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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만이 알고 있다
모리 바지루 지음, 김진환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4월
평점 :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말은 있어도 형식에 관한 한 아직도 미답의 영역이 남아있다고들 말하지만, 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식’이란 작가에게 있어 거의 신탁에 가까운 행운이거나 엄청난 노력이 자아낸 기적에 가까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행운과 노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힘을 발휘한 건진 알 수 없지만, 모리 바지루의 ‘당신만이 알고 있다’는 주요인물들이 번갈아 주인공을 맡는 연작 형태의 단편집이되 각 작품마다 제각각의 장르를 내세운 독특한 형식으로 시종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 에필로그의 마지막 한 줄을 통해 최후의 복선을 회수하면서 형식미를 완성시키는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각 수록작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①사건보다 전국 만담대회 결승 생방송에 더 관심이 많은 괴짜 여성탐정 아오카게가 폭력단에게 거액의 의뢰비를 받고 살인사건을 해결합니다. (추리소설 ‘아오카게 탐정의 현금 출납장’)
②반드시 고교 재학 중 전국 만담대회 우승을 거머쥐겠다는 야심을 품은 남녀 콤비 도바시와 아사기는 2년에 걸쳐 눈물겨운 분투를 벌입니다. (청춘소설 ‘최고 반응!’)
③도바시의 여친 나츠메는 어느 날 미래에서 온 두 남자 때문에 패닉에 빠집니다. 더구나 3년 전 사라진 아버지의 진실과 자신의 출생의 비밀까지 알게 됩니다. (SF소설 ‘FUTURE BASS’)
④마계에서 추방돼 일본에 도착한 마법사 라쿠아가 길잡이를 맡을 ‘영혼’ 사키를 소환합니다. 생전의 기억을 잃은 채 라쿠아를 돕던 사키는 한순간 모든 기억을 떠올립니다. (판타지소설 ‘라쿠아 브레즈노와 죽은 자의 기억’)
⑤희귀병으로 실연을 반복하다가 운명의 남자 후유키를 만난 오토구로는 프로포즈를 앞두고 또다시 병이 재발하며 위기에 빠집니다. (연애소설 ‘사랑과 질병’)

첫 수록작 ‘아오카게 탐정의 현금 출납장’을 읽을 때만 해도 괴짜 여성탐정 아오카게가 이끄는 미스터리 단편집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수록작의 주인공이 전국 만담대회 우승을 노리는 고교생 남녀 콤비란 걸 확인한 뒤부터 “도대체 이 작품의 정체성이 뭐야?”라는 궁금증에 사로잡혔습니다. 주요인물들이 번갈아 주인공을 맡는 연작단편집이란 건 쉽게 짐작됐지만, 제각각 추리소설, 청춘소설, SF소설, 판타지소설, 연애소설이라는, 도저히 한 작품 안에서 섞일 수 없는 장르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구축해낸다는 게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돈만 밝히는 괴짜 탐정부터 마계에서 쫓겨난 마법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에게 자신만의 통통 튀는 이야기를 배분한 것은 물론 다른 인물들과의 접점을 절묘하게 설정함으로써 저처럼 괜한 걱정에 빠진 독자를 무색하게 만듭니다. 특히 각 수록작마다 적잖은 복선들이 깔리곤 하는데, 쉽지 않은 장치들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수록작들에서 깔끔하고 선명하게 회수되곤 합니다. 말하자면 각 인물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인물들이 어떻게 엮일지, 이야기들이 어떻게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될지 마지막 장까지 독자의 관심과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은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청춘, SF, 판타지, 연애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좀 먼 장르입니다. 하지만 ‘당신만이 알고 있다’가 품은 뛰어난 형식미와 빈틈없는 복선 회수와 매력 만점의 반전은 수록된 모든 작품들을 흥미진진하게 읽게 만들었습니다. “형식에 관한 한 아직도 미답의 영역이 남아있다”는 주장을 100% 공감하게 만든 ‘당신만이 알고 있다’가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족으로... 1992년생인 작가 모리 바지루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됐는데, ‘당신만이 알고 있다’가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데뷔작인 ‘1/2ーデュアルー死にすら値しない紅’(‘1/2–듀얼-죽을 가치조차 없는 빨강’, 2019)과 ‘なんで死体がスタジオに!?’(‘어째서 시체가 스튜디오에!?’, 2024)라는, 길고 특이한 제목의 두 작품도 머잖아 한국에 소개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