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번째 밀실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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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의 신진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밀실 미스터리의 거장 마카베 세이치가 매년 자신의 별장에서 개최하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동갑 친구인 범죄사회학 교수 히무라 히데오를 데려갑니다. 추리소설가, 편집자, 가족 등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 열린 파티는 사소한 충돌과 뜻밖의 발표 등 몇몇 해프닝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별일 없이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아침, 마카베 세이치는 자신이 평생을 바쳤던 밀실 트릭의 희생자가 돼버립니다.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완벽한 밀실에서 벽난로에 상반신을 집어넣은 채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현경까지 출동한 상황에서 히무라와 아리스는 밀실 트릭을 깨고 진범을 특정하려 하지만 예상외의 난관들이 등장하면서 오리무중에 빠지고 맙니다.

 

2020년에 읽은 자물쇠 잠긴 남자이후 4년 만에 다시 만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입니다. ‘자물쇠 잠긴 남자는 일본에서 2015년에 발표된 이 시리즈의 27(자선단편집을 제외하면 24)인데, ‘46번째 밀실은 그로부터 무려 23년 전인 1992년에 발표된 시리즈 첫 편입니다.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한 책들을 구하는 게 올해 독서목표 중 하나인데, ‘46번째 밀실4년 만에 읽게 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인데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첫 편이라 나름 의미 있는 구하기가 될 것으로 기대됐습니다.

 

다소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범죄사회학 교수 히무라 히데오가 셜록 홈즈를 닮았다면, 아직 신진 작가의 티를 못 벗은 털털한 성격의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왓슨의 캐릭터와 닮은 인물입니다. 히무라의 경우 이미 경찰의 사건 수사에 여러 번 협력했을 정도로 현장에 익숙하지만 아리스는 이번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실제살인사건과 마주칩니다. 히무라가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독자에게 절대 공개하지 않는 불친절한 명탐정 스타일이라면, 아리스는 자신이 알아내고 추리한 것을 일일이 독자와 히무라에게 설파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재미있는 건 아리스의 이런 역할이 실은 독자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란 점입니다. 즉 아리스의 말만 듣고 따라가다가는 작가의 의도대로 엉뚱한 곳에 헤매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래도 시리즈 첫 편이다 보니 두 주인공에 대한 소개가 여러 번 언급되는데, 꽤 흥미로운 조합이라 그런 대목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밀실 미스터리의 대가가 더 이상 밀실 미스터리를 쓰지 않겠다.”라고 선언한 직후 완벽한 밀실에서 살해당한 사건, 굳이 밀실이 필요하지 않았는데도 범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시간과 공을 들여 애써 밀실을 만든 이유, 일반인에게는 쉽지 않은 밀실 트릭을 구사할 수 있기에 용의선상에 오른 여러 명의 추리소설가와 편집자 등 초반부터 독자의 눈길을 끄는 설정이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거기에다 별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미묘하게 갈등을 벌이거나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는 등 예상치 못한 관계를 보여주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그런 관계들이 살인사건과 어떻게 이어질지 무척 궁금하게 만듭니다.

 

다만 이야기의 규모나 미스터리의 심도로 볼 때 중편 정도에 어울린다는 인상이 강해서인지 마지막에 히무라와 아리스가 진실을 밝히는 대목에서 큰 반전이나 충격을 맛보기 어려운 점이 아쉬웠습니다. 페이지는 금세 휙휙 넘어가지만 거듭 뒤바뀌는 용의자라든가 별장의 사람들을 더욱 큰 공포로 몰아넣는 사건이라든가 소소하더라도 연이어 일어나는 반전 등 독자를 유인하는 장치들이 부족해보인 게 사실입니다. 범행수법은 밀실 트릭의 맛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줬지만 히무라와 아리스가 범인을 특정하게 된 결정적인 단서는 너무 단순해보였고 범인의 동기 역시 기대했던 것보다는 약했습니다. 좀더 세고 독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탓에 아쉬움이 더 컸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4년 전 자물쇠 잠긴 남자에게 야박한 평점을 주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저와는 잘 안 맞는 작가라고 단언했던 걸 보면 이 아쉬움은 이미 예정됐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아직 제 책장에 방치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으로 작가 아리스 시리즈’ 8편인 주홍색 연구학생 아리스 시리즈’ 3편인 쌍두의 악마가 있습니다. 저와 잘 안 맞긴 해도 언젠가는 두 편 모두 꼭 읽을 생각입니다. 바람이라면 한 편이라도 제 취향을 만족시켜 줄 수 있었으면 하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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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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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아일랜드 시골의 어린 소녀인 는 여름방학을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미 여러 자식을 둔 엄마가 또 다른 아기를 출산할 때까지 좀더 편히 지내도록 맡겨진것이지만, 실은 이리저리 손이 가는데다 없는 살림에 밥만 축내는 는 부모에 의해 떠맡겨진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지만 킨셀라 부부와 함께 보낸 짧은 여름은 에게는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줬습니다.

 

자극적인 장르물 편식이 지독한 제가 순수문학, 그것도 아일랜드의 한 소녀가 겪은 특별한 여름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인터넷서점과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출판사의 뛰어난 마케팅과 여러 매체 및 작가들의 찬사이고, 또 하나는 본 내용이 100페이지도 채 안 되기에 그 수많은 찬사의 정체가 뭔지 금세 알 수 있겠다는, 또 여차하면 바로 접을 수 있겠다는 그리 건전치 못한 호기심입니다.

 

10살도 채 안 된 소녀의 인생은 킨셀라 부부의 집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을 기준으로 전혀 다른 색깔을 띠게 됩니다. 이전의 인생이 가난과 무관심과 냉대의 잿빛이었다면 이후의 인생은 아주 천천히 밝고 따뜻한 색으로 충만해집니다. 처음엔 낯설고 두려운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지만, 소녀는 날이 바뀔 때마다 자기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가 얼마나 따뜻하고 아늑한지 천천히,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삶의 지혜를 하나둘씩 체득하는 것은 물론 타인의 상처와 상실에 공감하는 법도 자연스럽게 익힙니다. 표지 뒷면에 실린 사랑과 다정함조차 아플 때가 있다. 태어나 그것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에게는.”이라는 문구는 킨셀라 부부 집에 살게 된 소녀의 첫 불안감과 함께 소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잘 압축한 카피입니다. 킨셀라 부부와 함께 한 짧은 여름 동안 훌쩍 성장한 소녀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만 이제 그녀 앞에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새로운 전율’, ‘완벽한 정수’, ‘순수한 결정체를 연상시키는 문장등 이 작품에 쏟아진 찬사에 모두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진짜 보석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저의 부족함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다소 과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든 한번쯤 읽어보라고 자신 있게 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그건 딱히 뭐라고 정의하긴 힘들지만 이 작품이 발산하는 특별한 에너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긍정, 힐링, 계몽 같은 건 아니고, 뭐랄까... 소녀의 여름은 두 번째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를 것 같고, 세 번째 읽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을 받을 것 같은, 그런 특별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고 간결한 이야기지만 암시와 여백과 행간을 중요하게 여긴 작가의 의도 덕분인지 늘 곁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고 싶다고 할까요?

 

소녀의 여름을 지켜본 모든 독자의 바람은 비슷할 것입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소녀가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따뜻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그래서 킨셀라 부부처럼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사랑과 배려를 전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듯 킨셀라 부부와 함께 보낸 그 여름이 소녀의 삶에 행이 될지 불행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그런 근거 없는 불안감이 불쑥 솟아났는데, 어쩌면 이런 해석조차도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말없는 소녀를 보려고 합니다. 담담함 그 자체인 원작에 충실했으면 좋겠다는, 그러니까 너무 영화적인 감동을 강요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관객들로부터 좋은 평을 들었다는 소문이 맞다면 나름 기대를 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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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살인사건
애슐리 칼라지언 블런트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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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때 메신저로 알게 된 남자에게 지독한 스토킹을 당했던 탓에 26살이 된 지금도 스마트폰 없이 살고 있는 레이건 카슨은 어렵게 꾸려가고 있는 꽃집에서 은둔자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두 동강이 난 여자의 시신을 발견한 그날 아침 이후로 레이건의 삶은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레이건을 더욱 충격에 빠뜨린 건 살해당한 여자가 자신과 쌍둥이마냥 닮았다는 점.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비밀스런 사연 때문에 시신을 발견하고도 경찰에 알리지 못한 레이건은 5년 전부터 종적을 감춘 스토커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하며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실제로 그날부터 스토커가 과거에 했던 짓과 똑같은 흔적들이 발견되기 시작했고 자신을 꼭 닮은 두 번째 시신까지 나타나자 레이건은 패닉에 빠지고 맙니다.

 

도플갱어 살인사건2017년의 호주 시드니를 무대로 SNS, 다크웹, 스토킹, 여성혐오, 연쇄 토막살인 등 다양한 소재를 흥미롭게 버무린 살인미스터리이자 심리스릴러입니다. 심리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 상 중간에 살짝 동어반복의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사건 자체도 특이한데다 누가 범인인지, 목적이나 동기가 무엇인지 좀처럼 가늠하기 쉽지 않아 심리스릴러에 거부감이 있는 독자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10대 시절 불장난처럼 시작한 메신저 때문에 스토킹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던 레이건은 지금도 늘 주변을 경계하며 사람 만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인물입니다. 한국계 호주인이자 범죄전문기자인 민 외에는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런 레이건이 한꺼번에 두 개의 사건 하나는 과거 스토커가 했던 짓과 똑같은 일들이 5년 만에 다시 반복되기 시작한 일이고, 또 하나는 자신과 꼭 닮은, 그것도 끔찍하게 훼손된 시신을 하필이면 자신이 발견한 일 - 에 휘말리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경찰에 알리는 것이 상식이지만 레이건은 과거의 악몽 때문에 경찰과 엮이기를 결단코 거부합니다. 하지만 동일범에게 살해당한 자신과 꼭 닮은 시신들이 연이어 발견되고 정체불명의 인물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이메일까지 받게 되자 레이건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되고 맙니다.

 

레이건의 입장에서는 등장인물 중 누가 범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수상해 보입니다. 스토커와 살인범이 동일인 같기도 하고, 두 명의 범인이 함께 모의하여 레이건을 공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연관 없는 두 명의 범인이 우연히도 동시에 레이건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경찰에게마저 선을 그어버린 탓에 레이건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맥없이 공포를 견디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대목이 심리스릴러의 몫인데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긴 해도 레이건의 공포가 워낙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무척 흥미진진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경찰도 등장하고 범죄전문기자인 민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하긴 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단서를 붙잡는 건 레이건 본인입니다. 문제는 그 단서 자체가 스토킹이나 살인사건의 진실로 바로 이끌어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 장면 뒤로 100여 페이지의 긴 분량이 남아있다는 점, 그래서 레이건의 혼란과 공포가 더욱 극심해진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엽기적인 방식으로 여성을 살해하며 레이건을 위협하는 범인이 70년 전에 벌어진(하지만 지금도 미제상태로 남아있는) ‘블랙 달리아 사건을 모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947년 미국 L.A에서 벌어진 엘리자베스 쇼트 살인사건은 영화와 소설로 제작될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는데, 범인은 허리를 경계로 피해자를 두 동강 낸 것은 물론 가슴까지 끔찍하게 훼손했으면서도 현장에 피 한 방울 남기지 않아 경찰의 수사를 막다른 벽에 부딪히게 만들었습니다. 레이건은 현재 호주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물론 70년 전 블랙 달리아 사건의 피해자마저 자신과 꼭 닮았다는 사실에 더욱 극렬한 공포를 느끼는데, 그 때문에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미스터리에 대한 궁금증을 놓을 수 없게 됩니다.

 

처음 만나 작가인데다 살짝 고전의 냄새도 풍겼고 심리스릴러에 대한 선입관까지 가세한 탓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작품인데 의외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미스터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고 일부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여러 개의 사건이 긴장감을 적절하게 유지시켰고 소소한 반전들도 매력적으로 읽힌 작품입니다. 작가의 이력을 보니 다른 미스터리나 스릴러 작품은 없는 듯 한데 나중에라도 신작 소식이 들리면 꼭 찾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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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임수의 섬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김은모 옮김 / 북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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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토 내해에 자리 잡은 기이한 모양의 비탈섬.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인 어느 날, 유명 출판사 사이다이지 대표의 유언장 공개를 위해 가족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모여듭니다. 그중에는 유언장 공개를 맡은 변호사 야노 사야카, 20여 년간 연락이 끊겼던 고인의 조카를 찾아내 데려온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도 포함돼있습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유언장 공개가 마무리된 그날 밤, 저택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태풍으로 인해 밀실이 돼버린데다 새벽에 빨간 도깨비 얼굴을 한 남자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는 한 목격자의 진술까지 더해지자 섬에 갇힌 가족과 방문객들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진실 찾기에 나선 변호사 사야카와 탐정 다카오는 뭔가를 감추는 듯한 사이다이지 가문 사람들의 태도에 더 큰 의혹을 품습니다.

 

지금까지 19편이나 되는 작품이 한국에 소개된 히가시가와 도쿠야지만 속임수의 섬으로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읽진 않았어도 일부 작품은 제목을 외울 정도로 낯익은 작가지만 유머 미스터리 소설의 1인자라는 타이틀 때문에 제 취향과 거리가 너무 멀어 보여 읽을 생각조차 안 했던 탓입니다. 하지만 속임수의 섬은 유머보다는 밀실 트릭과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가 더 강하게 느껴져서 처음으로 그의 작품에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인 비탈섬은 표지에서 한눈에 느낄 수 있듯이 모양새 자체만으로 불길함을 내뿜는 절해고도입니다. 날씨가 좋을 때도 쉽게 접안하기 어렵게 만드는 암초들로 둘러 쌓여있고, 섬 꼭대기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단애절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기이한 섬에 지어진 자 모양의 저택은 구조나 설계가 워낙 특이해서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게 놀라움 이상의 감정을 품게 만듭니다. 굳이 이 섬의 저택에서 자신의 유언장을 공개하라는 고인의 뜻도, 또 직계도 아닌데다 20년 넘게 소식을 끊었던 조카를 탐정을 통해 찾아내 섬에 데려오라고 한 고인의 속셈도 이 섬과 저택의 생김새처럼 불길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때맞춰 섬을 덮친 두 개의 태풍이 요동치는 밤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仕掛島’(사괘도)입니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仕掛특수하게 고안된 장치또는 속임수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속임수의 섬이라는 번역제목은 언뜻 타인을 속이겠다는 인간의 의지나 속셈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읽은 뒤 원제의 의미를 되짚어보면 실은 이 섬 곳곳에 갖가지 특수하게 고안된 장치가 존재한다는 점을 예고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변호사 사야카와 탐정 다카오는 지난한 추리와 탐색 끝에 비탈섬과 저택에 감춰진 의외의 장치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속임수의 섬2022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아야츠지 유키토와 시마다 소지가 맹활약했던 80년대의 신본격 미스터리를 연상시키는 기발한 트릭과 추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유머 미스터리는 역시나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몇 번쯤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상황에 맞지 않는 억지 유머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밀실이 돼버린 섬을 배경으로 한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만큼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물론 신본격의 작품들에서 느끼곤 했던 위화감 가득한 작위적인 트릭이 종종 목격되기도 했지만, “도대체 이런 설계를 하려면 얼마나 특이한 뇌구조를 지녀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거기다가 몇 겹의 포장을 덧댄 트릭과 미스터리가 빈틈없이 전개돼서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두 주인공 사야카와 다카오의 조사는 현재 벌어진 사건뿐 아니라 23년 전 비탈섬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에까지 다다르는데 두 사건의 연관성은 물론 그동안 은폐됐던 진실들까지 파헤치는 과정에서 히가시가와 도쿠야가 완성한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설계도가 거듭 빛을 발하곤 합니다. 덕분에 작위적인 트릭의 위화감 같은 건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었고, 마지막 장에 이를 때까지 미스터리 자체와 비극적인 서사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속임수의 섬은 한국에서 2011년에 출간된 저택섬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정 다카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경찰과 탐정으로 저택섬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유머 미스터리는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속임수의 섬에서 만끽한 매력 때문에 언젠가 저택섬에 한 번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혹시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의 유머 미스터리 대표작인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시리즈에도 눈길이 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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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주술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혜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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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틀랜드의 숲에서 여자들의 시신이 연이어 발견됩니다. 죽기 직전 거대한 공포와 직면한 듯 온몸을 오그린 채 비명을 지르는 표정으로 굳어있는 시신의 상태도 놀라웠지만 거미줄로 보이는 하얀 고치에 시신이 싸여있는 점, 또 피와 내장이 몽땅 비워진 점 때문에 수사관계자들은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한때 프틀랜드 경찰이었지만 지금은 사립탐정이 된 조슈아 브롤린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뉴욕에서 날아온 형사 애너벨 오도넬과 함께 포틀랜드 경찰을 도와 수사에 나섭니다. 하지만 그 어떤 연쇄살인마와도 다른 패턴을 보이는 범행수법 탓에 좀처럼 수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더구나 범인이 남긴 거짓증거 때문에 거듭 혼란에 빠지던 브롤린과 애너벨은 급기야 범인으로부터 끔찍한 공격을 받기에 이릅니다.

 

악의 영혼악의 심연에 이은 막심 샤탕의 악의 3부작’(혹은 조슈아 브롤린 시리즈’)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막심 샤탕은 인간의 이 어디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어느 정도까지 그 파괴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주인공 브롤린을 통해 스스로 살인자의 내면 깊숙이 스며들어 그의 관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하고 해결하는 프로파일러의 진면목을 디테일하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시리즈 첫 작품인 악의 영혼에서 최악의 상처를 입은 브롤린은 이후 경찰을 그만두고 실종사건 전문 사립탐정이 되어 많은 사건을 해결해왔지만,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최대한 거부한 채 고독과 절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의 감정을 처음으로 건드린 건 악의 심연에서 만난 뉴욕경찰청의 형사 애너벨이었습니다. 사건 해결 후 5개월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포틀랜드에서 벌어진 거미와 독소를 이용한 끔찍한 연쇄살인에 휘말리면서 다시 한 번 심연과도 같은 시간들을 함께 보내게 됩니다.

 

전작들의 범인들도 그 엽기성과 잔혹함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악의 주술속 범인은 거미와 독소라는 독특한 범행도구는 물론 미라를 연상시키는 끔찍한 시신 처리방식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행태를 보여줍니다. 또 여느 연쇄살인마와 달리 일관성 없는 패턴을 보여 브롤린과 애너벨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는데, 피해자가 단지 여자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살인 외에도 독거미를 이용하여 도시 전체를 공포에 빠지게 만드는 등 도무지 그 동기와 목적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유독 이 작품에서 브롤린과 애너벨은 여러 번 헛발질을 합니다. 범인이 거미 전문가이며 독소를 능숙하게 다룬다는 점 외에 거의 모든 프로파일링이 번번이 빗나가고, 유력한 용의자는 어이없는 방식으로 수사망을 빠져나갑니다. 누구보다 브롤린의 프로파일링을 신뢰하던 애너벨마저 혼란에 빠진 가운데, 범인은 대담하게도 두 사람을 향한 공격에 나섭니다. 그리고 브롤린은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최악의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평범한 스릴러가 아니라 인간의 에 대한 탐구까지 중요한 서사로 다루고 있다 보니 가끔은 지나치게 현학적이거나 난해한 대목들이 등장하곤 합니다. 틈날 때마다 살인자의 내면에 침잠하곤 하는 브롤린은 말할 것도 없고 상식 밖의 악의와 동기를 엽기적인 살해방식으로 구현하는 연쇄살인마들은 수시로 자신만의 세계관과 철학을 토해내곤 하는데, 때론 100% 공감할 때도 있지만 때론 억지로 갖다 붙인 것처럼 혹은 결과론적으로 읽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도가 지나칠 때면 과연 사람의 내면과 심리가 저토록 복잡할까?” “심오하고 철학적인 악의를 품었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를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점이 악의 3부작의 진짜 매력이자 미덕일 수도 있습니다.

 

워낙 이야기가 복잡하고 등장인물도 많아서 구체적인 줄거리를 거의 언급하지 못했는데, 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라 어쩔 수 없었던 탓도 있고 스포일러가 될 대목이 너무 많은 탓도 있습니다. 읽기 전에 조금이라도 정보가 필요한 독자라면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막심 샤탕의 작품은 이후 그림자의 제국’, ‘가이아 이론’, ‘약탈자등이 한국에 소개됐는데, ‘그림자의 제국을 제외하곤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名品再讀이라는 계획에 악의 3부작그림자의 제국만 포함시킨 건 그런 이유 때문인데, 개인적으론 조슈아 브롤린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단 세 편으로 끝난 게 무척 아쉬울 따름입니다. 조만간 다시 읽을 그림자의 제국이 그 아쉬움을 달래주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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