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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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리노 준고는 내 양아버지다. 그가 나를 키우기 시작한 것은 15년 전. 나는 지진 때문에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초등학교 4학년짜리 꼬마였다. 아주 먼 친척인 준고는 복잡한 몇 가지 절차를 거쳐 내 양아버지가 되었다. 8년 전, 준고가 서른네 살 때 우리는 도쿄로 올라왔다. 그렇게 나는 스물여섯 살이 되었고, 이제 내일이면 결혼을 한다. 그때 준고는 왜 어린 여자 아이를 굳이 맡으려 했을까. 준고라는 남자가 과거에 한 선택과 앞으로 할 행동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비 냄새 같은 체취를 풍기는 이 양아버지가 바로 내 남자라는 것뿐이다.” (p12~13에서 발췌)

 

읽은 지 10년도 훌쩍 넘은 작품이지만 당시 느꼈던 당혹감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남녀의 15년에 걸친 사랑의 행적을 그려낸 소설이라는 평범한 소개글에도 불구하고 나오키 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읽었던 작품인데, 초반 몇 페이지만에 남녀 주인공이 실은 불과 16살 차이인 양아버지와 양녀라는 점,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단순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아니라 어둡고 음습하고 시한폭탄처럼 위험한 것임을 눈치 채곤 큰 충격에 빠졌던 겁니다. 잠시나마 플라토닉 러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라는 근거 없는 기대와 짐작을 해봤지만 두 번째 챕터가 시작되자마자 이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달콤하면서 관능적이고 불길하며 퇴폐적인 느낌인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양아버지 준고가 42, 양녀 하나가 26살인 첫 챕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점점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두 사람이 처음 만난 27살과 11살 시절, 그러니까 15년 전에 시작된, 난폭하면서도 애틋하고 납득하기 어려우면서도 동시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기이한 사랑을 그려냅니다.

 

반도덕적, 반사회적이며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소설이다. 이것을 세상에 내놓고 한 번 묻고 싶었다.”라는 나오키 상 심사위원의 평뿐 아니라 상식을 가볍게 짓이기며 전개되는 가장 위험한 러브 스토리”, “더러운 늪에서만 피는 아름다운 꽃과 같은 소설이라는 세간의 평대로 내 남자는 상식의 잣대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그들만의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애초 이런 사랑이 어떻게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작가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천천히, 하지만 누구도 깨부술 수 없는 공고한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농밀하게 묘사하며 독자를 설득합니다. 각기 다른 이유로 가족을 잃은 뒤 양부녀가 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가족 혹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충족하려 했고, 그 감정이 점차 고양되어 서로의 몸을 탐하게 됐을 때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남녀의 그것이라기보다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서로에게 가지를 뻗쳐 얽히려고 하는 연리지(連理枝)와 다름없었습니다.

그 사랑을 부정하고 손가락질하는 자를 가차 없이 살해한 뒤로 두 사람의 인생은 살얼음판 위를 걷게 됐고, 한편으론 서로에게서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뼈가 되어서도 함께 하고 싶은 복잡한 감정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찾아온 파국 - 양녀 하나의 결혼 - 의 날, 두 사람은 속내를 감춘 채 비오는 거리에서 서로를 지켜봅니다.

 

독자에 따라 불쾌함과 욕지기를 견디지 못하고 책을 덮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저처럼 두 사람의 감정을 100% 이해하진 못해도 씁쓸하고 애틋한 여운에 사로잡힌 채 이야기의 주 무대 중 한 곳인 오호츠크 해의 검푸른 바다 앞에 홀로 서있는 듯한 황량한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선과 악, 도덕과 패륜,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이 모호한 이야기라 논란의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지만, 바로 그 점이 내 남자의 가장 큰 미덕이자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여운이 너무나도 강렬하고 인상 깊었던 탓에 10년도 훌쩍 넘은 이제 와서 서평을 써보겠다며 다시 읽었지만, ‘내 남자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꼭 한 번 다시 읽고 싶은 작품입니다. 모르긴 해도 과거와 현재와는 또 다른 인상과 여운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10년쯤 후엔 과연 어떤 눈빛으로 준고와 하나를 지켜보게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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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옷의 어둠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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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직후 기타규슈의 탄광에서 일명 검은 얼굴의 여우라는 기괴한 전설을 모방한 밀실살인사건을 해결했던 모토로이 하야타는 대학 동창 구마가이 신이치의 초대로 도쿄에 온 뒤 또다시 난해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붉은 미로라고 불리는 암시장에서 온몸이 붉은 남자가 여자의 뒤를 미행하는 일이 빈발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를 붉은 옷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치의 과장된 소개 때문에 명탐정으로 불리게 된 하야타는 도리 없이 붉은 미로의 조사에 나서는데, 실제로 그곳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자 하야타는 바짝 긴장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암시장 상인조합장의 가게에서 끔찍한 밀실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그것이 붉은 옷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하야타는 다시 한 번 명탐정 역할을 떠맡게 됩니다.

 

붉은 옷의 어둠은 출간순서로 치면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지만, 작품 속 시간적 배경으로 따지면 시리즈 1편과 2편의 중간에 위치한 일종의 스핀오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리즈 2편인 하얀 마물의 탑에서 하야타가 암시장에서 겪은 사건에 대해 짧게 언급한 적 있는데, 바로 그 사건을 다룬 작품이 붉은 옷의 어둠입니다.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는 패전 직후 혼란에 빠진 일본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적극적이고 비판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패전의 충격, 혼란과 무질서, 가난과 기아, 기득권의 비리, 미군정의 폐해 등 당시의 처참한 상황들이 단순한 배경그림이 아니라 미스터리의 중요한 축으로 설정된다는 뜻입니다. 앞서 출간된 검은 얼굴의 여우하얀 마물의 탑은 그런 토대 위에서도 미쓰다 신조 특유의 호러미스터리 서사가 제대로 빛을 발한 반면, ‘붉은 옷의 어둠은 마치 근현대사를 다룬 논픽션처럼 패전 직후의 상황을 더욱 디테일하게 묘사하여 눈길을 끕니다. 특히 이 작품의 주요무대인 암시장은 실제로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인데, 그래선지 사건은 괴담의 기운이 섞인 밀실살인으로 설정돼있지만 사회파 미스터리 혹은 역사 미스터리로서의 향기도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 동창의 부탁으로 암시장 붉은 미로에 횡행하는 괴담의 진실을 밝히려던 하야타는 암시장 상인조합장의 가게에서 벌어진 밀실살인사건을 조사하게 되지만 좀처럼 단서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붉은 미로의 좁고 복잡한 골목에서 여자들이 연이어 습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 골목들 역시 범인이 도망갈 길이 전혀 없는 완벽한 밀실로 밝혀지자 하야타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집니다. 말 그대로 괴담 속 붉은 옷의 소행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데다, 주위의 그 누구를 의심해 봐도 동기나 범행수법을 추론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즉 불가해한 호러 코드와 전형적인 밀실사건이 조합되면서 이번에도 하야타에게는 난이도 높은 과제가 주어진 셈입니다.

 

미쓰다 신조 특유의 호러미스터리는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앞선 두 작품에 비해 붉은 옷의 어둠은 몇 차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 게 사실입니다. 우선, 초반에 암시장을 비롯한 패전 직후 일본의 상황이 다소 장황하게 설명돼서 그런지 전작들에 비해 시동이 많이 늦게 걸린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론 논픽션에 버금가는 그 내용들이 흥미로웠지만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야타가 붉은 옷괴담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는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지만, 페이지를 꽤 넘긴 뒤에야 첫 살인사건이 등장한 점도 살짝 아쉬웠습니다.

또 한 가지는 사건의 진상과 범인의 정체를 특정하는 클라이맥스와 엔딩에서 다소 무리한 추론과 작위적인 해법이 동원된 점입니다. 복선의 회수과정 중 일부는 수긍하기 어려웠고, 느닷없는 인물이 결정적 조언을 하는 장면이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무리하게 추리하는 장면은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호러미스터리의 특성 상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엔딩이 나올 수는 없겠지만, ‘붉은 옷의 어둠의 엔딩은 왠지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느낌이었습니다.

 

세 편의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가운데 미쓰다 신조의 호러미스터리의 맛을 가장 강렬하게 맛본 건 하얀 마물의 탑입니다. 거친 파도와 짙은 안개와 험준한 지형으로 둘러싸인 고가사키 등대에서 엄청난 충격과 함께 대혼란에 빠진 채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하야타가 다음엔 어느 곳으로 향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 작품에선 하얀 마물의 탑이상의 호러미스터리의 찐맛을 보여주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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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 클레이본 스티븐 킹 걸작선 4
스티븐 킹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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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뉴잉글랜드의 작은 섬 리틀톨에서 대저택에 홀로 살던 자산가 베라 도노반이 계단에서 추락해 사망합니다. 수십 년간 그녀를 모셔왔던 60대 여성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그 죽음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살해용의자로 지목당합니다. 경찰에 출두한 돌로레스는 괴팍하기 짝이 없는 주인마님이자 말년엔 중풍 때문에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했던 베라와의 오랜 애증의 역사는 물론 29년 전 개기일식이 벌어지던 날 남편 조를 살해한 일까지 포함하여 길고도 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마음만 먹고 있던 스티븐 킹의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드디어 읽었습니다. 캐시 베이츠 주연의 영화도 보고 싶었지만 소설을 먼저 읽은 뒤로 미뤘는데, 영화도 잘 만들어졌다고들 하지만 아무래도 원작의 힘을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호러 킹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킹이지만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꾼인지, 복잡다단한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얼마나 소름 끼칠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수십 년에 걸친 악연과 애증이 기어이 두 여자 돌로레스와 베라를 하나로 묶어주는 휴먼드라마이자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서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해.”라는 교훈에 따라 가부장적이고 거만하고 폭력적인 남편을 통쾌하게 단죄하는 서스펜스 스릴러이기도 합니다. 자식들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는 돌로레스의 처절한 모성애라든가 극악스런 겉모습과 달리 새카맣게 탄 속으로 수십 년을 버텨온 베라의 고통스런 인생 역정도 독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물론 킹의 주 무기인 호러라는 양념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곳곳에 뿌려져있습니다. 지극히 사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개기일식이라는 기묘한 우주현상, 사람의 얼굴을 닮은 먼지덩어리 유령, 소름끼치는 비명과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무하는 악몽 등 킹 특유의 생생한 호러 코드가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있어서 이야기의 볼륨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한 사람은 남편에게 물려받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지닌 자산가이고, 또 한 사람은 주정뱅이에 폭력적인 남편에게 시달리며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정부 겸 하녀 신세지만 베라와 돌로레스의 삶은 실은 데칼코마니에 가깝습니다. 특히 기쁨이나 행복보다는 절망과 고통에 잠식된 시간이 훨씬 많았다는 점까지 닮은 탓에 두 여자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척이나 무겁고 편치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흥분, 분노, 욕지거리, 폭소, 비애가 모두 뒤섞인 변화무쌍한 태도로 두 명의 경찰과 한 명의 속기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돌로레스 덕분에 독자 역시 롤러코스터를 탄 듯 다양한 감정에 휩싸이며 책장을 넘길 수 있습니다.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나고, 눈물이 나지만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마는, 그런 특별한 책읽기라고 할까요?

 

가끔 별난 간식을 챙기듯 스티븐 킹의 초중기 작품들을 읽곤 하는데,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그중에서도 좀더 특별한 맛을 만끽한 작품입니다. 조만간 캐시 베이츠가 열연한 영화를 볼 생각인데, 원작을 떠올리며 영화를 보면 그 맛이 더욱 깊고 진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킹의 팬이 아니더라도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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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여행자의 모래시계 - JM 북스
호죠 기에 지음, 김지윤 옮김 / 제우미디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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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정체불명의 살인범이 일으킨 시노의 참극이후 류젠 가문 사람들 대부분은 수십 년 동안 사고나 사건이나 질병으로 인해 단명하는 저주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가모 도마의 아내 레나 역시 류젠 가문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치명적인 병에 걸린 채 사경을 헤매는 중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모는 시공여행 안내자라 자칭하는 마이스터 호라라는 자의 전화를 받습니다. 그는 가모에게 시공여행을 통해 1960년으로 돌아가 저주의 출발점인 시노의 참극을 막고 살인범을 밝히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내 레나의 운명 역시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제안이었지만 가모는 어느 새 호라에게 이끌려 58년 전 참극이 벌어졌던 류젠 가문의 별장 앞에 도착합니다.

 

타임 슬립이나 시공여행이라는 소재를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최근 들어 이가라시 리쓰토의 뒤틀린 시간의 법정과 호죠 기에의 시공여행자의 모래시계를 연이어 읽게 됐습니다. 두 작품 모두 소재의 상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특한 설정과 인물들을 도입하긴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타임 슬립이나 시공여행이라는 소재는 역시 저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재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류젠 가문 출신인 아내 레나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1960년으로 시공여행을 한 가모 도마가 당시 류젠 가문의 별장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살인사건, 일명 시노의 참극의 진상을 알아내고 범인을 밝혀내는 이야기입니다. 애초 참극이 벌어진 계기는 무엇인가? 참극 이후 60년 가까이 류젠 가문 사람들을 단명하게 만든 저주의 실체는 무엇인가? 참극과 저주를 퍼부은 범인의 정체와 목적은 무엇인가?

참극이 벌어진 별장의 밀실 구조라든가 미스터리한 희대의 살인 수법은 고전적인 본격 미스터리의 틀을 잘 구현해놓았고, 본의 아니게 별장 사람들로부터 도쿄 출신의 명탐정으로 불리게 된 가모 역시 본격 미스터리의 주인공이 부여받는 전형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그리고 시공여행이라는 양념이 이야기 곳곳에서 다양한 맛과 향기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쉽고 선명한 이야기라서 페이지는 잘 넘어가지만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굴곡 없는 밋밋함때문입니다. 우선, 토막 나거나 독살당하거나 불에 타 죽는 등 잔혹한 방법으로 류젠 가문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하지만 좀처럼 긴장감이나 불안감을 자아내지 못하는데, 그건 살해당한 자들의 캐릭터가 독자에게 제대로 각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죽어 마땅한 악당인지, 죽지 않기를 바라게 만드는 선한 자인지조차 어필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계속 죽어 나가기만 하니 사건이든 감정이든 이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1960년 당시 혼돈에 빠진 류젠 가문의 분위기가 초반부터 독자를 사로잡았어야 했는데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묘사에 그친 탓에 그저 뉴스 속 남의 일처럼 여겨지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굴곡 없는 밋밋함의 또 다른 이유는 정직하고 평면적일 뿐인 주인공 가모의 역할입니다. 시간은 한정돼있고, 자칫 현재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으며, 혹여 과거를 바꾼다 하더라도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 비해 가모는, 좀 심하게 말하면, 그리 다급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아 보입니다. 막판에 그가 진상을 밝혀내는 대목 역시 특별한 감흥이나 반전이 없어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종합하자면, ‘가문에 내려오는 저주라는 설정 때문에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처럼 팽팽하고 쫄깃한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시공여행이라는 특별한 양념까지 가미됐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맵고 짠맛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청률이 안 나오는 착한 드라마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시공여행자의 모래시계는 호죠 기에의 데뷔작이자 류젠 가의 일족’ 3부작 중 1편이라고 합니다. 후속작에서 가모 도마가 또다시 시공여행에 나서게 될 것 같은데, 한국에도 출간된다면 일단 앞부분은 읽어볼 생각입니다. 인물이든 사건이든 제 눈길을 사로잡는 게 하나라도 있다면 마지막 장까지 기꺼이 달리겠지만, ‘굴곡 없는 밋밋함의 기운이 다시 느껴진다면 아무래도 호죠 기에는 저와는 잘 안 맞는 작가로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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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픽처스
제이슨 르쿨락 지음, 유소영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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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육상 유망주였지만 비극적인 사고 이후 마약에 중독됐던 맬러리 퀸은 18개월 동안의 재활을 거쳐 뉴저지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5살 소년 테디의 보모로 일하게 됩니다. 잠시나마 안정된 삶을 되찾았다고 여겼지만 맬러리의 일상은 테디가 그린 이상한 그림들 때문에 뒤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한 여자가 목 졸려 살해당한 뒤 숲으로 끌려가 매장당하는 과정을 그린 테디의 그림들은 어떻게 봐도 5살 소년의 상상력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맬러리의 의문에 대해 테디는 애냐가 들려준 이야기를 그린 것이라고 대답하고, 테디의 부모 역시 애냐는 테디가 만들어낸 상상속의 친구일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림은 점점 생생하고 정교해지는 것은 물론 그 내용도 말할 수 없이 잔혹해져갑니다.

 

내용도 톤도 전혀 다르지만 스티븐 킹의 샤이닝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호러 스릴러지만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부감도 없이 오히려 지극히 사실적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5살 소년 테디로 하여금 끔찍한 살인과 암매장 과정을 그리게 만든 애냐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주인공 맬러리의 미션인데, 그 과정에서 맬러리는 과학이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수차례 경험하며 대혼란에 빠집니다. 하지만 테디의 그림이 점점 더 전문가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은 물론 그 내용도 구체적인 스토리를 지닌 연작처럼 보이기 시작하자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초자연적 현상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하기로 결심합니다.

 

시선을 확 잡아끄는 표지가 바로 테디가 그린 그림 중 하나인데, 본문 속에는 이보다 더 섬찟하고 기괴한 그림들이 여러 장 수록돼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조금씩 진화하며 맬러리에게 뭔가를 호소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말하자면 그림을 통해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서사가 좀더 공고하게 구축된다는 뜻인데, 그래선지 활자로만 읽은 초자연 호러물과는 사뭇 다른 톤의 공포를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 특유의 거칠고 단순하던 스케치가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드로잉으로 변하는 대목은 이야기에서도 큰 전환점 중에 하나인데, 단지 활자만으로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한 몰입감을 제공합니다.

 

빙의가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테디의 그림 솜씨, 70여 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실종사건과 애냐의 관계, 접신의 능력자라 자칭하는 이웃 영매의 수상한 태도, 그리고 뭔가를 감추는 듯한 테디의 부모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 등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워낙 많기도 하거니와 이야기 자체도 수시로 급회전하거나 역주행하는 듯 많은 변곡점을 지니고 있어서 사소한 내용 하나만 언급해도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은 작품입니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클라이맥스 전후로 밝혀지는 뜻밖의 사실들이 맬러리는 물론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이야기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강렬한 반전과 함께 가혹하지만 필연적인 엔딩을 향해 달려갑니다. 특히 맬러리와 테디가 함께 하는 마지막 장면은 죽음의 경계에서 피가 난무하는 끔찍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싹한 초자연 스릴러이자 아름답고 가슴 저릿한 미스터리라는 홍보 카피처럼 독자의 오감을 먹먹하게 만들어서 오랫동안 명장면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장면만큼은 꼭 영상으로 보고 싶은 욕심인데, 넷플릭스와 판권 계약을 했다고 하니 기대해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작가의 이름도 생소하고 표지가 눈길을 끌긴 했어도 제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아서 큰 기대를 안 했지만 히든 픽처스는 올해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 중 한 편이 될 것 같습니다. 초자연 호러 스릴러에 관심 없더라도 책 선택의 중요한 기준으로 이야기의 힘을 꼽는 독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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