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여행자의 모래시계 - JM 북스
호죠 기에 지음, 김지윤 옮김 / 제우미디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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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정체불명의 살인범이 일으킨 시노의 참극이후 류젠 가문 사람들 대부분은 수십 년 동안 사고나 사건이나 질병으로 인해 단명하는 저주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가모 도마의 아내 레나 역시 류젠 가문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치명적인 병에 걸린 채 사경을 헤매는 중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모는 시공여행 안내자라 자칭하는 마이스터 호라라는 자의 전화를 받습니다. 그는 가모에게 시공여행을 통해 1960년으로 돌아가 저주의 출발점인 시노의 참극을 막고 살인범을 밝히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내 레나의 운명 역시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제안이었지만 가모는 어느 새 호라에게 이끌려 58년 전 참극이 벌어졌던 류젠 가문의 별장 앞에 도착합니다.

 

타임 슬립이나 시공여행이라는 소재를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최근 들어 이가라시 리쓰토의 뒤틀린 시간의 법정과 호죠 기에의 시공여행자의 모래시계를 연이어 읽게 됐습니다. 두 작품 모두 소재의 상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특한 설정과 인물들을 도입하긴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타임 슬립이나 시공여행이라는 소재는 역시 저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재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류젠 가문 출신인 아내 레나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1960년으로 시공여행을 한 가모 도마가 당시 류젠 가문의 별장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살인사건, 일명 시노의 참극의 진상을 알아내고 범인을 밝혀내는 이야기입니다. 애초 참극이 벌어진 계기는 무엇인가? 참극 이후 60년 가까이 류젠 가문 사람들을 단명하게 만든 저주의 실체는 무엇인가? 참극과 저주를 퍼부은 범인의 정체와 목적은 무엇인가?

참극이 벌어진 별장의 밀실 구조라든가 미스터리한 희대의 살인 수법은 고전적인 본격 미스터리의 틀을 잘 구현해놓았고, 본의 아니게 별장 사람들로부터 도쿄 출신의 명탐정으로 불리게 된 가모 역시 본격 미스터리의 주인공이 부여받는 전형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그리고 시공여행이라는 양념이 이야기 곳곳에서 다양한 맛과 향기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쉽고 선명한 이야기라서 페이지는 잘 넘어가지만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굴곡 없는 밋밋함때문입니다. 우선, 토막 나거나 독살당하거나 불에 타 죽는 등 잔혹한 방법으로 류젠 가문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하지만 좀처럼 긴장감이나 불안감을 자아내지 못하는데, 그건 살해당한 자들의 캐릭터가 독자에게 제대로 각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죽어 마땅한 악당인지, 죽지 않기를 바라게 만드는 선한 자인지조차 어필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계속 죽어 나가기만 하니 사건이든 감정이든 이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1960년 당시 혼돈에 빠진 류젠 가문의 분위기가 초반부터 독자를 사로잡았어야 했는데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묘사에 그친 탓에 그저 뉴스 속 남의 일처럼 여겨지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굴곡 없는 밋밋함의 또 다른 이유는 정직하고 평면적일 뿐인 주인공 가모의 역할입니다. 시간은 한정돼있고, 자칫 현재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으며, 혹여 과거를 바꾼다 하더라도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 비해 가모는, 좀 심하게 말하면, 그리 다급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아 보입니다. 막판에 그가 진상을 밝혀내는 대목 역시 특별한 감흥이나 반전이 없어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종합하자면, ‘가문에 내려오는 저주라는 설정 때문에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처럼 팽팽하고 쫄깃한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시공여행이라는 특별한 양념까지 가미됐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맵고 짠맛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청률이 안 나오는 착한 드라마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시공여행자의 모래시계는 호죠 기에의 데뷔작이자 류젠 가의 일족’ 3부작 중 1편이라고 합니다. 후속작에서 가모 도마가 또다시 시공여행에 나서게 될 것 같은데, 한국에도 출간된다면 일단 앞부분은 읽어볼 생각입니다. 인물이든 사건이든 제 눈길을 사로잡는 게 하나라도 있다면 마지막 장까지 기꺼이 달리겠지만, ‘굴곡 없는 밋밋함의 기운이 다시 느껴진다면 아무래도 호죠 기에는 저와는 잘 안 맞는 작가로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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