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픽처스
제이슨 르쿨락 지음, 유소영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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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육상 유망주였지만 비극적인 사고 이후 마약에 중독됐던 맬러리 퀸은 18개월 동안의 재활을 거쳐 뉴저지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5살 소년 테디의 보모로 일하게 됩니다. 잠시나마 안정된 삶을 되찾았다고 여겼지만 맬러리의 일상은 테디가 그린 이상한 그림들 때문에 뒤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한 여자가 목 졸려 살해당한 뒤 숲으로 끌려가 매장당하는 과정을 그린 테디의 그림들은 어떻게 봐도 5살 소년의 상상력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맬러리의 의문에 대해 테디는 애냐가 들려준 이야기를 그린 것이라고 대답하고, 테디의 부모 역시 애냐는 테디가 만들어낸 상상속의 친구일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림은 점점 생생하고 정교해지는 것은 물론 그 내용도 말할 수 없이 잔혹해져갑니다.

 

내용도 톤도 전혀 다르지만 스티븐 킹의 샤이닝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호러 스릴러지만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부감도 없이 오히려 지극히 사실적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5살 소년 테디로 하여금 끔찍한 살인과 암매장 과정을 그리게 만든 애냐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주인공 맬러리의 미션인데, 그 과정에서 맬러리는 과학이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수차례 경험하며 대혼란에 빠집니다. 하지만 테디의 그림이 점점 더 전문가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은 물론 그 내용도 구체적인 스토리를 지닌 연작처럼 보이기 시작하자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초자연적 현상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하기로 결심합니다.

 

시선을 확 잡아끄는 표지가 바로 테디가 그린 그림 중 하나인데, 본문 속에는 이보다 더 섬찟하고 기괴한 그림들이 여러 장 수록돼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조금씩 진화하며 맬러리에게 뭔가를 호소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말하자면 그림을 통해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서사가 좀더 공고하게 구축된다는 뜻인데, 그래선지 활자로만 읽은 초자연 호러물과는 사뭇 다른 톤의 공포를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 특유의 거칠고 단순하던 스케치가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드로잉으로 변하는 대목은 이야기에서도 큰 전환점 중에 하나인데, 단지 활자만으로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한 몰입감을 제공합니다.

 

빙의가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테디의 그림 솜씨, 70여 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실종사건과 애냐의 관계, 접신의 능력자라 자칭하는 이웃 영매의 수상한 태도, 그리고 뭔가를 감추는 듯한 테디의 부모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 등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워낙 많기도 하거니와 이야기 자체도 수시로 급회전하거나 역주행하는 듯 많은 변곡점을 지니고 있어서 사소한 내용 하나만 언급해도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은 작품입니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클라이맥스 전후로 밝혀지는 뜻밖의 사실들이 맬러리는 물론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이야기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강렬한 반전과 함께 가혹하지만 필연적인 엔딩을 향해 달려갑니다. 특히 맬러리와 테디가 함께 하는 마지막 장면은 죽음의 경계에서 피가 난무하는 끔찍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싹한 초자연 스릴러이자 아름답고 가슴 저릿한 미스터리라는 홍보 카피처럼 독자의 오감을 먹먹하게 만들어서 오랫동안 명장면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장면만큼은 꼭 영상으로 보고 싶은 욕심인데, 넷플릭스와 판권 계약을 했다고 하니 기대해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작가의 이름도 생소하고 표지가 눈길을 끌긴 했어도 제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아서 큰 기대를 안 했지만 히든 픽처스는 올해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 중 한 편이 될 것 같습니다. 초자연 호러 스릴러에 관심 없더라도 책 선택의 중요한 기준으로 이야기의 힘을 꼽는 독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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