어떻게든 이어졌다. 결과를 아는 역사학자들에겐 이들의 일상 시간이 안타까움의 연속이다.

시간 편차에 의해 계획했던 모든 것이 틀어진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상황은, 그들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 미래에서 자신들이 공부했던 역사들은 실질적으로 정확하지 않았다. 섬세하고 모든 상황들을 기록할 수 없었고 전해지면서 왜곡된 사실도 많았기에 불완전했다. 과거로 가서 어떠한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 관찰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전쟁 중이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을 상황

코앞에 엄청난 일이 닥칠 것인데도..

항상 일이 터지기에 앞서 전조 현상, 즉 분명한 징조가 있다. 육감을 가진 다른 생물들은 이상한 낌새를 곧바로 직감적으로 안다고 한다. 왜 항상 인류는 그런 재앙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질까에 대한 답은 방심이다.
그 순간의 삶에 지나치게 충실하고 지나치게 몰입하다보니 내 주변에 일어나는 작은 징조를 알아챌 수 없다. 신경을 한 곳으로 집중하는 것이 생존 보다는 다른 것으로 다양하다. 그리고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천적의 위험에서 다른 동물들보다 우위다.
불행을 그저 남일이라 생각한는 사람들
그 순간 모든 것이 지나치게 된다. 의심하지 않는 상황은 태풍 전야처럼 조용했다.

‘송두리째 장악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현실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 코로나로 인해 일상이 무너져도 그 이상의 재난이 우리 삶에 닥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더라도 무시하는 일상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여기서 나대거나 호들갑 떨거나 목소리를 올리면 별난이가 된다. 세계 석학들이나 지식인들의 경각심은 당연한 것이고 일반인들의 경각심은 무시된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목소리는 늘 묻힌다. 세상은 대부분이 일반적인 사람들인데...

‘적응했다‘
역사학자들이 던져진 공간에서 그들이 목격한 전쟁은 죽음과 비극적인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독일의 영국 폭격에서 사람들의 모습은 공포만 남았을 거라는 예상밖의 상황을 보여준다.
여러 번의 공습 경보와 폭격을 겪은 사람들은 이제 이러한 일상에 적응하고 자연스러워졌다. 기약 없는 끝을 기다리며 일상을 살아간다.
무섭다.
적응이 이렇게 무서울 수도 있다는 것은 적응하고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이때 찾아오는 방심은 앞으로 닥칠 더 큰 일을 예상할 수 없도록 모든 직감들을 마비시킨다. 현실을 차분하게 보낼 수는 있지만, 그 상태를 깨는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방심은 금물‘
익숙해졌을 때가 가장 위험한 법이다. ‘미생‘의 대사 중 ‘취하지 마라‘가 떠오르는 지금이다.


요즘도 비슷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바이러스와의 전쟁 중이다.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간과 지루함의 지침은 그저 무감각으로 변했다. 예전의 경각심과 조심함은 마스크가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처럼 넘긴다.
지금 이 상황이 거의 6년간 지속된 전쟁 중의 일상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세계 대전의 폭격 속에서도 적응 속도가 참 빠르다. 그리고 어느새 익숙해져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과거의 좋았던 기억과 함께...

몇 년 전에 봤던 ‘덩케르크‘ 영화 속 장면이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떠올랐다. 민간인의 작은 배로 직접 연합군을 구출하러 가는 용기있는 행동들과 그들의 따뜻함은 인류애를 자극했다.
지루하고 답답한 이 상황과 전쟁 중의 모든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영웅이 나타나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근데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그 누구가 아닌 우리다. 역사의 속도는 늦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랬다는 것이다.
진정한 영웅이 우리들 자신일 수 있다. 큰 일을 해서가 아닌 진정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선한 영향력은 내 주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이다. 코로나와의 전쟁에서도 내 이웃에 대한 배려가 있다면, 재확산이라는 불행은 없지 않았을까.

2차 세겨 대전의 교훈을 우리는 잊고 있다.
이 책이 보여주는 일상, 보통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책 보는 내내 현실과 자꾸만 오버랩이 되어 안타까웠다. 자꾸만 반복되는 비슷한 역사는 방식의 차이는 조금 있지만 그대로다.
경제 대공황 뒤에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그들이 선택한 것들이 지금과 다르다고 절대 말 할 수 없다.
경제 위기는 거의 10년 주기로 돌고 돈다고 한다. 지금 전 세겨적인 경제 불황은 이미 시작됐던 것이다. 과거 전쟁의 위험은 무기 경쟁으로 인한 것이었다. 지금의 전쟁은 하나 더 플러스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므로 보이지 않는 위험이다. 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는 많은 부작용이 있다. 사람들이 위험을 직접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황이 더 길어지고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한 여름 시원하게 넘기려고 택한 책에서 정말 끔찍한 공포를 느낀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은 나에게 목적 달성을 이루게 만들었다.
어떤 큰 사건 뒤에 가려진 작은 일상들은 잊혀진다.
더욱 역사 속에서 그런 소소한 이야기는 사라져 버린다. 이 잊혀진 이야기를 SF라는 장르에 담아 우리가아는 역사적 사실이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다. 역사를 안다고 해서 과거의 삶을 다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은 여전하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보여진 시간 대부분이 영웅적인 서사나 어떤 큰 사건의 분기점이 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참혹한 전쟁 중에서도 사람들의 일상은 평범했으며 비극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삶의 의미를 찾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이 ‘영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여웅들의 힘이 모여 버티고 견디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진짜 영웅‘은 주변을 돌보고 사랑한 사람들이다.
누가 대신 이 상황을 극복해주지 않는다. 그 기대는 분명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정책적으로나 정부가 할 일이고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것이 여기서 빨리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그건 그렇고

블랙아웃, 정보 없이 읽다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이제 본격적으로 재미지게 이야기는 달려가고 있는데 ...
2권이 끝이 아니었다. 이런 황당함이란
후속편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안다.

-힝든 ‘덩케르크 구출 작전‘을 성공시키고 처칠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이 구출이 전쟁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님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수는 성공했지만 전쟁은 아직 이기지 않았다. 우리는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항상 끝을 본다는 것은 지루한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초심의 마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집중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지금이 그럴 때다. 하지만 그러질 못한 시간이 왜 이리 답답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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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표적 사상가

그 자신이 아픔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

참혹했던 시간에서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절망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존재의 의미를

저술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
그가 창안한 ‘로고테라피‘ 실존적 분석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혼란스러움을
그는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집중했다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상실된 강제수용소의 참혹한 상황에서도
별것 없는 것에서 자신의 시련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밖에서 오는 운명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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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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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게 요구되는 법이다


톨스토이,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 위대한 사상과 , 혁명의 거울, 휴머니스트, 사회 비평가 하나의 수식어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 할 정도로 많은 수식어가 그의 위대함을 말해주고 있다.

<안나까레니나>는 그의 재능이 한창 절정에 달해 있을 때 집필 된 작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책은 많은 이에게 읽힌 고전 중의 고전이기도 하다.
안나와 레빈의 이야기가 두 축을 이루면서 겹겹히 전개 된다. 이렇게 이야기들은 적잖은 페이지를 자랑하는 벽돌 책이 되었다.
고위 공직자의 아내인 안나,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비극적 운명을 맞는 이야기
연모하던 귀족 영애에게 청혼하여 이상적인 가정을 이뤄가는 농촌 귀족 지주 레빈의 이야기들

결혼, 가정의 불행과 행복의 문제, 당시 러시아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 그 시대를 사는 개인들의 내적인 방황을 생생하게 표현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책은 ‘톨스토이‘의 모든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고민들이 집약된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이라 불린다.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는 고전 소설을 다시 읽는 다는 것은 끈기가 필요하다. 어떤 계기가 있지 않음 개인적으로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다.
<안나까레니나> 역시 너무나 유명한 고전이며 영화나 뮤지컬 등 다수의 작품으로 소개되어 내용면에선 익숙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책은 분량 또한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읽는 내내 안나와 레빈의 삶에 빠져들었다. 전자책이라는 매체의 아쉬움은 책의 초반 몰입을 떨어뜨리는 걸림돌이 되었지만, 점점 인물에 집중할수록 몰입의 장애는 사라졌다.

이 책을 편애하는 동안, 틈틈히 읽던 다른 책들의 집중도는 떨어지고 주변부로 잠시 밀려나기도 했다.
대부분의 고전, 학창시절 의무감에 의해 읽었던 책들은 거의 감흥이 없는 형식적인 맥락만 파악한 책들이다. 그래서 나에게 고전들이란 몇 개를 제외한 책 말고는 거의가 사전같은 존재로 남았던 것 같다. 없으면 안되고 꼭 있어야 하는 책, 그래서 나의 머리 한 켠에 묵직하게 자리는 잡고 있지만 쉽게 건드리지 않는 책이 되버린 것이다.
<안나까레니나> 또한 그런 책이었다. 그저 가정을 버린 한 여자의 불행과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레빈의 시간만을 기억하며 톨스토이의 두꺼운 고민들을 몇 줄로 요약하며 지내왔었다. 하지만 다시 읽는 지금, 놀라움이다.
안나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곤 하고 레빈의 결혼생활에서 나의 시간들이 보인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각각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가슴으로 들어왔다.

이야기의 스토리는 너무나 유명해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사족일 것 같다.
내게 다가온 <안나까레니나>는 불륜을 저지른 불경스런 인물도 아니고 자신이 중요했던 이기적인 인물도 아니다. 그저 살려고 발버둥 치는 물 속에 빠진 위태로운 한 인물이었다. 당시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는 사랑에서도 높낮이가 달랐다.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언제나 분명한 남자들은 자유로운 선택권이 주어진다. 하지만 당시 여성으로서는 오로지 수동적으로 상대를 기다려야 되는 것이 처녀들의 미덕이었다. 그래서 여성의 눈에 비친 남성들이란 눈에 보이는 액면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게 요구되는 법이다. 그 진실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기회가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대적 배경을 안고 결혼한 안나에게 결혼생활은 ‘현상유지‘를 위한 그림자 부부로서의 시간이었다. 그녀의 남편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자신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은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사람이다. 고위 공직자의 이상적인 결혼의 목적은 이상적인 가정과 자신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는 역할만 강조한 채 평온한 현상유지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도 안나의 불륜으로 인해 원치않게 많은 고민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측은지심‘을 경험하는 감정은 아내를 ‘용서‘하기에 이른다. 그녀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임박한 상황에서 그는 그녀의 고통을 가엾이 여기게 되고 그 옆의 ‘브론스끼‘ 마저 연민의 감정에서 용서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안나가 눈에 들어온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용서‘는 안나에 대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요즘 느끼는 것이지만 관계에 있어서 ‘타이밍‘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관계에서 어긋남이란 서로를 이해하는 타이밍이 빗나간 것이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모든 에너지를 한 곳으로 집중적으로 쏟아 붓는다. 그래서 주변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사랑의 감정에도 각자가 지향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이 다르면 이 타이밍은 더 만날 수 없다. 안나와 알렉세이 알렉산드롤비치의 관계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을 읽는 줄곧 이 부부에게 안타까운 미련이 남았다.

몇 년 전에 봤던 영화 <<커피메이트>>가 떠오른 건 안나의 심정을 내가 조금이나마 이해한 뒤였다.
인영과 희수의 관계에서 브론스끼와의 관계가 인영과 남편의 관계에서 안나와 알렉세이 알렉산드롤비치의 모습이 보였다.

˝경건하고 도덕적이고 정직하고 영리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내가 본 것을 보지 않잖아. 지난 8년 동안 그가 얼마나 내 삶을 질식시켜 왔는지,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던 모든 것들을 얼마나 짓눌러 왔는지를 그들은 모르잖아. 내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살아 있는 여자라는 점을 단 한 번도 그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라. 그가 매사에 나를 모욕하고 자기만족을 맛보았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고. 나도 내 삶을 정당화할 길을 찾고자 온 힘을 다해서 애써 오지 않았겠어? 그를 사랑하려고, 이미 남편을 사랑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는 아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겠느냐고! 하지만 때가 되었고, 이제 깨달았어.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는 걸, 나는 살아 있다는 걸, 내 탓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이런 여자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 여자로 만들었다는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과 ‘사랑이 필요했던 사람‘
이 불완전한 관계는 이미 ‘사랑‘의 타이밍이 어긋났다.
서로가 이해받길 원하는 여느 부부의 관계처럼 대놓고 싸우지도 못하는 감정은 결국 묵살되었다. 그리고 뜻하지않게도 안나의 사랑은 다른 곳에서 찾아 왔다. 그 사랑은 가시적인 사랑도 아니고 솔직하다. 그동안 몰랐던 설레임과 벅찬 마음을 감줄 수 없는 것은 안나에게는 살기 위한 몸부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라는 제도적 관계에서 안나의 사랑은 불경스런 프레임에 갇힌다. 시대적 배경이 안나를 비도적인 여성으로 비추지만, 이런 안나의 사랑을 이해하는 이가 과연 지금도 얼마나 될까. 세상이 변했다고 한다. 여성의 인권이 그리고 지위가 예전에 비해 훨씬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도 여성성과 희생을 강요한다.

결혼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일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톨스토이 그 조차도 결혼의 권태기를 겪었고 힘든 시기를 넘겼다고 한다. 그런 그의 고뇌가 수없이 쌓여 이 책에 고스란히녹아 있다. 그리고 나는 격한 공감과 몰입에 흥분하고 있다.
마흔 중반 필독서, 지금 시점에서 와닿는 이야기는 내가 어느정도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해한 것이 바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이 젊은 날의 나에게 의미 없었던 것은 당연한게 아닐까

레빈과 키티의 결혼 생활
키티 또한 남성을 바라보는 시대적 관점은 멀리서 자신의 눈에 비친 것에만 의지해야 했다. 그녀의 처음 선택은 ‘브론스끼‘의 매력에 빠져 ‘레빈‘를 거절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선택이 진정 그녀의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투른 감정에 대한 이해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듯이 키티도 레빈에 대한 감정을 뒤에 알게 된다.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키티와 레빈은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레빈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현실은 그에게 혼란스런 시간이었다. 그 속에서 무던히 자신의 일을 찾고 척척 해 나가는 키티에 대해서도 레빈은 낯설었다.
결혼에 대한 로망을 누구나가 꿈꾸지만 결혼은 현실이다. 그래서 결혼 생활이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안다. 결혼 후 여자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위해 애쓴다. 둥지를 틀고 살림을 살면서 삶을 터득하면 배워나간다. 키티 또한 마찬가지다. 반면에 레빈은 자신이 생각한 이상에서 점점 멀어지는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결혼 후에도 여성성은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심 남성의 이런 관점은 여우같은 아내를 바라는 심리랑 그 맥락이 같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 그 위대함과 애인처럼 애교섞인 활발함의 여성을 버리지 못하는 심리는 레빈에게도 비춰졌다. 레빈의 혼란스런 감정에서 엿볼 수 있었다.
형의 죽음과 키티의 출산을 지켜 본 레빈은 슬픔과 기쁨이라는 감정도 비슷한 감정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 슬픔도 이 기쁨도 똑같이 삶의 평범한 조건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일상 속에서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엿볼 수 있는 틈새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벌어지는 상황이 힘들고 고통을 수반한다는 점에서도 결코 이해할 수 없었고 이성으로는 따라잡을 수도 없는 높은 경지로 영혼이 오묘하게 고양된다는 점에서도 동일했다.˝
(2권,p894)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무시무시한 시간을 보낸 뒤 찾아온 아이.
레빈에게 다가온 ‘아이‘의 존재는 당혹스럽고 낯선 존재였다.
레빈의 사유는 점점 깊어진다. 그리고 일 년 내내 철학책을 읽는다.
무신론자인 레빈은 무언가에 집착하는 삶, ˝그곳에 집착하는 순간 답은 더 멀리 간다는 사실과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채 삶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으며, 그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어떤 일이 더 중요한지도 알게 된다. 삶에서 오는 고민에서 레빈은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점점 안정을 찾게 된다.
결국, 삶 자체가 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엇이 나쁘고 좋은지에 대한 지식들을 통해서, 이러한 지식은 자신이 획득한 것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주어진 것이란 것을 레빈은 깨닫는다.

˝이성의 오만, 이성의 사기˝

유한함과 무한함의 차이에서 오는 삶의 괴리감에서 고민하는 레빈은 삶을 절대로 시시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도덕적 가치관은 공공의 안녕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결코 전쟁을 용납할 수 없는 자세

˝공공의 안녕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몰라도 그것의 달성이 오로지 개개인에게 계시되는 선의 법칙을 엄격하게 이행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제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전쟁을 바라거나 주장할 수 없었다.˝

리얼리즘 소설, 너무나 실감나는 묘사에 감정이입 제대로 하게 된다.
마흔 중반에 다시 읽게 된 <안나 까레니나>는 지금 시기에 읽으면 누구나가 감흥이 남다른 책이 될 것이다. 내 나이(마흔 이후) 필독서로 적극 강추하고픈 책이다.

이 책의 첫 문장

˝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불행하다.˝

이 문장이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불행은 지극히 구체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살면서 겪는 일들이 나에게 ‘고통‘으로 구체화 되어 행복보다 불행으로 더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리고 나의 인생 중 어느 시점, 지금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심오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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