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 군함의 살인 - 제33회 아유카와 데쓰야상 수상작
오카모토 요시키 지음, 김은모 옮김 / 톰캣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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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유럽동맹 간의 전쟁이 한창이던 1795, 임신한 아내를 둔 평범한 영국 남자 네빌 보우트는 납치당하듯 징병되어 범선 군함 헐버트호의 수병이 됩니다. 첫날부터 무자비한 폭력과 함께 군사훈련이 시작되고 네빌은 평생 겪어보지 못한 공포심에 사로잡힌 채 가족과의 생이별에 절망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수병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범선에서 연이어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수사를 담당한 장교는 즉각 네빌을 용의자로 지목하는데, 첫 사건 땐 피살자의 바로 옆에 있었고, 두 번째 사건 땐 시신의 첫 발견자가 네빌이었기 때문입니다.

 


1795년 프랑스와의 전쟁에 나선 영국 범선 군함 헐버트호에서 벌어진 일련의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른바 움직이는 밀실이라 할 수 있는 바다 위의 군함을 무대로 한 본격 미스터리인데 일본 작가의 작품이라 더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범선 군함의 살인으로 제33회 아유카와 데쓰야상을 수상하기 전까지 오카모토 요시키가 쓴 작품들 모두 빅토리아 시대 런던이나 영국 식민지의 농장 등 과거의 외국을 무대로 삼았다고 하니 무척 특이한 성향의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다 위의 군함자체도 거대한 밀실이지만, 헐버트호에서 벌어진 살인사건들은 범행 이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유유히 종적을 감춘 범인의 행각 때문에 밀실 미스터리의 맛을 더 강렬하게 풍깁니다. 범인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의 갑판에서, 또는 온통 어둠뿐인 배 밑바닥에서 기괴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가 하면, 유일한 출구가 수병들에 의해 막힌 밀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립니다.

수병과 장교들을 더욱 두렵게 만든 건 이른바 프랑스 함장 유령의 저주라는, 헐버트호에 전해 내려오는 괴담입니다. 과거 헐버트호의 영창에 갇혔던 프랑스 함장이 자살한 이래로, 그 영창에 감금됐던 자들이 저주에 휘말려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는 괴담인데, 공교롭게도 이번 살인사건의 피살자들 역시 영창을 드나들었던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메인 서사지만 범선 군함의 살인에는 흥미로운 서브 서사들도 포진해있습니다. 우선 18세기, 그것도 범선 군함이라는 독특한 공간에 대한 묘사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끕니다. 승조원이 500명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헐버트호의 외형도 신기했고, 범선의 항해 원리라든가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내부 구조에 대한 설명 역시 미스터리 못잖게 독자의 흥미를 자극합니다. 또한 죽음의 공포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던 네빌이 같은 신세인 수병들 일부와 함께 탈출을 도모하는 이야기는 액션 스릴러의 긴장감과 함께 과연 그들이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시대적 배경이나 사건의 성격상 다분히 고전적인 느낌이 강한 작품입니다. 빠른 전개와 세련된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인데, 사실 고전미나 서사 자체보다 아쉬웠던 건 망망대해의 군함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공포심이 기대보다 약했다는 점입니다. 500명에 달하는 승조원 가운데 살인사건에 관심을 갖거나 조금이라도 공포심을 느낀 건 용의자로 지목받은 주인공 네빌과 소수의 수병들, 그리고 수사를 지휘하는 일부 장교뿐이었고, 그래선지 독자 역시 헐버트호를 뒤덮은 살인사건의 공포에 깊게 몰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주인공 네빌은 대체로 수동적이고 유약한 캐릭터로 그려졌고, 탐정 역할을 맡은 장교 버넌은 두 번째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와 지향점이 모호해서 네빌과의 시너지를 발산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누구나 살해될 수 있다는 공포심이 헐버트호를 제대로 강타했더라면, 또 두 주인공이 좀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충돌했더라면 좀더 내실 있는 미스터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장르물 독자라면 저절로 눈길이 끌릴 만큼 매력적인 설정이 가득한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범선 군함의 살인18세기 범선 군함을 무대로 한 미스터리와 스릴러와 휴먼 드라마의 조합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꽤 흥미로운 텍스트가 돼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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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방정식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6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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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자원개발 설명회 때문에 바닷가 마을 하리가우라로 가던 유가와 마나부는 방학을 맞아 고모가 운영하는 여관 로쿠간소로 가던 초등학생 교헤이와 소소한 인연을 맺습니다. 그 인연 덕분에 유가와는 로쿠간소에 묵게 됐지만, 다음날 아침 그곳에 투숙했던 쓰카하라라는 남자가 제방에서 추락한 사체로 발견되는 바람에 경찰 수사에 휘말리고 맙니다. 애초 사고사로 보였지만 감식 결과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추락한 게 밝혀졌고, 그가 전직 경시청 형사였다는 점 때문에 결국 하리 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됩니다. 한편 쓰카하라의 옛 부하이자 현직 경시청 관리관의 내밀한 지시를 받고 쓰카하라의 행적을 조사하던 구사나기와 우쓰미는 유가와가 사건 현장인 하리가우라에 있음을 알곤 깜짝 놀랍니다.

 


갈릴레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인 한여름의 방정식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기존 작품들과는 다른 전개를 선보입니다. 하나는 매번 마지못해 수사를 돕곤 했던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가 경시청 형사 구사나기보다 먼저 사건에 개입한다는 점,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이 뒤틀릴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조사에 나선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유가와와 구사나기가 서로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각자 조사를 벌이며 협력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한 전직 형사의 의문의 죽음이라는 비교적 소소한 규모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서사 자체를 굉장히 커보이게 만드는 특별한 설정인데, 유가와가 사건 현장인 하리가우라에서 트릭과 진범을 찾아내는 반면, 구사나기는 도쿄에서 피살자의 행적을 추적하며 유가와와 정보를 주고받는 입체적인 구도를 지녔다는 뜻입니다.

 

초반부만 해도 환경보호와 과학의 역할이라는 다분히 계몽적인 이과 미스터리처럼 보였지만, 한 전직 형사의 의문의 죽음이 벌어지고 본의 아니게 유가와가 사건에 휘말리면서 갈릴레오 시리즈특유의 정통 미스터리 서사가 발동됩니다. 피살된 전직 형사가 아무 연고도 없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온 이유도, 일산화탄소 중독과 사체 유기라는 복잡한 행위를 저지른 범인의 의도도 알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수사본부가 난항을 거듭하는 사이 유가와와 구사나기는 원거리 협력수사를 통해 하나둘씩 단서를 모아갑니다. 그리고 단지 우연처럼 보였던 몇 가지 사실이 실은 과거 속 한 사건이 잉태시킨 필연임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전개됩니다.

 

단편집인 탐정 갈릴레오’, ‘예지몽’, ‘갈릴레오의 고뇌가 짧은 분량 안에 기발한 이과 미스터리를 담았다면, 장편인 용의자 X의 헌신’, ‘성녀의 구제’, ‘한여름의 방정식은 끔찍한 살인사건 이면에 숨어있는 안타깝고 애틋한 비극, 즉 독자로 하여금 절대 이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간절함을 유발시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다룹니다. 재미있는 건 진실 찾기의 주인공인 유가와 역시 똑같은 인간적 딜레마를 겪는다는 점입니다. 사건 당사자 혹은 경찰에게 자신이 찾아낸 진실과 진범의 정체를 알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뒤에 벌어질 후폭풍과 더 큰 비극 때문에 주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특히 한여름의 방정식은 유가와의 딜레마가 가장 극명하게 묘사된 작품인데, 비록 겉으론 냉정함과 차분함을 유지하는 듯 보여도 실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만 자신을 원망하는 듯한 뜻밖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곤 합니다. 유가와의 이런 모습에 관한 한 한여름의 방정식은 시리즈 최고의 작품이자 미스터리 명품으로 손꼽히는 용의자 X의 헌신에 버금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워낙 복잡하게 설계돼서 내용에 관해선 별로 언급하지 못했는데, 초반부터 변곡점들이 연이어 등장하다 보니 그중 하나만 공개해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나름 조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엔 꽤 중요한 변곡점이 노출돼있는데, 가급적이면 아무 정보 없이 본편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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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집 2 - 11개의 평면도 우케쓰 이상한 시리즈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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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 작가 우케쓰가 주택 평면도를 통해 그 집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담은 이상한 집을 출간한 지 2. 그 사이 우케쓰는 전국에 산재하는 이상한 집에 관한 수많은 제보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왠지 접점이 있어 보이는 11개의 집과 평면도를 추려냈고, 인터뷰를 통해 그곳에 얽힌 사연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렇게 정리한 자료를 갖고 찾아간 사람은 미스터리 마니아이자 건축설계사인 구리하라. ‘이상한 집때와 마찬가지로 구리하라는 11개의 자료를 검토한 뒤 충격적인 추리를 펼쳐 보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자료들이 서로 무관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의 깊게 읽으면 한 가지 접점이 떠오를 것이다. 꼭 추리하면서 읽어 보기 바란다.” (p7)

 

평면도를 통해 이상한 공간을 찾아내고, 그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리하여 끝내 끔찍한 진실을 파악해내는 기묘한 미스터리 이상한 집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이번에 우케쓰와 구리하라 콤비 앞에 던져진 평면도는 모두 11장입니다. 시대적 배경은 1938년부터 2023년에 걸쳐 있고, 장소 역시 여러 곳으로 분산돼있지만 작가의 오프닝 멘트대로 11개의 평면도는 한 가지 접점을 품고 있습니다. 우케쓰와 구리하라 콤비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거나 관련 있더라도 느슨한 수준일 뿐인 11개의 평면도를 통해 수많은 사람과 공간이 오랜 시간에 걸쳐 비극적으로 얽혀든 하나의 진상을 파악해냅니다.

 

작가는 주의 깊게 읽으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실은 일부 자료들 사이의 접점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다만 11개의 자료를 하나로 엮는 결정적인 접점은 후반부에야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중반부쯤 이 접점을 눈치 챌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감춰놓은 큰 그림의 전체 모습까지 파악하긴 쉽지 않습니다.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막다른 복도, 상식적이지 않은 설계로 지어진 수많은 복제 주택, 움직이는 벽, 살인을 위해 설계된 집, 기이한 구조로 지어진 컬트 교단의 성지, 딱 한 번 나타났다가 사라진 방 등 이상한 집 2’에는 전편보다 더욱 난해하고 기괴한 공간들이 등장합니다. 그 공간들은 하나같이 섬뜩한 사연들을 품고 있는데, 단순 변사에서부터 살인, 방화, 자살 등 여러 형태의 죽음과 함께 가족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갖가지 비극이 하나둘씩 공개됩니다. 우케쓰와 구리하라 콤비는 각각의 공간과 사연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다른 자료 속 공간과 사연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번득이는 추리를 담아 설명합니다.

 

우케쓰가 오컬트 작가 특유의 감으로 조사를 벌여 사연들을 정리하고, 건축설계사 구리하라가 그 자료들과 평면도를 바탕으로 복잡한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구도인데, 재미있는 건 이들의 진실 찾기가 초반에는 막연한 추측과 망상으로 시작되지만 이상한 집과 이상한 평면도에 연루된 인물들의 진술을 통해 하나둘씩 사실로 드러나는 형태로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전편의 경우 초반의 추측과 망상이 다소 과격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던 게 사실인데, ‘이상한 집 2’는 추측과 망상 모두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 그럴 듯하게 읽혀서 이야기 시작과 함께 단번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구리하라가 홀로 폭주하듯 미스터리를 밝혀냈던 전편과 달리 이번엔 구리하라의 결론에 위화감을 느낀 우케쓰가 반전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맡아서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11개의 평면도가 단서로 던져지고 거기에 얽힌 등장인물도 엄청 많아서 막판에 접점이 밝혀지는 대목을 읽을 땐 다소 머리가 어지러울 수 있습니다. 좀 번거롭긴 해도 각 평면도의 특징과 등장인물의 이름이라도 메모하면서 읽는다면 두통도 예방할 수 있고 진실이 밝혀지는 후반부의 짜릿함도 훨씬 더 진하게 만끽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이 복잡한 이야기를 자아낸 작가의 두뇌와 필력에 여러 번 놀라곤 했는데, 그래선지 과연 이상한 집 3’가 나올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면서도, 몇 년이 걸려도 좋으니 한번쯤 더 이 독특한 평면도 미스터리를 맛보고 싶다는 욕심도 품게 됐습니다.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이상한 그림도 무척 궁금해졌는데, 일단은 이 작품의 여운을 좀더 즐겨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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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의 고뇌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5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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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물리학자 유가와 마나부가 이끄는 이과 미스터리 갈릴레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인 갈릴레오의 고뇌는 전작인 용의자 X의 헌신성녀의 구제와 달리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작품집입니다. 시리즈 1~2편인 탐정 갈릴레오예지몽의 형식으로 다시 돌아간 건데, 단편 특유의 맛과 매력을 만끽할 수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장편을 기대했던 터라 처음 이 작품을 읽었던 무렵에도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 여자의 추락사가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놓고 벌이는 미스터리(떨어지다), 저택 별채에서 일어난 의문의 폭발과 화재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조준하다), 대학 동창이 운영하는 펜션에 초대받은 유가와가 한 남자의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는 밀실 트릭 미스터리(잠그다), 다우징(dowsing, 도구를 사용하여 지하수나 광맥을 찾는 일종의 점복占卜)을 할 줄 아는 소녀가 노파 살인사건의 진상을 찾아가는 이야기(가리키다), 한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유가와에게 복수하기 위해 희대의 살인사건을 일으키는 이야기(교란하다) 등이 실려 있는데, 절반쯤이 유가와 특유의 이과 미스터리라면, 절반쯤은 천재 물리학자가 아니라 셜록 홈즈처럼 활약하는 정통 미스터리라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수록작은 용의자 X의 헌신의 감동과 여운을 느끼게 만든 조준하다인데, 그 누구도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범행수법이 정교했던 것은 물론 거듭된 반전을 통해 밝혀진 범인의 진짜 동기는 유가와는 물론 독자의 눈가까지 뜨끈하게 만들어서 용의자 X의 헌신의 마지막 장면에서 느꼈던 울컥함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유가와를 노린 한 남자의 복수극을 그린 교란하다는 미스터리 자체는 고만고만했지만 연쇄살인범의 타깃이 유가와라는 점 때문에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갈릴레오의 고뇌의 가장 큰 특징은 세 번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여형사 우쓰미 가오루의 맹활약입니다. ‘성녀의 구제에서도 독특한 캐릭터를 선보였던 우쓰미는 이번 작품에선 선배이자 서열 2인 구사나기 슌페이를 따돌리고 유가와와 콤비에 가까운 비중과 역할을 맡았습니다. “여자라면 대개는 알고 있을 겁니다.”, “여자란 그런 동물이거든요.”, “그런 반지를 제 손으로 사는 여자는 없어요.”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투척하면서도 정작 여자라고 해서 특별 취급받는 건 누구보다 싫어하는 우쓰미는 뛰어난 직감과 관찰력을 지녔으면서도 과도한 상상과 고집 때문에 늘 구사나기에게 꾸중을 들어왔지만, 이번 작품에선 수시로 구사나기를 코너로 몰아붙이며 자신의 장점과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유가와에게도 재능을 인정받은 우쓰미가 이후 작품에서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거침없이 폭주하는 그녀의 매력 때문에 이 뒤로 이어지는 작품들에 대해 더 큰 기대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시리즈 3편인 용의자 X의 헌신이 최고의 평가를 받으며 정점을 찍은 탓에 그 앞뒤로 나온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손해(?)를 본 건 아이러니한 사실입니다. ‘갈릴레오의 고뇌역시 이과 미스터리의 미덕과 단편의 매력을 겸비하고 있긴 하지만, 두어 작품을 제외하곤 기대에 살짝 못 미친 게 사실입니다. 럭비공처럼 통통 튀며 종횡무진 수사를 펼치는 우쓰미 가오루가 없었다면 아쉬움이 훨씬 더 컸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희미한 기억에 따르면 후속작인 시리즈 6한여름의 방정식은 꽤 흥미롭게 읽은 장편인 듯한데, 부디 저의 그 희미한 기억에 오류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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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돌아오다
사쿠라다 도모야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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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모도(@knitting79books) 서평단 자격으로 내친구의서재(@mytomobook)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매미 돌아오다는 자칭 곤충 애호가이자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거듭 아마추어 탐정 역할을 떠맡곤 하는 30대 남자 에리사와 센이 주인공인 미스터리 연작단편집입니다. 2017년 일본에서 출간된 서치라이트와 유인등’(サーチライトと誘蛾灯)에 이은 에리사와 센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데,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과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한 덕분에 시리즈 첫 편보다 먼저 소개된 것 같습니다.

곤충 애호가라는 주인공 캐릭터에 걸맞게 다섯 편의 수록작 모두 제목에 매미, 거미, 딱정벌레, 반딧불이, 파리 등 곤충이 들어가 있는데, 실제로 각 곤충은 미스터리의 핵심이자 해결의 열쇠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가볍고 코믹한 곤충 미스터리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16년 전 대지진 자원봉사 활동 당시 작은 마을의 신사에서 목격한 소녀 유령의 정체를 다룬 매미 돌아오다’, 교차로에서 일어난 여중생의 교통사고와 아파트에서 벌어진 주부 상해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염낭거미’, 펜션에서 만난 한 외국인과의 짧고 애틋한 인연을 그린 저 너머의 딱정벌레’, 한 과학잡지 편집자가 5년 전 소식이 끊긴 곤충 작가의 행방을 쫓다가 뜻밖의 사건과 마주치는 이야기를 그린 반딧불이 계획’, 아프리카에서 NGO 활동을 하던 의사가 치명적인 감염병에 맞서 싸우는 격렬하고도 가슴 아픈 사연을 다룬 서브사하라의 파리등 모두 다섯 편이 수록돼 있습니다.

 


왓더닛(What done it)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그 답을 확인할 수 있다” -노리즈키 린타로

 

매미 돌아오다의 가장 큰 특징은 누가?”(후더닛), “?”(와이더닛), “어떻게?”(하우더닛)라는 일반적인 미스터리 서사와 달리 무엇에 방점을 찍은 작품이란 점입니다. 후반부에 실린 노리즈키 린타로의 해설을 인용하자면, ‘왓더닛 미스터리’, 즉 수수께끼 자체를 찾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구조를 품고 있습니다.

수록작 가운데 중반부까지도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또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 대목에서 에리사와 센의 특별한 능력이 발휘됩니다. 그는 스쳐 지나간 말 한마디, 무심히 던진 시선,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흔적을 통해 숨겨진 미스터리를 발견하곤 자신만의 추리를 펼쳐 끝내 진상에 도달합니다. 말하자면 그의 첫 미션은 미스터리 자체를 발견하는 거란 뜻입니다. 후더닛과 와이더닛과 하우더닛에 익숙한 독자에겐 다소 생경한 책읽기가 될 수도 있는데, 거듭 페이지를 넘기며 에리사와 센의 사고와 추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왓더닛이 얼마나 매력적인 장르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첫 두 편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표제작인 매미 돌아오다는 호러와 미스터리와 사회파 서사의 콜라보에다 기막힌 반전과 함께 밀려드는 진한 감동까지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염낭거미의 경우, 에리사와 센은 행인1’ 수준의 작은 비중과 역할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사건의 전말을 꿰뚫어 보는데, 덕분에 이런 탐정도 있을 수 있구나!”라는 독특한 느낌을 맛볼 수 있습니다. (나머지 수록작도 모두 흥미로운데, 스타일이 모두 달라서 독자마다 선호하는 수록작이 제각각일 것 같습니다)

 

제목과 표지에서 연상할 수 있듯 매미 돌아오다는 자극적인 설정도 없고 뛰어난 명탐정도 없는 착하고 순한 미스터리입니다. 물론 사건과 사고로 인해 잔혹하거나 안타까운 장면들이 펼쳐지기도 하고, 부당한 관습, 외국인 혐오, 자연 파괴와 유전자 조작, 선진국이 외면한 질병 등 사회파 소재를 통해 날선 비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여지없이 휴먼 드라마의 따뜻함과 뭉클함을 품은 엔딩을 선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물건입니다. 아니 정말 좋은 (추리)소설입니다.”라는 출판사 인스타그램의 한마디는 이 작품의 미덕을 잘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착하고 순한 미스터리 쪽 취향이 아니더라도 에리사와 센이 펼치는 왓더닛 미스터리가 궁금한 독자라면 매미 돌아오다에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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