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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없는 것 ㅣ 하영 연대기 3
서미애 지음 / 엘릭시르 / 2025년 7월
평점 :
20살이 되자 한국을 떠나 나유진이라는 이름으로 뉴욕에 정착한 하영은 생활고에 시달리던 중 한국의 재벌가 미술관장인 한지윤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습니다. 자신의 딸 세나와 친구가 된 뒤 곁에서 지켜봐주기만 하면 맨해튼의 아파트와 고액의 보수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하영은 세나가 자신과 닮은꼴의 괴물임을, 그리고 한지윤의 제안은 단순히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심정에서가 아니라 일종의 감시가 목적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세나 주위에서 끔찍한 살인이 벌어지자 하영은 자신의 과거와 다시 마주치기가 두려워 종적을 감추지만, 3년 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세나와 재회합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두 사람의 주위에 다시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본능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는 11살의 맹아기 소시오패스(‘잘 자요, 엄마’)를 거쳐 살인을 부추기는 내면의 목소리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갈등하는 16살의 성장기 소시오패스(‘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였던 하영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하영 연대기 3부작’의 마지막 작품에서 그녀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있을지 궁금증을 참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론 시리즈 2편인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의 서평 말미에 “‘완성된 소시오패스’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라고 썼지만, 마음 한쪽에선 정반대의 모습, 즉 과거를 끊어낸 채 어떻게든 평범하게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반전을 떠올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건 “연쇄살인범은 타고 나는가, 만들어지는가?”라는 정답 없는 의문에 대해 전작들에서 서미애가 보였던 관점 때문입니다. 즉 “서른 넘어 갑자기 살인마가 되는 경우는 없다.”라는 대사를 쓴 점이라든가 지금까지 시리즈에 등장한 소시오패스들이 대부분 ‘엄마의 학대’라는 외적 요인에 영향을 받은 점을 감안하면 서미애가 하영에게 ‘완성된 소시오패스’라는 외길 운명 대신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여지를 남기지 않을까, 라는 추론도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떠나 뉴욕에 정착한 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하영의 초반부 모습은 꽤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영이 자신의 데칼코마니 같은 20살의 괴물 세나를 만나 또다시 과거로 끌려들어가고,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죽음의 그림자에 연이어 휩싸이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쯤 ‘하영 연대기’의 진짜 매력을 만끽할 수 있게 됩니다.
“언니도 날 알아본 거야. 말하지 않아도 언니는 알고 있었어. 내가 어떤 그림자를 감추고 있는지, 때론 어떤 충동이 나를 휩쓸고 지나가는지.” (p109)
“너는 거울 건너편에 서 있는 나야.” (p298)
자신의 과거와 살인을 부추기는 내면의 목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뉴욕의 익명성 속에 몸을 감췄지만, 자신과 꼭 닮은 세나와 엮이면서 하영의 삶은 또다시 바닥없는 심연에 빠집니다. 어떻게든 거기에서 도망치려 해보지만 운명은 하영을 세나와 한 세트로 묶어버립니다. 그 덕분에 자신의 ‘살인 서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두 편의 전작과 달리 하영은 이번엔 관찰자 또는 방관자로 시작했다가 결국 자신과 세나를 바닥없는 심연에서 이끌어내는 세컨드 주인공으로서 활약하게 됩니다. ‘폭주하는 소시오패스 하영’의 모습을 기대했던 독자에겐 다소 아쉽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시리즈 마지막 편의 미덕을 잘 살린 매력적인 설정이란 생각입니다. (물론 여기저기에 하영의 진면목을 목격할 수 있는 장면들이 꽤 실려 있습니다)
사실 두 편의 전작을 읽지 않았다면 ‘나에게 없는 것’의 진가를 100% 만끽하긴 어렵습니다. 유년기에 첫 살인을 저지른 하영이 어떻게 소시오패스로 진화했는지, 사춘기를 거치는 동안 소시오패스로서 어떤 갈등과 고민에 빠졌었는지를 모른 채 이 작품을 읽는다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하영 연대기 3부작’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300페이지 중후반 정도의 분량인 세 작품을 하루 이틀 안에 몰아서 읽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시리즈의 종결은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무척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무모한 바람이긴 하지만 언젠가 ‘하영 외전’ 한 편 정도는 출간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