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지음, 김석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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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즐길 줄 아는 자, 혼자 놀 수 있는 자


자유로부터의 도피행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것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



불안과 무기력함에서 새로운 동아줄을 찾는다. 그리고 그 동아줄을 잡는 것에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나의 고독과 불안을 벗어버릴 수 있다면, 나는 누군가가 이끄는 줄을 잡고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이의 선동에 동요하고 그대로 녹아들지도 모른다.

무엇으로부터의 도피인지, 그 결과가 어떻게 일어날지 의심하지 않는 삶을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중세는 근대적 의미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립되어 있지도 않았다. 사회적 역할을 통해서 자신을 인식했던 시대였다.

근대에 와서 인간은 자유로워졌다. 더 독립적이고 자립적이고 비판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고립되고 고독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책은 말한다.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는 과거 권위주의 권력이나 규제에서 쟁취한 자유를 말한다. 전통적인 규제에서 조금씩 벗어나면 날수록 우리에게 새로운 적이 등장했다. 하지만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자유를 완전히 실현되는 것을 막는 ‘내적 요인‘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지는 데 매혹되어, 자유가 전통적인 적들한테 거둔 승리의 의미를 ‘내부‘의 제약과 충동과 두려움이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p120)

우리의 인격 발달에 큰 영향을 준 자본주의는 개인주의적 활동이 중요하다. 자본주의는 외부로부터의 속박을 해방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자유를 얻어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개인을 더 고독하게 만들었고, 고립된 존재로 만들었으며 개인이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에서 항상 개인은 외부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이었다.  인간이 어떤 목적에 대한 수단에 불과한 존재가 되자 결국에는 ‘히틀러‘라는 괴물의 하인 역할도 충분히 받아들 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의 민주주의가 가져다준 자유는 개인에게 불안과 고독을 가져다 주었다. ‘고독‘ 혼자라는 참을 수 없는 고립감은 살기 위해 새로운 유대 속으로 떠밀려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자아를 자기와는 별개의 실체로 잊어버리도록 버려둔다. 그러면서 새로운 안전을 발견하게 된다.


자유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것

도피의 메커니즘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인 경향은 극과극이다.

˝정반대의 욕망인 것 같지만 심리학적으로 이 두 경향은 모두 자신이 외로움과 무력함을 참지 못하는데에서 생겨나는 하나의 기본적 욕구의 결과다.˝ p173

힘의 두 가지 의미

‘지배‘나 ‘능력‘ 중 하나를 뜻할 수 있다. 이 두 성질은 서로 배타적이다.
˝지배라는 의미에서 파워는 능력의 도착이다.˝

가학-피학적인 사람을 특징짓는 것은 언제나 권위에 대한 태도이기 때문에 ‘권위주의적 성격‘이라는 용어로 대신 사용해도 된다고 한다.

자동 인형형 순응

주관적으로 느끼는 개인의 감정과 감각까지도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입된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질적이거나 나의 생각과 느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자신의 것처럼 느낄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 자신의 정신적 행위가 자발적이라고 확신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어떤 특수한 상황 아래서 누군가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것을 그 실험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가짜 생각, 내 머릿속의 생각들에 대해서

외부에서 주입된 생각 ‘가짜 생각‘들이 반드시 비논리적인 요소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론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근거에서 설명하려는 합리화에서 고찰 할 수 있다. 비합리적인 합리화를 시킨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

합리화는 단지 내 속에 있는 감정적 편견을 확인해 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합리화는 현실을 통찰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을 기존의 현실과 조화시키려는 사후의 시도라는 것이다.
우리는 감정에서도 진짜감정인지 가짜감정인지 구분해야 될 필요가 있다.


근대 사회의 자동인형화한 개인은 무력감과 불안감의 증대로 인해 언제든지 새로운 권위에 기꺼이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이를 역사적 나치즘에서 찾았다.
히틀러 그는 무력한 집단하고만 싸워 자신의 용기를 쌓아나갔다. 기회주의자에겐 유화책이 오히려 증오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개인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이를 인정하고 더 높은 힘 속에 자신을 용해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높은 힘에 용해되어 이 높은 힘의 기운과 영광에 참여하는 것에 개인은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히틀러의 주장이었다.
개개인의 힘이 모여 하나의 큰 힘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 이 사라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진실은 힘없는 사람의 가장 강력한 무기의 하나다.˝

이 진실이라는 것도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와 욕구에 뿌리를 둔다는 데 있다.


대중의 무리에 섞여 내가 아닌 척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안정감을 줄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안정감에 취해 자신을 놓치고 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허무감과 허망함만 남는다. 그 원인을 안다면 정말 행운아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알지 못한다.
세상과 동떨어진 생각과 분리된 괴리감은 불안 그 자체이기 때문에 내가 속한 사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조차 무서워한다.
같지 않다는 것은 무리에 섞일 수 없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처럼 심각하다.


‘자유‘는 굴레였다. 자유가 주는 불안함이 늘 나를 칭칭 감고 있다. 많은 고독과 불안을 초래하는 이 줄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만 잡고 있으면 나에겐 그래도 자유라는 것이 주어진다. 남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 한 나의 행위에 대한 제약이 거의 없는 동아줄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동아줄을 내가 잡고 있는 것이 아닌, 나를 칭칭 묶고 나는 그 줄에 감겨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할 때가 있다. 그런 안정감을 누리고 살았던 것이다. 몰랐을 뿐이다.
책에서 말한 무언가로부터의 도피 행위인 가학적-피가학적인 상황인 이 권위주의에 묶여서 나도 모르는 불안과 두통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럭키와 포조가 생각났다. 서로에게 묶여 이제는 어느 한 쪽에서 그 끈을 끊을 수도 없고, 누가 누구를 묶고 누가 누구를 끌고 가는지를 말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으면서 더 떠오른다.
정체도 알 수 없지만, 막연하게 기다리는 시간에서 온갖 방법으로 그 시간을 버텨내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세상에 투명인간으로 존재하는 삶을 말이다.
적응이라는 명분으로 순응하며 사는 삶 말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 안정감은 보장 받은 삶이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안정감이 나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요즘 깨닫는다.
자발적 행동 스스로 무언가를 찾기 시작하고 뭔가를 하나씩 깨달을 때 찾아오는 짜릿함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리오네트처럼 우리는 거대한 누군가의 줄에 매달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행동으로 끌려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무대위, 나도 모르게 입력된 정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무대 위를 활기차게 누비면서 연기하는 자동 인형들이다. 조용히 편안하게 흘러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생각했고 안정감이 최고의 행복으로 착각하고 산다. 이것이 삶에 대한 책임감이라 생각한다.



책에서 말한 적극적인 자유는 무엇인가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보다 인간의 감정적, 지적, 감각적 경험과 인간의 의지 속에서 작동할 수 있는 창조적 활동을 말한다.

˝인간은 자아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억누르지 않아야만, 자신에게 투명해져야만, 삶의 다양한 영역들이 근본적으로 통합되어야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p279)

자유라는 문제에서 해답은 자발적인 활동이라고 말한다. 소극적인 자유가 개인을 고독한 존재로 만들었다. 여기서 개인의 자아는 약해지고 위협 받는다. 하지만 자발적 활동,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본 모습을 희생하지 않아도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와 자연 그 모두와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힘이 ‘사랑‘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이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 속에 용해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서의 사랑, 개체적 자아를 보존하는 것을 토대로 하여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의 동적인 성질은 바로 이 양극성에 있다. 사랑의 분리를 극복하고 싶은 욕구에서 생겨나 완전한 일체로 이어진다. 하지만 개인이 제거되지는 않는다. ˝
(p281)

그리고 자발성을 이루는 또 하나의 요소로 일이다.
자발적으로 살 수 있을 때 자신을 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개인으로 인식하고 ‘산다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자아가 아닌 타인의 자아의 고유성도 최대한 존중해주는 성장인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과제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활동 자체에 의미를 두고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심리적 문제, 인간 존재의 물질적 토대는 물론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 정치적 구조에서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개인의 ‘적극적인 자유‘와 개인주의 실현을 위한 자아 실현으로 가는 자유는 우리가 속해 있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민주주의 실현이 완전히 실현되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한다.

에리히 프롬이 이 책을 썼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여기서 잠깐 묻고 싶다. 에리히 프롬의 문제제기, 지금의 21세기 민주주의 실현은 어디까지 왔을까. 모든 개인의 생존에 기본이 되는 활동에서 개인의 실제적인 자유와 창의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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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08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지는 못하였으나 오래 전,
에리히 프롬 선생의 <사랑의 기술>
읽고 나면 사랑 기술자가 되는고야?
하면서 친구들하고 떠든 기억이
나네요.

제목이 아주 거창하네요. 자유에서
도피하면 노예가 되는 건가?
죄송합니다, 쿨럭.

이뿐호빵 2020-12-08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사랑의 기술 전수 받고자 열심히 읽어내긴
했지만, ㅋㅋ
그런건 책으로 얻어지진 않더라고요
역시 경험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