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부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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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언젠가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출간 순서대로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들 것입니다. 알라딘에서 검색하면 모두 56편의 작품이 한국에 출간된 걸로 나오지만 아케치 고고로 시리즈를 제외하면 약간은 중구난방의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고, 체계적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정리했다기보다는 독자의 관심을 살 만한 중단편들이 중복 출간된 경우가 더 많아서 마니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어려워 보이곤 합니다. 2016년에 검은숲에서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을 내놓긴 했지만 2편까지만 나오곤 소식이 끊겨서 무척 아쉬웠는데, 오랜만에 다수의 수록작을 품은 에도가와 란포 기담집이 출간돼서 반가운 마음으로 읽게 됐습니다.


 

모두 16편이 수록됐지만 거의 절반 가까이는 이미 다른 중단편집을 통해 소개된 작품들입니다. 특히 애벌레’, ‘인간 의자’, ‘거울 지옥등은 두세 편 이상의 중단편집에 중복 수록됐던 인기작들인데, 오랜만에 다시 읽어도 여전히 에도가와 란포 특유의 기괴함과 그로테스크한 마력을 만끽할 수 있어서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란성 쌍둥이 형을 죽이고 형 행세를 하며 살인을 저지른 남자의 참회록(쌍생아), 법을 어기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뒤 99명의 목숨을 빼앗은 남자(붉은 방), 아내를 살해하고 토막 내어 시랍으로 만든 약사(백일몽), 자신이 만든 의자 속에 숨어들어가 가죽 한 장 사이로 타인의 몸과 접촉하는 것에 도취든 장인(인간 의자), 사람들의 무시와 핍박 속에 살인귀로 전락해버린 난쟁이 광대(춤추는 난쟁이), 결혼 6개월 만에 차갑게 변한 남편의 비밀을 캐다가 참혹한 비극과 마주하고 만 여자(사람이 아닌 슬픔), 전쟁 중에 팔과 다리를 잃고 오직 시각과 촉각만 남은 전직 군인 남편을 추악한 욕정의 도구이자 가학적 학대의 대상으로 이용하는 여자(애벌레)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인물과 이야기가 기담과 괴담 혹은 호러와 미스터리 서사에 실린 채 예측 불가능한 엔딩을 향해 폭주하면서 독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에도가와 란포의 진짜 매력은 전대미문의 기괴함이나 무한대로 일그러진 그로테스크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자는 각 수록작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마다 서로 다른 색깔의 특별한 여운을 맛보게 되는데, 제 경우 앞서 읽은 끔찍한 이야기에서 어떻게 이런 여운이 파생될 수 있을까, 라는 혼란과 이질감을 느끼다가 금세 이것이 에도가와 란포만의 매력이라는 결론에 이르곤 했습니다. 실제로 수록작 중 상당수는 단순히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곳곳에 말로 다 표현 못할 처연함과 애틋함을 품고 있습니다. 심지어 요즘의 시선으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와 악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주인공에게 이입된 나머지 용서하거나 응원하거나 모르는 척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악마 그 자체를 적나라하게 그려내서 다 읽은 뒤 지독한 혐오감에 빠지게 만드는 작품도 있습니다)

 

요즘 독자의 트렌드로 볼 때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출판사에겐 바람직한 비즈니스 대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의 작품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결정판이 시리즈로 출간되기를 복권을 사는 마음으로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특히 정치적 상황 때문에 다소 말랑말랑한 작품(‘아케치 고고로 시리즈)을 쓸 수밖에 없게 된 1936년 이전의 작품들이라면 언제라도 두 손 들어 환영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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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뜨는 숲
아오야마 미치코 지음, 승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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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소설은 제 관심 장르가 아닙니다. 최애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면 제목이나 표지에서 힐링 비슷한 분위기만 풍겨도 외면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름조차 생소한 아오야마 미치코의 달이 뜨는 숲에 눈길이 간 첫 번째 이유는 ‘4년 연속 일본서점대상 수상 작가라는 소개글 때문입니다. 일본의 여러 문학상 가운데 가장 신뢰하는 게 일본서점대상인데, 순문학에서 장르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라인업 돼있어서 매년 수상작이 발표될 때면 관심 있게 지켜보곤 합니다. 4년 연속 수상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 미치코의 이름이 제게 각인되지 않은 건 아마도 난 힐링 소설이야!”라고 대놓고 선언하는 듯한 표지와 제목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달이 뜨는 숲은 소개글 몇 줄만으로도 제 관심을 이끌어냈고, 결과부터 말하면 흔한 힐링 소설들과는 약간은 결이 다른 매력을 품고 있어서 꽤 진하고 깊은 여운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각 주인공들은 다른 수록작에도 의미 있는 조연으로 등장하곤 해서 이 작품의 메시지 중 하나인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사람과 사람은 틀림없이 이어져 있다를 여러 번 실감하게 만듭니다. 또한 모두들 다케토리 오키나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팟캐스트 달도 끝도 없는 이야기의 애청자이기도 한데, 주인공들은 매일 10분씩 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팟캐스트를 통해 자신이 처한 여러 가지 고민과 문제들의 탈출구를 찾아내곤 합니다.

 

번 아웃과 자기혐오에 빠져 오랫동안 근무한 병원을 그만둔 간호사 레이카, 개그맨이 되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자괴감에 빠져 사는 택배기사 시게타로, 딸의 갑작스런 임신과 결혼 때문에 착잡함을 털어내지 못하는 중년남자 다카바, 엄마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몰래 배달 라이더로 일하는 여고생 나치, 그리고 취미로 시작한 액세서리 제작이 번창하면서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20대 여성 무쓰코 등 다섯 명의 주인공은 하나 같이 자기 자신 때문에, 혹은 애증을 품은 그 누군가 때문에 고민과 갈등에 빠져있습니다. 갈수록 깊어지는 자기혐오, 가까우면서도 멀게만 느껴지는 상대와의 거리감, 벗어나고 싶지만 동시에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이율배반 등 쉽사리 치유되기 힘든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 자전속도에 맞춰서 달은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지요. 달과의 거리가 처음과 똑같았다면 지구는 지금쯤 어떤 별이 됐을까요? 달과 지구는 조금씩 멀어지면서도 그때그때 가장 좋은 상태로 관계를 이어왔구나, 하는 생각을 저는 하곤 합니다.” (p24)

 

다섯 명의 주인공에게 변화와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건 팟캐스트 달도 끝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이런 팟캐스트가 있다면 애독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달도 끝도 없는 이야기는 지금껏 몰랐던 달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단순히 달에 대한 상식만이 아니라 희로애락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달과 결부시켜 설명함으로써 큰 공감대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달처럼 변할 수밖에 없다고, 지구와 달이 조금씩 멀어지면서도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반드시 가까워야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또 음력 초하룻날이면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달이 다음날이면 새로운 모습으로 밤하늘에 뜨듯이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고 말해주는 다케토리 오키나의 다정다감한 목소리에 주인공들은 새삼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변화와 희망의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달이 뜨는 숲을 다른 힐링 소설들과 차별화시키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아오야마 미치코가 팟캐스트 내용만 모아 한 편의 소설로 내줬으면 하는 바람도 갖게 됐습니다.)

 

몇몇 대목에서 힐링 소설의 작위성과 한계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달이 뜨는 숲은 그동안 읽은 몇 안 되는 힐링 소설 중에서도 꽤 오래 기억에 남을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무심히 바라보곤 했던 달을 앞으론 각별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게 해준 점이 고마웠습니다.

역자 후기를 보니 아오야마 미치코의 작품 가운데 도서실에 있어요달이 뜨는 숲과 비슷한 정서를 품은 것으로 보이는데, 언젠가 장르물 편식이 참을 수 없이 지겨워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꼭 한 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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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장의 참극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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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가을, 명탐정 긴다이치 고스케가 후지산 인근 대저택 명랑장을 방문합니다. 지금은 신흥재벌 시노자키가 소유하고 있지만 명랑장은 과거 메이지유신으로 부와 권력을 거머쥐었던 후루다테 다넨도가 지은 별장으로 건물과 부지 곳곳에 비밀장치와 탈출구가 설치돼서 미로장이란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루다테 가문은 패전 후 3대째인 다쓴도에 이르러 몰락하고 말았고 시노자키는 명랑장은 물론 다쓴도의 아내 시즈코까지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시노자키가 긴다이치 코스케를 초빙한 건 정체불명의 외팔이 남자가 저택 인근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일 때문입니다. 20년 전 2대째 주인 가즌도가 일으킨 대참극 때 시즈마라는 남자가 한쪽 팔을 잘린 채 종적을 감춘 일이 있는데, 시노자키는 시즈마가 복수를 위해 20년 만에 저택에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 것입니다.


 

미로장의 참극은 좀 복잡한 탄생 이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1956미로장의 괴인이란 제목의 단편으로 출간됐다가 이후 중편으로 확장됐고, 이후 1975년에 이르러 장편소설로 완성됐습니다.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의 후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배경이 1950년인 건 이런 사연 때문입니다. 장편 출간일자를 기준으로 하면 가면무도회’(1974년 출간)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1975~1977년 연재) 사이에 나온 셈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핵심 코드는 패전 이후의 사회적 혼돈, 몰락한 화족(華族)의 비극, 붕괴를 겪는 지방의 봉건문화, 그 와중에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로장의 참극은 붕괴 중인 봉건문화를 제외한 모든 코드들이 잘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각종 비밀장치와 탈출구로 중무장한 기묘한 대저택, 대를 이을수록 심해진 후루다테 가문의 탐욕과 부패와 엽색의 기질, 그리고 20년 전의 대참극 이후 몰락의 길을 걸은 끝에 연쇄살인사건에 휘말리고 만 참혹한 운명 등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팬이라면 누구라도 흠뻑 빠져들 만한 매력적인 서사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신흥재벌 시노자키에 의해 곧 호텔로 변신할 예정인 명랑장에 그야말로 악연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모여듭니다. 시노자키는 후루다테 가문 사람들을 불러 모아 저택의 과거를 함께 반추하는 것은 물론 20년 전 대참극 때 살해된 자들의 기일 제사를 올리려 한 것인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타이밍에 정체불명의 외팔이 남자가 출몰한 탓에 긴다이치 코스케를 초빙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긴다이치 코스케가 저택에 도착한 날부터 연이어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적잖은 인물들이 기괴하거나 참혹한 방식으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긴다이치 코스케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미로장이란 별칭을 갖게 만든 저택 곳곳의 비밀장치와 지하로 연결되는 탈출구입니다. 저택이 처음 지어질 당시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80대 노파 외에는 그 누구도 비밀장치와 탈출구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경찰과 긴다이치 코스케는 범인이 저택에 머물고 있는 자들 중 하나라고 확신하면서도 동시에 20년 전 한쪽 팔을 잘린 채 종적을 감췄던 시즈마라는 남자에 대한 의심을 떨쳐내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가 비밀장치와 지하 탈출구를 이용하여 과거의 복수를 실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팔묘촌에서 맛봤던 지하 동굴 미스터리를 연상시키는 이 특별한 공간이야말로 미로장의 참극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팬이라면 가면무도회이후 무려 10년 만에 한국에 출간된 미로장의 참극을 무조건 두 손 들어 환영하겠지만, 이 작품으로 처음 시리즈를 접한 독자라면 살짝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초기작인 옥문도’, ‘팔묘촌’, ‘이누가미 일족등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특유의 핵심 코드들과 함께 트릭 미스터리의 진수를 선보였다면 미로장의 참극은 미스터리 자체로는 다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추리는 비약과 정체를 반복하는 탓에 독자가 따라가기 쉽지 않았고, 저택에 머무는 자들은 용의자이자 예비희생자들인데도 서로 갈등하거나 충돌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긴장감을 유발하기는커녕 마네킹 조연처럼 보일 만큼 존재감이 희미합니다. 첫 살인사건 이후 이들에 대한 심문에 상당한 분량이 할애되는데 정작 이들 사이에 눈길을 끌만한 관계가 없다 보니 지루하게 읽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비밀장치와 지하 탈출구가 미스터리의 흥미를 돋우긴 하지만 독자를 교묘하게 속이기 위한 트릭이라기보다는 저택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한 배경으로 활용된 점도 무척 아쉬웠습니다. 무엇보다 범행동기가 애매모호하게 혹은 기대 이하로 설정돼서 연쇄살인의 비극성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던 점은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두고두고 찜찜함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총평하자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특유의 핵심 코드들은 여느 작품 못잖게 매력적이었지만, 미스터리는 초기작들의 맛에 비해 무척 싱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아쉬움들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가면무도회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등 후기작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엔 긴다이치 코스케가 활약한 작품이 모두 77편이라고 하지만 이중 장편(또는 단편으로 출간됐다가 장편으로 확장된 경우)만 골라내면 대략 27편 정도 됩니다. 한국엔 두 편의 중단편집 외에 11편만 소개됐는데, 한 가지 바람이라면 미로장의 참극출간을 계기로 시리즈 초기작들이 좀더 많이 한국에 소개됐으면 하는 점입니다. 장편이라면 더할 나위 없고, 중단편집도 괜찮으니 또 다시 10년을 기다리는 일만은 없기를 기대해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출간 순서는 https://blog.naver.com/memories226/222215959134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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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쿠치바 전설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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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남자’, ‘토막 난 시체의 밤’,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등 읽은 작품 모두 독특한 느낌과 여운을 남겨줬던 사쿠라바 카즈키의 2006년 출간작입니다. 이 작품은 2007‘60회 일본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했지만 추미스 독자들이 기대하는 일반적인 추리소설은 아니라서 사전 정보 없이 읽을 경우 살짝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아카쿠치바 전설은 패전 직후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60여년에 걸쳐 돗토리 현 베니미도리 촌에서 제철업의 흥망성쇠를 겪은 아카쿠치바 가문의 여성 3대의 연대기입니다. 패전 무렵 태어나 업둥이로 자랐으며 환시(幻視)와 미래시(未來視)의 능력을 지녔던 만요, 거품경제의 극치를 달리던 80년대에 전국적으로 악명을 떨치던 폭주족이었다가 소녀만화가로 변신하여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게마리, 그리고 할머니와 어머니와는 달리 무기력하게 젊음을 소진하며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도코 등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세 명의 여성이 자신이 살던 시대의 변화상과 아카쿠치바 가문에서 벌어진 갖가지 사건들을 담담하게 들려줍니다.


 

아카쿠치바(赤朽葉, 붉은 고엽)라는 가문 이름답게 건물과 정원 모두 짙은 붉은색으로 뒤덮인 대저택을 무대로 한 여성 3대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굴곡진 삶뿐 아니라 패전-고도성장-거품경제에 이르는 일본의 현대사까지 담아내고 있어서 말 그대로 대하드라마와 같은 무게감과 깊이를 갖고 있습니다.

 

환시(幻視)와 미래시(未來視)의 능력을 지닌 만요는 패전 직후부터 1975년까지의 이른바 최후의 신화시대의 표상입니다. 지금은 존재 여부조차 확실치 않은 산속의 은거자들의 후손으로 피부색이며 머리칼이며 보통 일본인과는 사뭇 달랐던 만요는 업둥이로 자라다가 기구한 인연으로 인해 아카쿠치바 가문의 며느리가 됩니다. 그녀가 지닌 신비한 능력과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아카쿠치바 가문의 범상치 않은 분위기 덕분에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선 최후의 신화시대라는 부제에 걸맞게 매력적인 판타지 서사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만요의 딸 게마리는 1979년부터 1998, 그러니까 고도성장과 거품경제의 붕괴라는 롤러코스터 같았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명문가의 차녀였지만 게마리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폭주족 리더이자 쇠파이프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으로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립니다. 오늘이 행복하다면 내일 죽어도 좋다는 청춘예찬론을 펼치며 거침없이 살아가던 그녀는 뜻밖의 비극을 겪은 뒤 갑자기 소녀만화가로 변신하고 그야말로 짧지만 굵게 불꽃처럼 살아갑니다. 자신이 살던 격동의 시대와 꼭 닮았던 게마리의 삶은 만요의 판타지 서사와는 정반대로 지독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그려집니다.

 

게마리의 딸 도코는 변화무쌍한 시대에 태어나 극적인 삶을 살았던 할머니 만요나 어머니 게마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인물입니다. 2000년대 초반 일본 청춘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도코에게선 그저 무기력함밖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도코에게 주어진 미션은 할머니 만요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한마디 - “내가 옛날에 사람을 한 명, 죽였어.” - 의 진실을 밝히는 일입니다. 60여년에 걸쳐 아카쿠치바 가문에선 여러 사람이 다양한 형태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도코가 알기로는 그 가운데 살인의 가능성이 있는 죽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요의 고백에 담긴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도코는 과거의 죽음들을 모조리 소환합니다. 그리고 결국 만요가 오랜 시간 홀로 감내했던 비극의 실체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 작품의 미스터리 서사는 만요에 의해 시작되고 도코에 의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200760회 일본추리작가 협회상수상 이력만 믿고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다소 배신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그런 오해 덕분에 아카쿠치바 전설을 읽게 돼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수상 이력이 아니더라도 표지와 제목이 호러의 분위기를 내뿜는데다 사쿠라바 카즈키의 작품이란 이유만으로 어떻게든 읽었을 작품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각각 신화의 시대, 풍요와 붕괴의 시대, 무기력의 시대를 살았던 아카쿠치바 여성 3대를 그린 아카쿠치바 전설은 한두 줄로 그 매력을 요약하기가 어려운 작품이며, 특히 굴곡진 개인의 삶과 격변기를 통과하는 시대상을 한꺼번에 맛보고 싶은 독자에겐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쿠라바 카즈키에게 한번쯤 매료된 적 있는 독자라면 이 묵직하고도 기이한 이야기에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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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진찰실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박수현 옮김 / 알토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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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진찰실신의 카르테 시리즈의 작가 나쓰카와 소스케가 일본에서 2023년에 발표한 메디컬 소설입니다. 교토의 지역의료기관인 하라다병원에서 소화기내과 의사로 근무하는 38살 마치 데쓰로가 주인공인데, 그는 여러 면에서 신의 카르테 시리즈의 주인공 구리하라 이치토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입니다. 구리하라가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광팬이었다면 데쓰로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사상에 심취한 철학적인 의사입니다. 무엇보다 권위나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환자에게만 몰두하는 진정한 의사라는 점이 닮은꼴의 핵심인데, 그래선지 스피노자의 진찰실은 나이를 먹은 구리하라가 등장하는 신의 카르테 시리즈의 외전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라쿠토대학에서 내시경 수술에 관한 한 최고라는 평을 듣던 데쓰로는 싱글맘이던 여동생이 투병 끝에 세상을 뜨자 어린 조카 류노스케를 돌보기 위해 대학병원을 그만두고 지역의료기관인 하라다병원으로 이직합니다.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최첨단 의술을 익혀야 하고 병원 내 권력관계의 스트레스까지 감당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데쓰로는 하라다병원에서 전혀 새로운 의사의 길을 걷습니다. 무엇보다 임종을 앞둔 노령 환자나 말기암 환자가 대부분이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의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데쓰로는 3년 가까운 시간을 하라다병원에서 보내면서 그런 환자들에게 필요한 건 고도의 의술이 아니라 상대를 안심시키는 말 한마디와 진정성이 담긴 마음 한 조각이라는 걸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런 데쓰로의 태도는 환자뿐 아니라 동료의사들에게도 긍정적이고 선한 영향을 미칩니다.


 

“(스피노자는) 희망 없는 숙명론 같은 것을 제시하면서도 인간의 노력을 긍정했지.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노력하는 의미가 없을 텐데, 그는 이렇게 말했거든. ‘그렇기에노력이 필요하다고.” (p204)

 

데쓰로는 비록 병이 낫지 않더라도, 설령 남은 시간이 짧더라도 사람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게 내 나름의 철학이야. 그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해.”라는 식으로 자신이 심취한 스피노자의 사상을 의료현장에 대입시킵니다. 말하자면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에게 의사로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더라도 어떻게든 작은 행복을 맛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이 의사 데쓰로의 철학이자 사명이자 존재의 이유라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은 안심을 선물하는 것 같아요.”라는 새카만 후배의사의 한마디는 데쓰로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압축해놓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에 있던 시절을 돌아보면 치료한 암의 형태나 색조는 확실히 기억하지만, 환자의 얼굴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여기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잘 보여요.” (p59)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철학이 끼어든 재미없는 메디컬 소설 같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야기는 신의 카르테 시리즈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데쓰로 못잖게 괴짜 캐릭터를 지닌 동료의사들, 각자 기구한 사연을 지닌 환자들, 어떻게든 데쓰로를 대학병원으로 복귀시키고 싶어 안달이 난 선배의사, 그리고 내시경 능력자인 데쓰로에게 배움을 청하러 왔다가 어떻게 봐도 유능한 의사로 보이지 않는 모습에 실망하지만 결국 그의 진심과 그가 추구하는 의사의 길에 감동을 받는 새카만 후배의사 등 여러 인물들이 데쓰로라는 별난 의사와 함께 매력적이면서 감동적인 메디컬 소설을 구축해냅니다. 또한 정취 넘치는 교토의 풍광과 단맛 마니아인 데쓰로가 소개하는 가지각색의 화과자와 모치(もち, )의 향연은 별책부록처럼 독자의 오감을 즐겁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좀더 세고 자극적인 에피소드가 등장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절반, 그런 에피소드가 없어서 더 좋았다는 생각이 절반입니다. 양념이 살짝 덜 들어간 심심함이 아쉬움의 이유로 혹은 정반대로 호감의 이유로 작동할 수 있다는 뜻인데, 과연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무척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2023년에 출간됐으니 만약 시리즈로 이어진다면 2025년엔 데쓰로의 두 번째 이야기가 출간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억측이지만 나쓰카와 소스케가 후속작을 염두에 둔 듯 본문 여기저기에 데쓰로와 관련된 떡밥을 숱하게 깔아놓아서 그런 기대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신의 카르테 시리즈가 다섯 편으로 마무리된 게 너무 아쉬웠는데, 스피노자에 심취한 데쓰로가 그 배턴을 이어받는다면 더없이 반갑고 기쁠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번역과 편집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후속작이 나온다면 그런 아쉬움들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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