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옷의 어둠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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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직후 기타규슈의 탄광에서 일명 검은 얼굴의 여우라는 기괴한 전설을 모방한 밀실살인사건을 해결했던 모토로이 하야타는 대학 동창 구마가이 신이치의 초대로 도쿄에 온 뒤 또다시 난해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붉은 미로라고 불리는 암시장에서 온몸이 붉은 남자가 여자의 뒤를 미행하는 일이 빈발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를 붉은 옷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치의 과장된 소개 때문에 명탐정으로 불리게 된 하야타는 도리 없이 붉은 미로의 조사에 나서는데, 실제로 그곳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자 하야타는 바짝 긴장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암시장 상인조합장의 가게에서 끔찍한 밀실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그것이 붉은 옷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하야타는 다시 한 번 명탐정 역할을 떠맡게 됩니다.

 

붉은 옷의 어둠은 출간순서로 치면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지만, 작품 속 시간적 배경으로 따지면 시리즈 1편과 2편의 중간에 위치한 일종의 스핀오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리즈 2편인 하얀 마물의 탑에서 하야타가 암시장에서 겪은 사건에 대해 짧게 언급한 적 있는데, 바로 그 사건을 다룬 작품이 붉은 옷의 어둠입니다.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는 패전 직후 혼란에 빠진 일본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적극적이고 비판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패전의 충격, 혼란과 무질서, 가난과 기아, 기득권의 비리, 미군정의 폐해 등 당시의 처참한 상황들이 단순한 배경그림이 아니라 미스터리의 중요한 축으로 설정된다는 뜻입니다. 앞서 출간된 검은 얼굴의 여우하얀 마물의 탑은 그런 토대 위에서도 미쓰다 신조 특유의 호러미스터리 서사가 제대로 빛을 발한 반면, ‘붉은 옷의 어둠은 마치 근현대사를 다룬 논픽션처럼 패전 직후의 상황을 더욱 디테일하게 묘사하여 눈길을 끕니다. 특히 이 작품의 주요무대인 암시장은 실제로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인데, 그래선지 사건은 괴담의 기운이 섞인 밀실살인으로 설정돼있지만 사회파 미스터리 혹은 역사 미스터리로서의 향기도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 동창의 부탁으로 암시장 붉은 미로에 횡행하는 괴담의 진실을 밝히려던 하야타는 암시장 상인조합장의 가게에서 벌어진 밀실살인사건을 조사하게 되지만 좀처럼 단서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붉은 미로의 좁고 복잡한 골목에서 여자들이 연이어 습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 골목들 역시 범인이 도망갈 길이 전혀 없는 완벽한 밀실로 밝혀지자 하야타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집니다. 말 그대로 괴담 속 붉은 옷의 소행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데다, 주위의 그 누구를 의심해 봐도 동기나 범행수법을 추론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즉 불가해한 호러 코드와 전형적인 밀실사건이 조합되면서 이번에도 하야타에게는 난이도 높은 과제가 주어진 셈입니다.

 

미쓰다 신조 특유의 호러미스터리는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앞선 두 작품에 비해 붉은 옷의 어둠은 몇 차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 게 사실입니다. 우선, 초반에 암시장을 비롯한 패전 직후 일본의 상황이 다소 장황하게 설명돼서 그런지 전작들에 비해 시동이 많이 늦게 걸린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론 논픽션에 버금가는 그 내용들이 흥미로웠지만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야타가 붉은 옷괴담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는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지만, 페이지를 꽤 넘긴 뒤에야 첫 살인사건이 등장한 점도 살짝 아쉬웠습니다.

또 한 가지는 사건의 진상과 범인의 정체를 특정하는 클라이맥스와 엔딩에서 다소 무리한 추론과 작위적인 해법이 동원된 점입니다. 복선의 회수과정 중 일부는 수긍하기 어려웠고, 느닷없는 인물이 결정적 조언을 하는 장면이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무리하게 추리하는 장면은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호러미스터리의 특성 상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엔딩이 나올 수는 없겠지만, ‘붉은 옷의 어둠의 엔딩은 왠지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느낌이었습니다.

 

세 편의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가운데 미쓰다 신조의 호러미스터리의 맛을 가장 강렬하게 맛본 건 하얀 마물의 탑입니다. 거친 파도와 짙은 안개와 험준한 지형으로 둘러싸인 고가사키 등대에서 엄청난 충격과 함께 대혼란에 빠진 채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하야타가 다음엔 어느 곳으로 향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 작품에선 하얀 마물의 탑이상의 호러미스터리의 찐맛을 보여주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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