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
그래디 헨드릭스 지음, 류기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5월
평점 :
심리학자 캐럴 박사가 이끄는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은 끔찍한 대량 살인극에서 홀로 살아남은 여성 여섯 명으로 이뤄진 상담과 치유를 위한 모임입니다. 리넷 타킹턴을 비롯하여 그녀들이 겪은 비극은 20여 년 전인 1980년대에 벌어졌고, 모임은 어느 새 16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멤버들 간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그룹 자체의 존폐가 거론될 무렵 이들은 또다시 악몽에 사로잡힙니다. 멤버 중 한 명이 대량 살인범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누군가 그룹 멤버 모두를 노리는 정황이 분명하다는 점. 이 사실을 눈치 챈 리넷 타킹턴은 멤버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범인을 밝히기 위해 분투하지만 뜻밖의 사태로 인해 오히려 멤버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은 물론 경찰에게 추적당하는 신세가 됩니다.

파이널 걸은 슬래셔 무비 혹은 공포영화에서 대량 살인범의 만행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범인을 죽이거나 제압하는 역할을 맡곤 하는데, 영화는 가족 또는 연인과 감격의 포옹을 나누며 악몽에서 벗어나는 주인공의 웃음으로 마무리되지만, 현실 속 파이널 걸의 진짜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심신의 상처, 술과 약물에 찌들어도 잊히지 않는 사건 당일의 기억, 호기심과 관음증의 대상이 되어 원치 않는 유명세를 타야 하는 절망감 등 파이널 걸에겐 죽어야만 끊어낼 수 있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은 대량 살인극의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처해온 여섯 명의 파이널 걸의 이야기이자 자신들을 노리는 대량 살인범과의 절체절명의 대결을 그린 작품입니다.
화자 역할을 맡은 리넷은 파이널 걸이 겪는 후유증과 트라우마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꼭 필요할 때 외엔 외출을 자제하며, 외출할 경우엔 단 한 시도 주위에 대한 경계를 멈추지 않습니다. CCTV, 철망, 금고 등 갖가지 안전장치를 해놓은 집에서조차 안정감을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 교도소에 수감 중인 범인이 언젠가 자신을 죽이러 올 거란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범인은 감형을 받은 뒤 슬래셔 무비의 모델이 되거나 추종자들의 환호를 받지만 피해자인 리넷의 악몽은 1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멤버 중 한 명이 새로운 대량 살인범에게 살해당하자 리넷은 극도의 공포에 빠집니다. 더구나 자신은 기관총 습격을 받고 다른 멤버들도 갖가지 위기에 처하자 누군가 그룹을 노리고 살인극을 벌이려 한다고 확신합니다. 문제는 철저하게 개인정보를 감추며 살아온 멤버들에 대해 범인이 너무나도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멤버 중 누군가가 범인과 내통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남자들은 자기들 실수로 죽는다. 그럼 여자는? 우리는 여자라서 죽는다.” (p43)
“슬래셔, 혹은 ‘파이널 걸’ 영화는 고기 분쇄기 같은 것이다. 제작자와 제작사 대표들이 기계를 돌리면, 남성 팬들이 침을 흘리며 그 폭력적이고 성적인 판타지를 덥석 받아먹는다.” (p61)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에서 눈길을 끄는 설정 중 하나는 여섯 명의 멤버 모두 자신이 겪은 사건이 영화로 제작된 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영화들은 하나같이 ‘남성 범인’이 ‘여성 희생자’를 무자비하게 도륙하고 해체하는 슬래셔 무비로 만들어졌고, 실제 대량 살인극에서 홀로 살아남은 멤버들을 한낱 오락거리의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심지어 잔인무도한 대량 살인범의 캐릭터에만 공을 들임으로써 무참히 살해당한 여성들을 그야말로 이름 없는 소품처럼 취급하기에 이릅니다. 실제로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대중의 뇌리에 남는 건 개성 강한 ‘남성 범인’일뿐 ‘여성 희생자’는 성적 또는 폭력적 판타지의 대상으로만 기억될 뿐인데, 이런 작태를 노골적으로 고발하려던 작가는 ‘남성들을 위해 분쇄기에 쑤셔 박히는 고기’ 취급을 받았던 파이널 걸의 이미지를 전복시킴으로써 새로운 대량 살인범에 저항하는 그녀들의 분투를 더욱 더 현실감 있게 그려냅니다. 말하자면 ‘슬래셔 무비의 탈을 쓴 反슬래셔 무비’라고 할까요?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이 단순한 액션스릴러를 넘어 여성 연대서사 혹은 시스터 서사로서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갖춘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늘어지는 전개와 기대에 못 미친 미스터리(누가 새로운 대량살인범인가?) 때문에 조금은 야박한 평점을 줬습니다. ‘메인 요리’인 리넷과 멤버들의 생존 투쟁기보다 ‘사이드 메뉴’인 슬래셔 무비 관련 서술이 더 눈길을 끈 것도 아쉬운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파이널 걸 자체가 워낙 매력적인 소재인데다 시스터 서사가 탄탄하게 그려진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