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인형 놀이
마이크 오머 지음, 공보경 옮김 / 북로드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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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개월 동안 실종됐던 소녀 캐시 스톤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오자 인디애나주의 작은 마을 베설빌에는 환희와 불안감이 교차합니다. 기쁜 일이긴 하지만 캐시를 납치한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기 때문입니다. 아동 심리치료사 로빈 하트는 말문을 열지 않는 캐시에게 인형놀이를 통한 치료를 시도하다가 뜻밖의 공포에 사로잡히는데, 캐시는 갖가지 엽기적인 방법으로 인형들을 살해하는 놀이를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인형놀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된 여자가 발견되자 로빈은 겁에 질려 경찰에 연락합니다. 담당형사 너새니얼 킹은 처음엔 로빈의 진술을 의심했지만 동일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자 본격적인 수사에 나섭니다.



‘따르는 사람들’ 이후 3년 만에 출간된 마이크 오머의 스릴러입니다. 한국에는 범죄심리학자 조이 벤틀리 시리즈인 ‘살인자의 사랑법’과 ‘살인자의 동영상’, 그리고 인질협상가 애비 멀린 시리즈인 ‘따르는 사람들’이 출간됐는데, 검색해보니 미국에서 두 시리즈 모두 3편에서 종결됐고, ‘침묵의 인형놀이’는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얼론입니다. 앞선 두 시리즈의 후속작을 기다렸던 터라 마이크 오머의 신작 소식을 반겼는데, 의외로 스탠드얼론인 ‘침묵의 인형놀이’가 먼저 출간됐습니다.


앞선 작품들의 주인공은 각각 범죄심리학자와 인질협상가였는데, 이번에는 아동 심리치료사가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물론 FBI요원이나 강력계 형사 등 세컨드 주인공들이 수사 실무를 맡긴 하지만, 마이크 오머는 일부러 주인공들을 실제 수사에는 개입하지 못하는 캐릭터로 만드는 취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납치 15개월 만에 살아 돌아왔지만 말문을 닫은 채 여전히 겁에 질려 있는 아홉 살 소녀 캐시, 그런 캐시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돌보며 치료에 전념하면서도 엽기적인 인형놀이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로빈, 그리고 아직 체포되지 않은 캐시 납치범이 최근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로빈을 도우며 진실 찾기에 나선 형사 너새니얼 등이 미스터리 스릴러를 이끄는 실질적인 주인공들이지만, ‘침묵의 인형놀이’는 그 외에도 서로에게 상처를 낼 뿐인 가족의 문제, 작은 마을의 폐쇄적이고 은밀한 분위기, 여러 인물의 일그러진 집착과 욕망 등 심리 스릴러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하여 서사의 두께를 더욱 두툼하게 만듭니다.


다만 이 심리 스릴러 서사에 관해선 의견이 갈릴 수 있는데, 마이크 오머의 전작들이 적극적인 캐릭터의 주인공과 빠른 속도의 스릴러를 앞세운 반면, ‘침묵의 인형놀이’는 초중반 내내 집요할 정도로 세세하게 그려진 심리치료 과정 및 로빈과 캐시의 주변 인물들 간의 관계와 심리묘사 등 다소 지루한 전개가 펼쳐져서 수사를 담당하는 너새니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까지 꽤 느리고 느슨한 책읽기가 필요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 읽고 나면 초반의 지루한 기초공사가 꼭 필요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지만, 아무래도 이 작품으로 마이크 오머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범죄피해자이자 심리치료가 필요한 환자지만 동시에 연쇄살인에 관한 결정적 정보를 쥐고 있는 듯한 소녀가 오로지 인형놀이만을 통해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심리치료사에게 전달한다는 설정, 또 그 목격 사실이 현실 속 연쇄살인의 유일하고 유력한 단서가 된다는 설정은 기발하면서도 여느 미스터리 스릴러와는 차별화된 서늘한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미치광이 사이코패스나 다름없지만 살해동기와 수법이 독특한 연쇄살인범의 정체도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매력을 맛보기 위해선 초반부의 지루함을 잘 견뎌내야 하는데, 1/3쯤 되는 지점부터는 마이크 오머 특유의 스피디한 스릴러가 전개되면서 그때까지의 인내심을 충분히 보상해줄 테니 너무 빠른 예단으로 이 작품의 미덕을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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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메이드 3 - 하우스메이드의 집
프리다 맥파든 지음, 정미정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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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 딸 에이다와 9살 아들 니코를 둔 밀리와 엔조는 궁핍하게 지내던 뉴욕 브롱크스의 아파트를 떠나 롱아일랜드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합니다. 무리한 대출 때문에 경제적 부담은 커졌지만 밀리는 이제야 제대로 된 부모가 된 듯 뿌듯함과 행복을 만끽합니다. 하지만 이웃한 두 집 여자의 몰상식한 행태와 집안에서 감지되는 불쾌한 느낌 때문에 밀리의 행복은 금세 균열을 맞이합니다. 거기다가 이웃집 여자의 노골적인 추파를 받아주는 듯한 남편 엔조와 갑작스레 난폭해진 아들 니코 때문에 밀리의 고민은 점점 심각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밀리는 인생이 통째로 붕괴될 위기에 빠집니다.



미국 기준으로 ‘하우스메이드 2’가 출간된 건 2023년인데, 불과 1년 후인 2024년에 출간된 ‘하우스메이드 3’의 시간적 배경은 무려 11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보통 시리즈 주인공의 나이는 책의 출간에 맞춰 한두 살씩 먹기 마련인데, 그야말로 파격적인 점프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하우스메이드 1’에서 25~26세였던 밀리는 32세의 ‘하우스메이드 2’를 거쳐 어느 새 40대 중반의 두 아이의 엄마가 됐는데, 여러 사람의 목숨을 거뒀던 잔혹한 과거에서 벗어나 가까스로 평범한 삶에 안착했다며 안심할 무렵 또다시 찾아든 불운한 사건과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 때문에 절망하고 맙니다.


‘하우스메이드 3’는 프리다 맥파든과 여덟 번째로 만난 작품인데, 올해 읽은 ‘대리모’에 이어 두 번째로 별 3개라는, 제 기준으론 거의 최하에 가까운 평점을 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문 가운데 “시리즈물에서 세 번째 책이 명작인 경우는 드문 편이니”라는 문구가 있는데, 마지막 장을 덮은 순간의 느낌을 조금도 에두르지 않고 표현하자면, ‘하우스메이드 3’는 1~2편의 명성에 폐를 끼친 것을 넘어 애초 출간되지 말았어야 할 작품입니다.


‘하우스메이드 2’의 서평에 “‘서론’이 너무 길고 장황했다”라고 쓴 적 있는데, 이 작품의 경우 그저 길고 장황한 수준이 아니라 이야기의 절반을 넘어서까지 전개되는 지루한 서론 때문에 메인 사건이 등장하기도 전에 이미 힘이 빠집니다. 

주인공이자 엄마이자 아내인 밀리는 “왜 저런 상황들을 죄다 참고 넘어갈까?”라는 의문이 수차례 들 정도로 민폐에 가까운 캐릭터가 됐고, 밀리의 과거를 모두 아는 동지이자 남편인 엔조는 순전히 밀리의 분노를 자아내기 위해 다분히 그답지 않은 행동을 억지스럽게 거듭합니다. 이웃집 여자들과 60대 가사도우미 등 주요 조연들은 몰상식하고 기이한 행동들로 밀리의 혈압을 높이곤 하지만 그들에게서 사실감이라곤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설정들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전체 분량의 절반도 넘는 1부가 할애됩니다.

밀리의 가족들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린 사건은 잘 해야 중편 정도의 분량을 통해 익히 예측 가능한 방향대로만 전개됩니다. 반전은 조금도 놀랍지 않았고, 사건은 긴장감을 느낄 틈도 없이 초스피드로 해결됩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의 구성은 ‘과도한 가분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우스메이드 1’이나 ‘네버 라이’에서 발휘됐던 프리다 맥파든의 쫄깃하고 매력적인 스릴러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저처럼 이 작품이 진짜 프리다 맥파든이 쓴 게 맞나, 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플롯이나 캐릭터에 대한 고민이 현저히 부족해 보이는 작품을 시리즈의 성공에 편승해 상업적인 목적으로 내놓은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인터넷서점의 평점을 보면 대체로 호의적인 경우가 많았으니 어쩌면 저만 유독 날선 서평과 박한 평점을 준 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작가의 작품을 여덟 편쯤 읽었다면 그와 그의 작품에 거는 기대라는 게 남다를 수밖에 없고, 그 기대가 ‘출간되지 말았어야 할 작품’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무너졌다면 다른 여느 작가의 ‘수준 이하 작품’보다 더 심한 불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우스메이드 3’는 제게 딱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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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다커
앨리스 피니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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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부 콘월의 외딴섬에 있는 오래된 저택 시글라스에 홀로 살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 비어트리스 다커는 여든 번째 생일을 맞아 온가족을 초대합니다. 만조가 되면 8시간 동안 외부와 고립되는 시글라스에 모인 다커 가족은 모두 8명. 거의 절연하다시피 지내던 이들이 1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이유는 막대한 재산의 상속 계획을 담은 비어트리스의 유언장 공개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어트리스는 누구도 예상 못한 충격적인 유언을 발표했고, 가족 대부분은 격분한 채 8시간 후 바닷길이 열리는 대로 저택을 떠나려 합니다. 그런데 그 8시간 동안 시글라스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연속살인의 무대로 탈바꿈합니다.



2018년 한국에 처음 소개된 ‘원래 내 것이었던’ 이후 두 번째로 만난 앨리스 피니의 작품입니다. 그때 쓴 서평을 찾아보니 ‘막판 반전과 정교한 설계라는 매력’과 ‘다소 지루한 심리묘사 및 모호한 미스터리에 대한 아쉬움’을 딱 절반 정도씩 느꼈다고 적혀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조금은 결이 다르지만 ‘데이지 다커’에서도 그와 비슷한 인상을 받았고, 아무래도 앨리스 피니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가임을 확인하게 됐습니다.


이야기의 화자는 비어트리스의 막내 손녀이자 선천성 심장질환으로 이미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긴 29살의 데이지 다커입니다. 데이지에겐 할머니 비어트리스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애초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악연이자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악몽의 원천입니다. 20여 년 전 이혼한 부모 프랭크와 낸시는 두 언니 로즈와 릴리에게만 애정을 쏟았고, 언제라도 심장이 멈출 수 있는 자신에겐 최소한의 도리만 했을 뿐입니다. 어려서부터 악의로 가득 찬 공격을 퍼부었던 릴리와 맏언니임에도 그런 상황들을 방치했던 로즈 역시 데이지에게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상대들이었습니다. 다만 릴리의 15살 딸인 조카 트릭시만큼은 유일하게 데이지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줘서 시글라스에서의 끔찍한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줍니다.

이날 시글라스에 초대된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다커 가족이 아닌 코너 케네디는 데이지의 첫사랑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절대 잊히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그와 재회했지만 데이지의 심경은 복잡하고 불편할 따름입니다. 


만조로 인해 8시간 동안 외부와 고립된 공간, 때마침 배를 띄울 수 없을 정도로 시글라스를 덮친 폭풍우, 유무선 통신이 모두 단절된 상황, 그리고 비어트리스의 충격적인 유언 발표 후 서로에게 날선 태도와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가족들. 그야말로 영국 스타일의 비극적인 미스터리를 위한 무대와 인물들이 제대로 세팅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세팅 속에서 벌어지는 연속살인은 등장인물들이 완전히 또는 거의 남남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가족들 간의 연속살인이란 설정이 무척 낯설어보였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깊고 지독한 악의를 품었기에 부모 혹은 자식 혹은 자매를 연이어 살해할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시글라스에서의 연속살인과 병행하여 다커 가족의 과거사가 전개되며 그 의문을 아주 조금씩 풀어줍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진범의 정체 및 살해동기와 함께 다커 가족이 오랜 시간 감춰온 비밀은 물론 데이지가 이야기의 화자가 된 이유가 공개되며 뜻밖의 반전으로 독자를 놀라게 합니다.


‘데이지 다커’의 반전은 독자에 따라 극단적인 평가를 받을 여지가 많습니다. 누군가는 이 작품만의 특별한 매력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이게 뭐야?”라고 황당해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진범의 정체는 놀라웠지만 범행동기나 방법은 리얼리티가 모호했고, 데이지가 화자가 된 이유도 설득력이 부족했으며, 장르물의 규칙이 편의적으로 사용된 대목 역시 논란거리로 보였습니다. 전작인 ‘원래 내 것이었던’의 반전도 이런 반응을 얻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데이지 다커’는 그보다 찬반 또는 호오의 간극이 훨씬 더 클 것 같습니다.


외딴섬에 자리 한 저택 시글라스의 풍광과 한없이 일그러지고 이기적인 인물들, 그리고 고전미와 함께 수려하지만 어두운 기운으로 가득 찬 문장들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스타일의 전형적이고 대중적인 연속살인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결의 맛과 미덕을 품고 있습니다. 혹평까진 아니어도 대체로 비판적인 톤의 서평을 쓰고 말았는데, 취향이 맞는 독자라면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니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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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 - 2024년 타이베이국제도서전대상 소설상 수상작
탐낌 지음, 우디 옮김 / 엘릭시르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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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우(司武) 씨는 다 죽어야 한다, 이게 고객의 요구 사항입니다.” 의뢰인과 청부업자 사이에 한 가문의 몰살이 거래되고 채 한 달도 안 돼 홍콩 란터우 섬의 외진 마을 사이위에서 무려 56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식중독 살인이 벌어집니다. 희귀 성씨인 쓰우 가문 가운데 이 참사에서 살아남은 건 겨우 여섯 명. 그 중 진작부터 가문과 연을 끊고 살아온 기자 출신 사설탐정 쓰우즈신은 ‘애꾸눈 명수사관’ 치서우런과 함께 베일에 싸인 살인자를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쓰우 가문의 뿌리 깊은 치부가 하나둘씩 드러나는 것은 물론 어쩌면 살아남은 가문 사람 중 한 명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위험천만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는 독특한 제목에다 오랜만에 홍콩 작가의 장르물이란 점 때문에 눈길이 끌렸습니다. 설마 했지만 첫 장부터 믿기지 않는 의뢰가 오가고, 100페이지도 되기 전에 실제로 56명이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진 덕분에 어쩌면 살짝 지루한 책읽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근거 없던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졌습니다. 


관할 경찰서가 수사에 나서지만,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 명탐정 역할은 ‘가문의 문제아’ 쓰우즈신과 과거 영웅적인 행동으로 홍콩 경찰의 전설이 된 ‘애꾸눈 명수사관’ 치서우런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백미는 ‘진범 찾기 미스터리’가 아니라 엄청난 부를 기반으로 한 쓰우 가문의 가부장적 독재와 절대적인 위계질서, 그리고 가문의 이름으로 자행되어 온 차별과 폭력과 억압에 관한 서사입니다. 또한 그런 악습들이 어떻게 ‘가문 몰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참극으로 이어졌는지를 현재는 물론 오랜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밝혀내는 거대한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도 품고 있습니다.


어린이 한 명을 제외하고 참사에서 살아남은 다섯 명은 쓰우 가문의 명암을 극명히 드러내는 인물들입니다. 현재 쓰우 가문의 수장이자 봉건시대 군주를 연상시키는 50대 쓰우원후, 그의 10살 연하 아내이자 위험한 매력을 발산하는 40대 쓰우셰우이, 가문의 피를 제대로 물려받은 몇 안 되는 남자 중 하나지만 오래 전부터 가문과 절연해온 30대 쓰우즈신, 영국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개차반으로 살아가고 있는 쓰우즈이, 쓰우 가문이 어떻게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쓰우즈아이 등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가문 몰살범을 추리하는데, 그 추리를 따라가다 보면 살아남은 다섯 명 누구든 충분한 살해 동기가 있는 것은 물론 가문의 몰살이 가져올 이익의 수혜자라는 것이 밝혀져서 독자의 추리 의욕을 고조시킵니다.


1부가 ‘진범 찾기 미스터리’에다 쓰우 가문의 실체가 폭로되는 빠른 호흡의 이야기로 구성됐다면, 2부에선 아무도 몰랐던 ‘또 한 명의 쓰우 가문 사람’이 등장하면서 전혀 새로운 국면이 펼쳐집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애초 1부만으로 작품을 완성했다가 미진한 부분이 엿보여서 2부를 추가했다고 하는데, 알맹이에 비해 다소 과한 분량이 할애되긴 했지만, 기구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인생 역정과 함께 쓰우 가문의 몰락이 실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시작이 그릇된 욕망과 어이없는 아이러니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디테일하게 그려져서 지루할 틈 없이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인물도 많고 이야기 구조도 방대해서 세세한 내용까지 언급하기가 어려운데, 앞서 소개한 이 작품의 큰 틀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그러니까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가문의 비밀과 비극, 그 와중에 벌어진 대량 살상, 그리고 운명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개인들의 기구한 삶이란 서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충분히 만족스런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쓰우 씨는 다 죽어야 한다’를 시작으로 ‘복수 3부작’을 이어갈 예정이라는데, 이 작품이 좋은 성과를 내서 후속작도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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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빛이 우리를 비추면
사라 피어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밝은세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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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아이작의 약혼파티에 초대받은 영국 데번 경찰서의 강력계 형사 엘린은 남자친구 윌과 함께 알프스 고지대에 위치한 르 소메 호텔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이작의 약혼녀이자 호텔 부지배인인 로라가 실종됩니다. 안 그래도 객실직원 아델이 종적을 감춘 직후라 모두들 불안해하는데 공교롭게도 폭설과 함께 눈사태 예보가 발표되고 대피령이 내려지면서 호텔엔 미처 피신 못한 일부 직원과 투숙객만 남게 됩니다. 경찰은 물론 헬기의 접근마저 통제된 와중에 수 년 전 실종됐던 인물의 사체가 발견되고 또 다른 실종자가 발생하자 엘린은 현지 경찰과 검찰의 허가를 받아 단독 수사에 나섭니다. 



알프스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넓은 통유리와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을 구현한 인테리어로 유명한 5성급 호텔이 폭설과 눈사태로 고립된 뒤 끔찍한 연쇄살인의 현장으로 돌변한다는 설정은 곧장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와 스티븐 킹의 ‘샤이닝’까지 소환했고, 해외에서의 성과와 실적도 꽤 뛰어났음을 강조합니다. 외형만 보면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는데, 520여 페이지의 분량에 미스터리와 서스펜스에 심리 스릴러 서사까지 골고루 버무려놓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 대비 아쉬움이 크게 남은 작품입니다.


작가는 사건의 무대인 르 소메 호텔과 주요 인물들의 ‘과거’와 ‘비극’에 큰 공을 들였습니다. 지금은 화려한 5성급 호텔로 탈바꿈했지만 과거 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원이었던 곳에서 엽기적인 연쇄살인이 벌어진다는 점은 초반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사로잡습니다. 첫 챕터부터 호텔로 개축되기 전, 폐허나 다름없던 요양원에서 기괴한 인물이 벌이는 살인 장면이 호러물 스타일로 그려지는데, 덕분에 독자는 ‘호텔의 과거’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 ‘The Sanatorium’은 요양원이란 뜻입니다)

또한 사방이 고립된 상황에서 단독수사에 나선 영국 형사 엘린을 비롯하여 주요 인물들 모두 유년기 혹은 청년기에 겪은 사건으로 인해 지금도 참혹한 악몽에 시달리는 것으로 설정됐는데, 그로 인해 “엽기적인 연쇄살인범은 누구?”라는 의문 못잖게 그들의 과거사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란 말이 여러 번 떠오를 정도로 작가는 무대와 인물들의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데, 다 읽고 돌이켜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되는 대목이 일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오히려 리얼리티를 떨어뜨리거나 책읽기를 지루하게 만들어서 역효과만 일으켰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20여 년 전, 8살에 세상을 떠난 막내동생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엘린의 트라우마는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동어반복에다 공감하기도, 이입하기도 어려워서 내내 방해물처럼 여겨지기만 했습니다.


주요 인물들이 용의선상에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긴장감을 높이긴 하지만, 메인 사건 역시 물 흐르듯 이어진다기보다는 억지로 갖다 붙이거나 ‘뒷북 설명’식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고, “범인이 굳이 그렇게 난해한 살인방식을 선택할 이유가 있었나?” 또는 “굳이 고립된 5성급 호텔이라는 공간이 필요했나?”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막판에 밝혀지는 범인의 동기 역시 작가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부연설명을 여러 차례 ‘덧칠’한 느낌이 든 게 사실입니다.

엘린의 수사는 딱히 단서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형사의 감’에 의존하는 것도 아닌, 시종 모호한 태도를 취해서 마지막 순간에 범인을 특정하는 단계까지 좀처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마추어보다는 뛰어나지만 프로라고 하기엔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캐릭터와 과도하게 강조된 막내동생에 관한 트라우마는 주인공으로서의 그녀의 매력을 감소시킨 주요 원인입니다.


내용에 관해선 거의 언급을 하지 못했는데, 인물과 사건 모두 꽤 복잡하게 설정된 데다 조금만 공개해도 스포일러가 될 대목들이 워낙 많기 때문입니다. 

꽤 혹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고 말았지만, 독자에 따라 높은 평점을 주는 경우도 적잖을 거란 생각입니다. 이 작품이 해외에서 거둔 성과와 실적이 괜한 것은 아닐 테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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