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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의 유령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4
조예은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6월
평점 :
대학 졸업 후 일본에서 지내던 현운주는 서른 살이 되어 외증조모 박준영이 유산으로 남긴 적산가옥 붉은담장집으로 돌아옵니다. 박준영이 유언장을 통해 “서른 살이 된 해, 1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아야 한다.”라는 조건을 걸고 자신에게 그 집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박준영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현운주는 붉은담장집의 기괴한 사연을 잘 알고 있었기에 썩 내키진 않았지만 1년 후 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할 것을 계획하며 남편 우현민과 함께 붉은담장집에서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첫날부터 현운주는 유령임에 분명한 소년을 발견하곤 기겁합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현운주는 현실에서는 환시와 환청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꿈에선 외증조모 박준영의 시점으로 80년 전 붉은담장집에서 벌어진 참극을 직접 목도하게 됩니다.
“집은 자신의 벽에 깃든 모든 역사를 기억한다. 안에 살던 사람은 죽어도 집은 남는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그 집의 일부로 영원히 귀속된다.” (p10)
작품 속 현운주가 물려받은 붉은담장집의 모델인 군산시 신흥동 히로쓰 가옥을 방문했을 때 저도 모르게 “호러의 무대로 딱 알맞은 공간”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자 일본가옥 특유의 괴괴함을 발산하는 그곳에서 어쩌면 온갖 비극과 참극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며, 패망 후 일본인 집주인이 도망친 뒤엔 곳곳에 한이 서린 폐가가 되어 괴괴함의 농도가 한층 더 짙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불쑥 솟아올랐기 때문입니다. 끔찍하면서도 애틋하기 짝이 없는 호러 스토리인 조예은의 ‘적산가옥의 유령’은 저의 그 상상이 완벽하게 구현된 이야기라 마지막 장까지 남다른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2020년대 붉은담장집을 물려받은 현운주가 유령 소년을 목격하곤 공포에 사로잡혀 나날이 피폐해져가는 이야기와 1940년대 박준영이 붉은담장집에 입주간호사로 들어와 15살 소년 유타카의 치료를 맡으며 겪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됩니다.
현운주의 이야기가 유령소년을 목격한 이후 겪게 된 환청과 환시와 악몽의 연속이라면, 박준영의 이야기는 80년 전 붉은담장집에서 벌어진 참극의 세세한 내용과 함께 후일 현운주 앞에 유령으로 나타나게 될 소년 유타카의 비극적인 일생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대를 건너뛰어 증손녀 현운주에게 붉은담장집을 물려준 건지, 왜 굳이 서른 살이 됐을 때 1년 동안 이 집에 머물라는 유언장을 남긴 건지, 또 왜 유타카의 유령이 현운주 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담담하게 서술합니다.
20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마치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스티븐 킹의 호러물을 읽은 듯한 느낌입니다. 몇 안 되는 등장인물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호러 코드와 미스터리 서사가 빈틈없이 직조된 데다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이 잇따라 벌어지기 때문에 체감되는 이야기의 밀도와 농도가 그만큼 높고 진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스티븐 킹의 ‘샤이닝’에 등장하는 호텔 오버룩을 연상시키는 적산가옥 붉은담장집의 매력 역시 ‘분량 대비 고밀도’의 이유 중 하나인데, 박준영과 현운주가 80년의 시차를 두고 겪는 서로 다른 색깔의 공포도 흥미롭지만 호러의 원천이자 살아 숨 쉬는 괴물과도 같은 붉은담장집이 내뿜는 기괴함은 주인공들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80년의 간극을 둔 괴담과 공포와 유령의 이야기는 막판에 이르러 ‘현실의 사건’과 접점을 갖게 됩니다. 환청과 환시와 악몽에 시달리던 현운주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과 함께 여러 가지 미스터리도 밝혀집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호러 코드가 깔끔하게 ‘현실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호러는 호러대로,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대로 나름의 여운을 남기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색깔은 전혀 다르지만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조예은은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직접 읽은 작품이라곤 앤솔로지 ‘도시, 청년, 호러’에 수록된 단편 ‘보증금 돌려받기’밖에 없었습니다. 제목에 이끌려 읽은 ‘적산가옥의 유령’ 덕분에 그녀의 진가를 만끽하게 됐는데, 전부는 아니더라도 낯익은 제목의 작품들만이라도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오직 호러만이 죽은 자가 죽은 입으로 자신의 소리를 낸다. (실체 없는 유령들은) 육체가 사라졌어도 집요하게 남아 말을 건다. 나는 그 지독함과 애달픔이 좋다.”라는 ‘작가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보면 나름 이 작품의 스포일러라 할 만한 내용들이 꽤 많이 공개돼있습니다. 막판에 밝혀지는 결정적인 반전까지 담겨 있어서 “이래도 되나?”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