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쿠 - 망자의 터
기타자와 도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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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간토 대지진(1923년)으로 아내 시즈코를 잃은 후루세 소이치로는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무녀 미쓰코에게 강령 의식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강령을 마친 미쓰코는 “부인은 참말로 떠나신 게요?”라는 불길한 말을 남겼고, 그날 밤부터 후루세에겐 기괴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그러던 중 시즈코의 목소리와 향기를 지닌 괴이가 침실에 나타나는 일까지 벌어지고, 그것이 제대로 성불하지 못한 채 저승으로 가지 못한 망령임을 알게 된 후루세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 와중에 그런 망령들만 골라 잡아먹는 ‘얼굴 없는 괴이’ 에리마키와 맞닥뜨리자 후루세의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어본 작가지만, 2023년 제43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호러 대상’에서 최초로 대상, 독자상, 가쿠요무(カクヨム)상 등 3관왕을 차지한 화려한 타이틀에 눈길이 끌려 관심을 갖게 된 작품입니다. 붉은 부채들과 앙상한 나무, 그것들을 바라보고 앉은 한 여인이 그려진 표지도 인상적인데, 이야기 역시 음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무척 독특한 호러 서사를 선보입니다. 기타자와 도는 인터뷰에서 에도가와 란포와 사와무라 이치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는데, 어떤 대목에선 미쓰다 신조의 분위기도 살짝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온고쿠’는 한자로 표기하면 遠國, 즉 직역하면 ‘먼 나라’이고, 이 작품에선 죽은 자가 사는 곳이자 (부제인) 망자의 터를 뜻하며, 아내 시즈코의 망령이 후루세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부르는 노래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성불을 한 망자라면 누구나 온고쿠로 가야 하지만, 아내 시즈코는 무슨 이유에선지 이승을 떠나지 못한 망령으로 전락했고, 불길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후루세 앞에 나타나곤 합니다. 

그런 후루세를 더욱 공포에 떨게 만드는 건 이승을 떠나지 못한 망령들만 골라서 잡아먹는 ‘얼굴 없는 괴이’ 에리마키입니다. 그 어떤 호러물에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캐릭터인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존재라서 주인공 후루세보다 더 눈길을 끕니다.


이야기는 시즈코가 망령이 된 이유와 후루세를 찾아오는 목적, 망령을 잡아먹는 에리마키의 정체, 그리고 자신의 가문에 전해 내려온 거대한 저주의 실체 등을 무녀 미쓰코를 통해 알게 된 후루세가 고통스러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흘러갑니다. 전반적으로 호러물의 본연의 역할인 ‘서늘함’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망령이 된 아내 시즈코에 대한 후루세의 그리움과 죄책감이 이야기 바탕에 깔려 있다 보니 읽는 내내 안쓰러움과 애틋함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나를 가장 사랑했던 존재가 저주에 빠져 나를 죽이러 다가온다’는 잔혹하고도 애달픈 상황”이라는 출판사 소개글은 후루세의 처지를 한마디로 잘 요약해놓았는데, 이런 설정 덕분에 독자는 일반적인 호러물과는 전혀 색다른 느낌의 엔딩과 마주하게 됩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됐지만, ‘온고쿠’는 서늘함과 애틋함이 공존하는 호러물이라 오히려 뜨거운 한여름보다는 요즘 같은 시기에 읽는 것이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좀더 구체적인 줄거리를 언급하지 못했는데, 호러물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궁금증과 관심이 발동한 독자라면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도 단단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에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도 꽤 상세한 내용을 공개하고 있으니 뒷표지에 실린 줄거리 정도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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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의 아이 : 상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더픽션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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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잠든 뒤 깨어나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희귀질환 이레스. 무려 네 명의 환자가 같은 날, 같은 지역에서 이 병에 걸립니다. 이들을 담당한 신경내과의 시키나 아이는 오랫동안 봉인해온 트라우마가 재발하며 공황에 빠집니다. 환자들 모두 발병 직전 자신처럼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원인도, 치료법도 없어 절망하던 아이는 뜻밖의 경로를 통해 ‘환자의 꿈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기억과 상처를 직면하고 영혼을 구하는 치료법’을 알게 됩니다. 주술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지만 첫 환자의 꿈속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 아이는 그(녀)를 혼수상태에 빠뜨린 고통의 원인과 비밀을 찾는 위험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몽환의 아이’라는 제목과 “잠든 사람의 꿈속으로 들어가 영혼을 구하는 의사”라는 홍보카피만 놓고 보면 제 취향과는 거리가 좀 먼 이야기인 게 사실입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꿈’에 관한 이야기는 대체로 어렵고 골치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훅 끌린 이유는 오로지 하나, 작가가 저의 ‘무조건 필독 작가’ 중 한 명인 치넨 미키토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모호하고 난해한 이야기겠지만, 치넨 미키토라면 ‘꿈 이야기’조차 매력적으로 풀어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몽환의 아이’는 섞이기 힘든 여러 장르가 혼재된 작품입니다. 메디컬 미스터리, 연쇄살인 스릴러, 범죄피해자의 트라우마가 메인 장르지만 거기에다 판타지 서사, 특히 이세계(異世界)와 주술(呪術)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신비하고 비현실적인 설정이 끼어들면서 독자로 하여금 놀라움과 혼선을 거듭 경험하게 만듭니다. 

현실 속 시키나 아이는 최악의 트라우마를 남긴 23년 전의 무차별 살인사건과 현재 진행 중인 연쇄살인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채 혼란에 빠지지만, 희귀질환 이레스에 걸린 네 명의 환자의 꿈속에 진입한 후엔 그들의 영혼이 만들어낸 ‘몽환의 세계’ 속에서 갖가지 비현실적인 위기 상황에 부딪히면서도 그들의 기억과 상처와 고통을 살피며 미스터리를 해결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시키나 아이의 ‘현실’과 ‘비현실’은 비극적인 접점을 갖게 되는데, 독자는 놀라움과 혼선을 느끼면서도 이 방대한 이야기들을 한줄기로 엮어낸 치넨 미키토의 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꽤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현실과 비현실 속 사건들은 복잡하고 많은데다 과거와 현재가 쉴 새 없이 교차되다 보니 쉽고 편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또한 환자들의 꿈속 ‘몽환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판타지의 룰(Rule)도 설렁설렁 읽어선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서 꽤 집중력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키나 아이가 양쪽 진영을 오가며 갖은 위험 속에서도 비밀과 진실을 캐내고 환자의 영혼을 치유하는 이야기,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시키나 아이와 환자들의 비극이 실은 밀접하게 연관돼있음이 밝혀지는 과정, 그리고 막판 대반전과 함께 시키나 아이에게 찾아온 가혹한 운명과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다다르는 애틋한 엔딩 등 치넨 미키토가 직조한 거대하고 정교한 서사는 두 권에 걸쳐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순식간에 읽어내게 할 정도로 재미와 여운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꿈이 얽힌 판타지 서사 때문에, 또 이세계와 주술이 가미된 비현실적인 설정 때문에 다소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치넨 미키토에게 한 번이라도 반했던 독자라면, 또 지금껏 맛보지 못한 독특한 미스터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아직은 인터넷서점이나 블로그에 많은 서평이 올라오진 않았지만 다른 분들의 의견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중요한 정보라든가 위화감이 드는 대목들을 꼼꼼히 메모하면서 읽는다면 이 작품의 묘미를 좀더 진하게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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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의 대여 서점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2
다카세 노이치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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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에는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많았다. 세책업은 무거운 책궤를 짊어지고 다니며 책을 빌려주는 장사였기 때문에 주로 남자들의 일이었다. 필마단기로 세책업에 뛰어든 센은 남자들과 경쟁하며 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는 성적인 표현이 노골적이거나 정권을 비판하는 책을 엄히 단속하던 시절이었는데, 인쇄 판목을 새기는 조각사였던 센의 아버지는 막부에 비판적인 책을 조각했다는 혐의로 형벌을 받고 실의에 빠져 자살했다. 이로 인해 혈혈단신이 된 센을 지탱한 것은 ‘책을 단속하는 세상’에 대한 의문과, 그럼에도 잃지 않았던 책에 대한 믿음이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작품이라 줄거리를 어떻게 정리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출판사의 소개글만큼 잘 쓸 자신이 없어서 거의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안 그래도 비블리오 미스터리, 즉 책이나 기록문서를 소재로 하는 추리소설을 좋아하는데, 거기에다 미야베 미유키 덕분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에도시대가 배경인 작품이라 큰 기대를 갖게 됐습니다. (처음 접한 작가지만 북스피어가 펴내고 이규원이 번역한 작품이라 조금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는 뒷골목을 누비며 반딧불이의 희미한 빛을 후세에 남기는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책만 빌려주고 다니는 게 아니에요. 책을 지키는 거예요.” (p66)


5년째 세책점 우메바치야를 운영하는 24살 센의 삶은 99%가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책에 실릴 삽화를 판목에 조각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엔 홀로 무거운 책궤를 들고 사방을 돌아다닙니다. 단순히 생계를 위한 세책이 아니라 센은 진심으로 책을 아끼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책이 얽힌 사건이라면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일단 부딪히고 보는 성격입니다. 당차고 정의로운 반골이라고 할까요?


수록된 다섯 편엔 센의 과거와 현재를 소개하는 내용은 물론 절도, 방화, 살인 등 책과 관련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센이 직접 해결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역할을 맡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지혜를 동원하여 진상을 밝혀내기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사건 관련자를 만나거나 사건 현장을 직접 찾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심지어 폭력배와 부딪히더라도 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 모든 건 어떤 상황에서도 책을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편집자 후기’ 가운데 “센은 책에 관한 한 집념이라고 해도 좋을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과 출판을 통제하는 나라님들에 대한 반감도 있지요.”라는 설명은 센이 어떻게 세상을 대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엄청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독하고 센 이야기도 아니지만 때론 웃음을 자아내기도, 때론 행여나 다치기라도 할까 걱정하게 만들기도 하는 센의 진심어린 행동들을 읽다 보면 어느새 온힘을 다해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센의 대여 서점’은 북스피어가 야심차게(?) 내놓은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라는 특이한 이름의 시리즈 중 한 편으로, 이마무라 쇼고의 ‘새왕의 방패’에 이은 두 번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에도시대는 물론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일본소설을 무척 좋아하다 보니 이 시리즈가 북스피어 김사장님의 예고처럼 10편만 내고 끝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자신 있게 추천하는 건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바로 일본 시대소설의 가장 큰 장벽인 고유명사 때문입니다. ‘미야베 월드 2막’을 비롯하여 일본 시대소설을 꽤 읽은 저도 ‘센의 대여 서점’에서 처음 보는 고유명사들이 많아서 주석에 눈길이 많이 빼앗겼는데, 이제 막 입문하는 독자라면 꽤 난이도 높은 책읽기를 각오해야 됩니다. 하지만 이 장벽만 넘는다면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라는 길고도 반어법적인 시리즈 이름에 100% 공감하는 것은 물론 저처럼 ‘에도시대 마니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일본에선 2025년에 센의 두 번째 이야기인 ‘往来絵巻 貸本屋おせん’가 출간됐습니다. 개인적으론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의 세 번째 작품이 센의 두 번째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는데, ‘편집자 후기’를 보면 그럴 가능성도 꽤 있어 보입니다. 물론 1~2년에 한 편씩 센의 새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작가 이력을 살펴보니 센의 이야기 외에도 시대소설을 많이 출간했던데, 그 작품들도 한국에 꼭 소개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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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놀이공원의 살인
샤센도 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더블샷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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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인 2001년, 가오픈 첫날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으로 인해 단 3시간여 만에 문을 닫은 비운의 놀이공원 일루전 랜드. 이후 폐허처럼 방치된 이곳을 사들인 괴짜 부호 도시마 이오리가 과거 놀이공원 관계자들과 폐허 마니아 등 10명을 초대합니다. “보물을 찾는 자에게 일루전 랜드를 넘기겠다.”는 도시마 이오리의 제안에 일행은 잠시 들뜨기도 하지만, 한 남자가 참혹하게 살해당하면서 일루전 랜드는 다시 한 번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으로 탈바꿈합니다. 연이어 살인이 벌어지는 와중에 20년 전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고, 참가자들은 도시마 이오리가 자신들을 초대한 목적이 따로 있음을 감지합니다.



아쓰카와 다쓰미와 함께 출간한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 이후 두 번째로 만난 샤센도 유키입니다. 앞서 ‘낙원은 탐정의 부재’에 도전했다가 판타지에 가까운 설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 적이 있는데,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의 좋은 기억과 함께 ‘폐허를 무대로 한 미스터리’라는 홍보글에 눈길이 끌려서 이 작품을 읽게 됐습니다. (샤센도 유키는 93년생 작가지만 검색해보면 엄청난 출간목록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한국에는 非미스터리 포함 모두 일곱 편이 소개됐습니다)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괴짜 부호의 초대장을 받고 지금은 폐허가 돼버린 일루전 랜드를 찾은 10명의 방문객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엽기적인 살인에 큰 충격을 받곤 진범을 찾는 이야기가 메인 스토리지만, 독자의 관심을 더 끄는 대목은 20년 전에 벌어진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의 이면에 숨은 가혹하면서도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놀이공원이 들어설 땅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아마쓰키촌 주민들의 피눈물을 짜낸 뒤 들어선 일루전 랜드가 총기 난사 사건으로 가오픈 3시간 만에 문을 닫고 20년 간 폐허로 방치됐다는 건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데, 작가는 거대한 클로즈드 서클이나 다름없는 일루전 랜드에서의 연쇄살인사건과 20년 전의 비극을 잘 직조함으로써 단순히 놀라운 트릭만 앞세운 본격 미스터리 이상의 서사를 만들어냈습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에 수록된 샤센도 유키의 ‘흔한 잠’에 대해 “애틋하고 안쓰러운 여운을 남기는 감성적인 미스터리”라는 평을 쓴 적이 있는데, ‘폐놀이공원의 살인’ 역시 미스터리 자체보다 20년 전의 비극에 얽힌 여러 인물들의 복잡다단한 심경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듯 합니다.


다만, 막판에 ‘탐정역’을 맡은 주인공 마가미 에이타로가 연쇄살인사건의 진상을 풀어내는 부분에선 역시 제 취향과는 좀 거리가 먼 억지스러움이 느껴져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범인의 범행동기도, 또 그렇게 복잡한 살인을 벌여야만 했던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은 됐지만, “과연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일까?”라는 반문이 계속 몰입을 방해했습니다. 이른바 ‘시마다 소지 스타일의 본격 미스터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저 같은 독자라면 비슷한 경험을 할 수도 있는데, 그 반대의 경우라면 이 작품에 높은 점수를 주고도 남을 만큼 열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저자 후기’를 통해 샤센도 유키는 괴짜 부호 도시마 이오리를 앞세운 ‘폐허 탐정 시리즈’를 구상하고 있음을 밝혔는데, 한번쯤 더 샤센도 유키에게 재도전 해볼지 여부는 좀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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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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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 잡지 편집자였지만 지금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일감 찾기에 골몰하던 고바야시는 유튜브 호러 동영상을 검색하다가 그 자신은 유령을 믿지 않지만 심령 스팟 방문기로 나름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케다를 발견하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떠올립니다. 신관 집안의 딸로 유령을 보는 능력을 지닌 작가 호조까지 불러들인 고바야시는 이케다의 영상에 적당히 날조한 괴담과 소문을 버무리기로 하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연일 회의를 거듭합니다. 사진이 잔뜩 버려진 폐가, 유령을 만날 수 있다는 폐병원, 저주를 부르는 임신부의 그림이 그려진 폐호텔 등 이케다가 찾았던 심령 스팟들 가운데 인기를 끌 만한 곳들을 선정한 세 사람은 각자 조사를 벌이는데, 그 와중에 각자의 어두운 과거 속 유령들과 조우하며 뜻밖의 상황에 처합니다.



최근 가장 인상 깊게 읽은 호러물은 정통 쪽보다는 이른바 특수설정을 내세운 작품들로 세스지의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우케쓰의 ‘이상한 집 시리즈’입니다. 스즈키 코지, 미쓰다 신조, 사와무라 이치의 정통 호러물도 좋아하지만, 낯설고 산만하면서도 아주 조금씩 냉기를 느끼게 만들다가 한 발 늦은 공포심을 만끽하게 하는 세스지와 우케쓰의 특수설정 호러는 전혀 색다른 재미와 여운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는 두 개의 축으로 이뤄진 이야기입니다. 고바야시, 이케다, 호조 등 세 사람이 순전히 돈을 벌 목적으로 세 곳의 심령 스팟에 관한 괴담과 소문을 날조하는 것이 하나이고, 과거 이기심과 악의 때문에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던 세 사람의 어두운 과거가 나머지 하나입니다. 

모든 이야기에 저주와 악의가 깃든 유령이 등장하고 그 유령의 정체에 관한 불온한 사연들이 펼쳐지지만, 사실 그것들 자체는 읽는 순간엔 딱히 무섭진 않습니다. 그런데 세 곳의 심령 스팟의 유령 이야기와 세 명의 과거 속 유령 이야기가 실은 묘하게 공통점을 지녔다는 점을 인식하는 순간 호러물로서의 매력이 제 맛을 내기 시작합니다. 또한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가 중후반부에 소개되면서 다시 한 번 이야기는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도 그랬지만, 이 작품 역시 일반적인 기승전결 구조와는 거리가 멉니다. 물론 세 사람의 괴담 비즈니스가 착착 진행되고, 각자의 과거와 현재가 그려지며, 특히 유령을 믿지 않으면서도 심령 스팟 유튜버를 자처해온 이케다의 비밀이 드러나는 등 전작에 비해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전개가 이어지지만, 실은 짧게 나뉜 각 챕터들이 마치 독립된 호러물처럼 개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긴 장편이라기보다 재미있는 단편집을 읽은 느낌이었습니다.


내용과 형식 모두 특별한데다 간혹 어렵게 읽히는 구간도 있고, 무엇보다 구조 자체가 2중 3중으로 돼있어서 개별 괴담들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하는 게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선지 호러물임에도 불구하고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는 느린 속도로 한번쯤 더 읽어야 그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마침 전작의 내용 일부가 개작된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두 번째 기록’이 최근 출간됐다고 해서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났는데,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는 약간의 공백을 둔 뒤 날씨가 서늘해질 무렵쯤 조금은 다른 분위기에서 재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사족 :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도 번역했던 전선영의 ‘역자후기’는 이 작품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됩니다. 재독을 결심한 이유도 ‘역자후기’ 덕분인데, 놓치지 말고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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