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루민
오카베 에쓰 지음, 최현영 옮김 / 리드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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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분과 목적을 감춘 채 유명 에세이 작가 나카이 루민의 지인들을 인터뷰합니다. 그녀의 초중학교 동창은 물론 그녀가 운영하는 온라인 살롱 멤버들과 출판 관계자 등 10여 명이 인터뷰에 응하는데, 루민에 대한 그들의 진술은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희망과 행복을 가져다 준 은인이자 존경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녀는 악마 그 자체라며 격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과거 사건을 놓고도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연 루민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요?



이 작품의 원제는 ‘무서운 친구’(怖いトモダチ)인데, 개인적으론 ‘내가 아는 루민’이라는 번역제목이 훨씬 더 내용과 작의를 잘 압축해놓았다는 생각입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 평가와 의견을 내놓았을지, 과연 진짜 루민은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궁금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본문 전에 소개되는 (인터뷰에 참가한 사람들의 의견 요약본인) ‘등장인물의 한마디’는 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극단적으로 엇갈린 평가와 의견이 나오는 게 실제로 가능한 일인지 의구심까지 품게 만듭니다. 신분과 목적을 감춘 채 루민에 대해 묻고 다니는 ‘나’의 정체 역시 막판까지 독자의 관심을 끄는 설정입니다.


루민 덕분에 희망과 행복을 만끽했다는 옹호론자 대부분은 에세이 작가로 성공한 루민이 이끄는 온라인 살롱 멤버들입니다. 루민의 에세이를 읽은 뒤 암울한 현재를 극복하고 내일을 살아갈 의지를 되찾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과거 학창시절부터 작가로 성공하기 전까지의 그녀를 아는 인물들 대부분은 악마 또는 사이코패스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고 짓밟았는지, 또 교묘한 화술과 행동으로 상대의 삶 자체를 철저히 파괴해버렸는지를 격한 감정과 함께 토로합니다. 


재미있는 건 이 엇갈린 진술들이 매번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녀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애정도, 그녀를 악마라 부르는 자들의 증오도 모두 진심어린 감정으로 그려지다 보니 어떻게 한 사람이 두 가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지, 어느 쪽이 그녀의 진실에 가까운 건지 그저 위화감과 궁금증만 커질 뿐입니다. 


미스터리로 분류되긴 했지만 이 작품의 장르는 ‘고발 르포’ 혹은 ‘인간관계에 대한 묵직한 에세이’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미스터리 서사와 거리가 멀기도 하거니와,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주변에 루민 같은 사람이 있진 않을까, 혹시 나는 루민 같은 사람이 아닐까,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라는 서늘함을 만끽할 수 있어서 각별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번역제목에서 ‘루민’을 빼고 자신의 이름을 넣어보면 이 서늘함을 좀더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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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책
안나 마촐라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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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적인 전염병이 휩쓸고 간 1659년 이탈리아 로마. 젊은 수사판사 스테파노 브라키는 교황청과 로마총독의 밀명을 받아 일련의 기이한 죽음을 조사합니다. 사후에도 부패하지 않고 혈색을 유지하는 시신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해부학자 마르첼로와 함께 사건을 조사하던 스테파노는 탐문 끝에 아쿠아라는 이름을 가진 무색무취의 독약이 조직적으로 유통된 정황을 포착합니다. 제조자는 물론 판매자와 구매자까지 모두 여자인 것으로 드러나자 스테파노는 충격에 빠지는데, 더욱 놀라운 건 살해된 남자들이 아내 또는 가족에게 모두 지독한 폭력을 휘둘러왔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에서는 어떤 경우 남편은 아내를 죽여도 된다. 순간적인 격정에서 비롯된 행위라면 죄가 되지 않는다. 여자의 생명에는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 (p27)


이 작품은 17세기 이탈리아에 실제로 존재했던 ‘아쿠아 토파나’라는 무색무취의 독약과 그것을 이용하여 폭력적인 남자들을 살해했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원전으로 삼은 팩션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150명에 달하는 조직은 로마를 무대로 화장수 겸 성수로 위장한 독약을 판매하여 6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낳게 했고, 1659년 지로니마 스파나를 비롯한 주범들이 사형되면서 와해됐습니다. 작가는 역사에 의해 잔혹한 살인집단이자 악녀로 기록된 인물들을 픽션을 통해 부활시키며 ‘남자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독약을 이용해야만 했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서스펜스 스릴러로 만들어냈습니다.


‘여자는 치댈수록 맛있어지는 반죽이다’라는 속담이 횡행했던 당시 로마 남자들의 폭력은 야만 그 자체입니다. 르네상스와 인본주의로 상징되는 17세기였지만, 여자란 곧 함부로 망가뜨려도 되는 소유물이란 의식이 당연한 상식처럼 통용됐고, 권력자와 종교지도자들마저 이 상식을 신의 뜻이라 주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양어머니로부터 독약 제조법과 그 비밀을 담은 책 ‘리브로 디 세그레티’를 물려받아 로마에서의 독살극을 지휘하는 지롤라마 역시 지독한 폭력의 희생자였고, 그녀와 함께 은밀하게 조직을 이끄는 여자들도 대부분 모두 지워지지 않을 폭력의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독약은 단순한 사적 복수를 위한 범죄도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입니다.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먼저 죽여야만 하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의 유일한 해법이었던 것입니다.


작가는 지롤라마를 추적하는 젊은 수사판사 스테파노 브라키에게 난이도 높은 딜레마를 부여함으로써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강한 출세욕에도 불구하고 고문이나 폭력적인 행위를 혐오하는 그는 진상에 다가가면 갈수록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범죄’라는 법의 원칙과 ‘독약 외에는 목숨을 부지할 길이 없던 여자들의 기구한 사연’ 속에서 갈등을 거듭합니다. 또한 똑같은 독약을 쓰고도 전혀 다른 처우를 받는 귀족과 서민 사이의 차별에 분노하기도 합니다. 교황청과 로마총독의 압박이 나날이 심해지는 가운데 그는 법이든 신이든 과연 지롤라마를 심판할 수 있을까, 라는 해답 없는 딜레마에 빠지고 맙니다.


기이한 시신에 대한 조사로 시작된 미스터리 스릴러는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지롤라마와 스테파노 사이의 팽팽한 심리전을 앞세우며 서스펜스 서사로 장르를 탈바꿈합니다. 특히 출세욕과 부당한 압박과 정의감 사이에서 고민하는 스테파노가 지롤라마와 조직원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겪는 심리적 롤러코스터가 압권인데, 장르물로서의 긴장감이나 반전은 미미하지만 앞서 쌓여온 비극적인 서사들이 힘을 발하면서 마지막 장까지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2022년에 한국에 소개된 ‘넬라의 비밀 약방’(사라 페너)은 여자들에게 ‘남자를 죽이는 독’을 파는 18세기 런던의 약제사 넬라의 이야기인데, 장르나 서사 모두 이 작품과는 전혀 다르지만 지롤라마와 스테파노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한번쯤 관심을 가져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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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프네를 죽여줘
플로랑스 멘데즈 지음, 임명주 옮김 / 반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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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의 트라우마와 만성 우울증에 시달리던 25살 다프네 플로레스는 두 차례의 자살 시도에 실패하자 다크웹의 청부살인 커뮤니티를 찾습니다.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인 건 아직까지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초보 킬러 마르탱 마르텔. 그런데 마르탱은 어처구니없게도 엉뚱한 사람을 죽이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 현장을 목격한 다프네는 자살에 대한 확신이 흔들립니다. 더구나 열흘 안에 의뢰가 완수되지 못하면 다른 킬러가 두 사람을 모두 살해할 거라는 마르탱의 말에 다프네는 패닉에 빠집니다. 다프네는 자신이 정말 죽고 싶은 건지 전문가와 상담하고 싶어졌고 인터넷에서 심리치료사 모나 샴스를 찾아냅니다. 하지만 모나는 사이코패스와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박탈당한 인물이었습니다.



가정폭력, 트라우마, 우울증, 자살, 청부살인 등 암울하고 어두운 소재들로 뒤범벅된 이야기지만 마치 속사포 같은 만담을 들으며 초고속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듯한 아찔한 쾌감과 프랑스 문학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노골적인 선정성과 범죄스릴러의 긴장감까지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폭력적이면서 유머러스하고, 거칠면서 동시에 감동적이다.”라는 한 줄 평이나 “광기와 유머가 동시에 번뜩이는 사이코 범죄스릴러”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이 작품의 분위기를 잘 대변하고 있는데, 아마도 자폐스펙트럼과 우울증을 극복하고 유명 코미디언이 된 작가의 이력이 제대로 녹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청부자살까지 결심한 다프네와 그 청부를 받아들인 마르탱은 사실 무척이나 닮은꼴입니다. 유년기부터 정신적, 육체적 폭력에 시달렸고, 성장하면서 왜곡된 가치관에 사로잡혔으며, 지독한 자기혐오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끝내 스스로에게 사회부적응자라는 낙인을 찍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두 사람이 ‘죽고 싶은 자’와 ‘죽여야 하는 자’로 만났지만, 뜻밖의 사태로 인해 ‘죽고 싶은 건지 고민되는 자’와 ‘죽이고 싶지 않은 자’로 생각을 바꾸면서 예상치 못한 열흘의 동행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이코패스인 환자와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의사 자격을 박탈당한 심리치료사 모나가 끼어들면서 세 사람은 묘한 연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설령 다프네가 살겠다고 마음을 바꾸더라도 또 다른 킬러가 찾아올 거란 사실입니다. 더구나 마르탱이 실수로 엉뚱한 여자를 죽인 사건이 경찰에 포착되면서 다프네와 마르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궁지에 몰리고 맙니다.


인물들의 캐릭터나 설정된 사건들만 보면 이야기가 절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프네가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고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을 것 같지도 않고, “그날 이후 마르탱과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엔딩은 더더구나 아닐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 청부살인조직과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된 이상 분명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장면이 불가피해보였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심리치료사 모나 역시 ‘선한 중재자’로만 머물지는 않을 것 같아서 과연 어떤 파격적인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다만 표지를 넘기자마자 나오는 ‘경고장’에서 작가가 “인생은 가끔 우리를 골탕 먹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언급한 점을 머릿속에 담아둔 덕분에 이 작품이 그저 지독한 씁쓸함과 불편한 여운만 남기지는 않을 거란 걸 예상할 수 있었고, 여러 차례의 반전 끝에 도달한 마무리에선 새삼 작가의 ‘경고장’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었습니다. 


264쪽에 불과한 짧은 분량이지만,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면서도 냉소와 실소를 번갈아 경험하게 만들다가 마지막엔 안타까움과 안도감까지 느끼게 만드는 롤러코스터 같은 다프네의 이야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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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씩 짝을 지어 주세요
기나 지렌 지음, 이상연 감수 / 그래비티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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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한 학년에 한 학급밖에 없는 사립 야사카 여고의 졸업식 날 아침, 3학년 담임교사 스즈타 아사미는 27명의 학생을 상대로 마지막 ‘특별수업’을 선포합니다. 두 사람씩 짝을 짓는 게임을 거듭 벌이며 홀로 남게 된 학생을 차례로 ‘실격’시키다가 마지막에 남는 한 사람 또는 두 사람만이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실격’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 교사의 발언을 만우절 농담처럼 여기던 학생들은 실제로 눈앞에서 죽음이 벌어지자 충격과 패닉에 빠집니다. 더구나 이 ‘특별수업’이 ‘집단 따돌림 없애기 캠페인’의 대상 학급으로 선정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에 아연실색합니다. 하지만 이내 게임은 시작되고, 짝을 짓지 못한 학생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의 참혹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처음 접하는 작가 기나 지렌이 (‘서점대상’과 함께 제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 문학상’ 우수상 수상자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영화 ‘배틀 로얄’을 연상시키는 데스 게임 스릴러라는 점입니다. 다만 졸업을 앞둔 27명의 학생들에겐 그 어떤 무기나 흉기도 주어지지 않고, 그저 두 사람씩 짝을 짓는 단순한 게임만 부여될 뿐입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게임의 밑바탕에 왕따와 집단 따돌림과 학교폭력이 깔려있고, 교실 카스트, 즉 야비하고 잔인한 계급의 문제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배틀 로얄’ 이상의 서늘함과 광기를 내뿜습니다.


최후의 생존자가 결정되는 순간까지 20여 명의 학생들은 끔찍하게 목숨을 잃지만, 작가는 그 과정을 단순하고 담담하게 그릴 뿐입니다. 사적 복수 코드가 가미된 데스 게임 스릴러라면 죽음의 순간을 최대한 세밀하게 묘사하며 독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기나 지렌은 이 작품의 작의인 ‘무의식적인 악의에 의한 왕따와 그것이 초래한 비극’에 초점을 맞추며 왜 27명의 학생들이 이 잔혹한 게임을 치러야만 하는지를 짧은 챕터들을 통해 군상극처럼 그려나갑니다. 특히 피라밋 형태의 교실 카스트가 어떻게 ‘무의식적인 악의’를 양산하고 비극을 극대화하는지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눈길을 끄는 대목 중 하나는 게임이 거듭될수록 누구와 짝이 될 것인지, 누구를 ‘실격’시킬 것인지 치열한 계산과 연대와 배신이 난무하는 가운데 교실 카스트가 역전되는 상황들이 심심찮게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역전은 단순히 통쾌함을 위한 설정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악의’의 민낯을 까발리고 악의의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을 좀더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한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존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평소 ‘유령 같은 존재’로 취급되던 학생이 전략적 핵심 인물로 부상하는 장면은 집단 심리의 잔혹함과 동시에 그 취약함을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출판사 소개글은 이 작품의 진면목 중 하나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별수업’의 유래라든가 학생들이 기괴한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등 호러 판타지의 묘미까지 품고 있어서 더 매력적인 이 작품은 왕따, 집단 따돌림, 학교폭력의 문제를 데스 게임에 대입시킴으로써 같은 주제와 소재를 다룬 작품들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꽤나 진한 씁쓸함과 여운을 품은 채 마지막 장을 덮어야 하지만, 나이와 성별과 계층에 관계없이 이 문제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많은 독자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족으로, 번역에 대해 짧게 언급하면... 왜 출판사에서 ‘번역’이 아니라 ‘감수’라는 표현을 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읽으면서 여러 곳에서 답답함을 느낀 게 사실입니다. 딱히 오타나 비문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부자연스러운 문장들이 심심찮게 목격됐는데, 그게 저만 느낀 문제인지 다른 독자들도 마찬가지인지를 인터넷에 올라온 서평들을 통해 꼭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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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담아, 엄마가
일리아나 잰더 지음, 안은주 옮김 / 리드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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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매켄지는 유명 스릴러 작가였던 엄마 E. V. 렌지의 느닷없는 죽음에 복잡한 심경이 됩니다. 애정보다는 증오와 미움이 더 강렬했던 탓에 슬프기는커녕 추모식조차 귀찮게만 여겨질 뿐입니다. 다만,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는 아닌 것 같다는 석연치 않은 의구심이 남아있었는데, 추모식 당일, 엄마가 쓴 편지가 도착하면서 매켄지의 일상은 뒤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며칠에 걸쳐 연이어 도착한 편지에는 지금껏 몰랐던 엄마의 불행한 젊은 날들은 물론 그녀가 실은 한 차례 이상의 살인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단서들이 적혀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켄지는 남사친인 EJ의 도움을 받아 엄마의 과거를 조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사실과 맞닥뜨립니다.



부모자식 간의 이야기를 다룬 미스터리나 스릴러는 아무래도 약간은 지루하지 않을까, 진부하지 않을까, 라는 선입견을 갖게 만듭니다. 도무지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 심리 스릴러 또는 다소 뻔한 도메스틱 스릴러에 머무는 경우들이 적지 않기 때문인데, 공교롭게도 최근 이런 선입견을 제대로 깨뜨린 작품들을 연이어 읽게 됐습니다. 기리노 나쓰오의 ‘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야마구치 미오의 ‘금기의 아이’가 그랬고, 처음 그 이름을 알게 된 작가 일리아나 잰더의 ‘사랑을 담아, 엄마가’는 다분히 막장 가족극에 가까운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전개와 연이은 반전 덕분에 마지막 장까지 계속 긴장하며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명 스릴러작가로서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지만 가족에겐 그저 냉랭하기만 했던 엄마가 실은 지독하게도 불행한 삶을 살면서 자신을 낳았으며, 어쩌면 여러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한 범죄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 (편지를 다 읽고도 여전히 믿을 수 없지만) 얼마나 자신을 사랑했는지를 알게 된 매켄지는 대혼란 속에서도 엄마의 과거를 알아내기로 결심하지만, 우여곡절과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그 여정 속에서 매켄지는 알고 싶었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기도 했던 엄마의 진실과 마주합니다. 하지만 그 진실은 여전히 반쪽짜리일 뿐이었고, 더욱 더 거대한 비극이 매켄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엄마의 편지를 여러 차례에 나눠서 매켄지에게 보내는 정체 모를 자의 의도, 매켄지와 마찬가지로 엄마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여기는 형사, 엄마의 과거를 캐는 자신을 못 마땅히 여기는 아빠와 할머니, 그리고 21년 전의 엄마를 알고 있는 듯한 몇몇 인물들의 수상쩍은 태도 등 매켄지는 엄마의 과거를 조사하는 와중에 여러 차례 의문과 혼란에 휩싸이곤 합니다.


첫 번째이자 가장 큰 반전이 중반부쯤에 배치된 탓에 내용에 대해 언급하기가 무척 어려운 작품입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초중반부를 지날 때쯤 그 반전을 예측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는 그 지점부터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하며 본격적인 스릴러 서사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21년 전의 사실을 그린 두 번째 챕터부터는 전혀 다른 긴장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거듭되는 반전은 앞서 말한대로 다분히 막장 가족극의 냄새를 피우긴 하지만, 작가는 ‘막장도 제대로만 활용하면 멋진 소재가 될 수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론 ‘웰 메이드 막장’이야말로 모든 독자와 시청자가 바라마지않는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미스터리와 스릴러가 그렇지만, 이 작품은 중반부의 ‘첫 번째이자 가장 큰 반전’을 모르고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독자 서평 가운데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 반전을 공개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듯한데, 가급적 아무 정보 없이 이 매력적인 스릴러를 만끽하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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