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결혼
제네바 로즈 지음, 박지선 옮김 / 반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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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DC 최고의 형사 변호사 세라 모건은 결혼 10주년 다음 날 인생 최악의 상황을 맞이합니다. 전업 작가인 남편 애덤이 호숫가 별장에서 내연녀 켈리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가 점차 소원해지던 중이었긴 해도 사랑 하나만으로 애덤을 믿어왔던 세라는 살인 못잖게 그가 1년 넘도록 켈리와 깊은 관계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에도 불구하고, 세라는 애덤의 변호를 자처합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한다는 점과 그가 범인일 리 없다는 확신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무죄를 밝혀냄으로써 어떻게든 결혼생활을 지켜내고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가는 일을 막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사는 연신 난관에 부딪히고, 애덤마저 연이어 대형 사고를 치며 세라를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가족 또는 부부가 주인공인 도메스틱 스릴러는 어지간히 눈길을 끄는 요소가 없으면 가급적 기피하는 장르지만, ‘완벽한 결혼내연녀를 살해한 남편을 변호하는 아내라는 설정 때문에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남편에게 1년 넘도록 마음까지 주고받은 내연녀가 있었고 그 내연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됐다면, 보통의 아내라면 진실과는 관계없이 피해자 측에 서서 남편을 증오하며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라는 이제는 거의 사그라진 한 조각의 사랑과 형사 변호사로서의 명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신을 배신한 애덤의 변호를 자처합니다. 그리고 검찰과 보안관이 놓친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무리한 방법까지 동원해가며 분투합니다. 한편 세라 덕분에 구속을 피해 가택연금 판정을 받은 애덤은 스스로 진범을 밝혀내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짓까지 저질러가며 위험한 행동을 일삼습니다. 문제는 그 행동들이 점점 더 애덤 본인을 옥죄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라와 애덤이 한 챕터씩 번갈아 1인칭 화자를 맡아 각자가 의심하는 인물들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한 챕터의 분량이 짧기도 하지만 무척 빠른 속도로 이야기가 진행돼서 두 사람의 심리묘사에 적잖은 분량이 할애됐음에도 불구하고 금세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주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세라와 애덤의 조사가 진척될수록 여러 명의 용의자가 차례로 수면 위로 떠올라서 독자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는데, 살해된 켈리의 과거 속에 의심스러운 인물들이 보이는가 하면, 조사에 비협조적인 보안관들도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고, 켈리를 살해할 만큼 원한 혹은 집착에 빠진 인물들도 눈에 띕니다. 또한 스스로 진실을 밝히려는 애덤의 무모한 폭주는 세라의 조사를 거듭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그녀로 하여금 혹시 애덤이 진짜 범인이 아닐까?”라는 의문까지 품게 만들 만큼 여러 차례 위기를 자초하곤 해서 내연녀를 살해한 남편을 변호하는 아내라는 설정을 더욱 쫄깃하게 만듭니다.

 

무척 재미있게 읽었지만, 다 읽은 뒤 뭔가 아쉽고 허전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우선 일부 인물들의 관계나 캐릭터 설정이 다소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냥 받아들이기엔 과도해 보이는 우연으로 엮인 인물들도 있고, 단지 한두 개의 역할을 위해 도구적으로 쓰이고 만 인물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작가가 미스디렉션을 위해 여러 명의 용의자를 등장시키며 의혹의 씨앗을 잔뜩 뿌려놓았지만, 정작 그들이 등장할 때마다 이 사람은 신경 안 써도 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금도 의심스럽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용의자들 외에 세라와 애덤 주변인물을 눈여겨보게 만든 설정은 꽤 정교하고 치밀했지만 눈길을 잡아끌 만큼 흡인력이 크진 않았습니다.

 

마지막 반전과 복선을 회수하는 방식은 100점까진 아니어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만족스러웠습니다. 주인공 세라의 캐릭터도 한 번만 보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이 작품의 후속작 완벽한 이혼이 미국에서 2025년에 출간됐고, 한국에도 2026년에는 소개될 예정이라고 해서 나름 기대감을 품게 됐습니다. 어딘가 좀 허술하고 아쉬운 대목들이 있긴 해도 진범 찾기 미스터리와 도메스틱 심리 스릴러가 잘 믹스된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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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손님들 마티니클럽 2
테스 게리첸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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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든 호수의 고급 여름별장에서 15세 소녀 조이가 실종됩니다. 퓨리티의 경찰서장 대행 조 티보듀는 MIT교수 출신의 농부 루터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그의 이웃인 매기 버드를 비롯한 마티니 클럽 멤버들은 나름의 조사를 통해 루터의 무죄를 입증합니다. 이어 매기는 조 티보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클럽 멤버들과 함께 진범 찾기에 나서지만, 일관성 없는 장소들에서 단서가 발견되는가 하면 호수에서 발견된 의문의 유골 때문에 조사가 혼선을 일으키자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그러던 중 50여년 전 퓨리티에서 벌어졌던 대량 살인사건이 소녀 실종사건과 연관 있다고 확신한 매기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인물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합니다.

 


젊은 시절, 정글을 헤쳐 가던 때가 떠올랐다. 매기는 예전의 그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낡은 몸은 아직 그 유령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p267)

 

마티니 클럽은 메인주()의 작은 휴양도시 퓨리티에 모여 사는 다섯 명의 은퇴한 CIA 요원들이 꾸린 독서모임입니다. 대도시를 떠나 철저히 신분을 감춘 채 은둔생활을 즐기면서도 그들은 60~70대가 된 지금도 평생 갈고 닦은 기술을 잊지 못합니다. 또한 스파이로 암약하면서 수도 없이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과거를 그리운 추억으로 소중히 품은 채 살아가는 중입니다.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진 아드레날린유령을 포기할 마음이 없는 클럽 멤버들이 퓨리티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에 개입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시리즈 첫 편인 스파이 코스트에서 클럽 멤버들은 오랜만에 스파이로서의 재능과 기술을 선보이며 조금도 녹슬지 않은 활약을 펼쳤는데, 두 번째 작품인 여름 손님들에선 한 소녀의 실종사건에 말려든 뒤 복잡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명탐정으로서의 기량을 발휘합니다. 처음엔 이웃에 사는 농부 루터의 무고함을 입증하는 게 주된 목표였지만, 매기와 클럽 멤버들은 자신들이 찾아낸 작은 단서와 갖가지 정보를 통해 진범을 찾아내기로 결심합니다.

마티니 클럽의 가장 큰 은 퓨리티의 경찰서장 대행 조 티보듀입니다. 30대 초반인 그녀가 볼 때 매기와 클럽 멤버들은 그저 자극적인 사건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는 평범한 노인들일 뿐입니다. 전작인 스파이 코스트에서 멤버들의 범상치 않은 능력을 직접 목격하곤 그들의 정체에 의문을 품긴 했어도 여전히 오지랖과 호기심에 사로잡힌 노인들이란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탓에 소녀 실종사건 수사과정에서도 사사건건 부딪히는데, 재미있는 건 조 티보듀가 클럽 멤버들의 도움과 조언에 나름 신경을 쓰고 귀 기울이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상 마티니 클럽의 객원멤버나 다름없는 캐릭터인 셈인데, 덕분에 그녀와 클럽 멤버들의 케미는 사건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이 사건은 여러 개의 움직이는 부품들로 이뤄진 하나의 큰 기계였어요.” (p417)

 

여름 손님들은 소녀 실종사건으로 시작되지만 50여년 전의 대량 살인사건 및 미제 실종사건 등 여러 사건들이 뒤엉키는데다 고급별장을 소유한 코노보 일가 내부의 갈등은 물론 부자 외지인들과 퓨리티의 가난한 토착민과의 충돌까지 섞여있어서 400여 페이지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거의 벽돌책에 버금가는 서사를 품고 있습니다. 이 모든 재료들은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별개의 것처럼 보였지만 매기와 클럽 멤버들은 그 안에서 거대한 하나의 줄기를 찾아내고 끝내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냅니다. 다 읽은 뒤에 찬찬히 복기를 해보면 거대한 하나의 줄기를 정교하게 엮어낸 테스 게리첸의 설계와 필력은 물론 아드레날린유령을 포기하지 않은 채 전력을 다해 진상을 밝혀낸 매기와 클럽 멤버들의 열의에 감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올해로 만 72세가 된 테스 게리첸은 이 시리즈는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한 제 감정을 반영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는 것 같았다.”라는 소회를 밝힌 바 있는데, 그래선지 마티니 클럽 시리즈가 아주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매기와 클럽 멤버들의 평온한 일상이 깨지는 건 안타깝지만 그들의 아드레날린유령이 다시 한 번 활약하는 모습을 기대하게 되는 건 팬으로서 당연한 바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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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와 렌
엘레이나 어커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앤드)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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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애나의 법의병리학 박사이자 검시관인 렌 멀러는 연이어 발견된 젊은 여성들의 시신을 조사하던 중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임을 확신합니다. 파트너나 다름없는 형사 존 르루 역시 렌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좀처럼 단서를 찾지 못해 곤경에 빠집니다. 그러던 중 렌은 범인이 남긴 메시지를 해독해내곤 다음 범행의 윤곽을 예측하기에 이릅니다. 한편 납치한 희생자들을 상대로 루이지애나의 늪지대에서 사냥놀이를 즐기며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제러미는 평소 점찍어 온 여성을 납치하는데 성공하지만 사냥 도중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면서 큰 충격에 빠집니다.

 


스릴러 속 여성 법의학자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퍼트리샤 콘웰이 창조한 버지니아 주 법의국장 케이 스카페타와 테스 게리첸이 창조한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입니다. 두 사람 모두 법의학자이자 형사 못잖은 능력을 발휘하며 극강의 사이코패스와 위험천만한 맞대결을 펼치곤 하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렌 멀러 역시 비슷한 캐릭터와 재능을 가진 인물입니다.

렌의 상대인 사이코패스 제러미는 성장과정만 놓고 보면 덱스터를 연상시키지만, 그가 희생자들을 사냥하고 학살하는 방식은 여느 사이코패스보다도 잔인하고 끔찍해서 독자의 속을 수시로 뒤집어놓곤 합니다. 덧붙여 어둡고 음습한 루이지애나의 늪지대를 무대로 한 범행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하게 묘사돼서 제러미의 사이코패스 기질을 더욱 서늘하게 만듭니다.

 

340페이지라는 분량답게 이야기 구도는 비교적 단선적입니다. 미스터리 코드는 거의 없는 편이고, 성실하고 유능한 법의학자 렌이 형사 존 르루와의 협업을 통해 가공할 사이코패스 제러미의 정체를 밝히고 추적하는 심플한 스릴러 서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다만 구성의 맛이 독특한 작품인데, 중반부 조금 넘어 시작되는 ‘Part 2’에서 한차례 반전과 함께 렌과 제러미의 대결이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뭐지?”하고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반전의 의미를 깨닫자마자 앞서 읽은 ‘Part 1’에 작가의 계략(?)이 숨어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 읽고 검색해보니 이 반전이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 적나라하게 공개돼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자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설정이란 생각인데, 왜 이런 셀프 스포일러가 노출된 건지 아쉬울 뿐입니다.)

 

한 번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정도로 속도감도 빠르고 사이코패스 스릴러의 미덕도 갖춘 작품이지만, 기대 대비 만족감은 다소 떨어졌습니다. 무엇보다 법의학자와 사이코패스의 대결이라는 구도에 비해 사건과 캐릭터 모두 소소하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제러미의 사냥과 학살은 잔인하긴 해도 중심사건으로서의 무게감이나 긴장감은 인상적이지 못했습니다. 루이지애나를 떠들썩하게 만들지도 못했고, 경찰의 대응도 고만고만해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러미가 아무리 미쳐 날뛴다 해도 결국 법의학자 렌과 형사 르루만이 관심을 갖는 개인적인 차원의 사건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은 법의학자이자 형사 역할까지 떠맡은 렌의 캐릭터가 폭발력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형사 르루 외에는 딱히 그녀와 접점을 갖는 인물이 없다 보니 법의학자로서 어느 정도 레벨에 있는 건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또 그녀를 방해하거나 적대적으로 대하는 인물조차 없어서 입체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곤 했습니다. 형사로서의 렌 역시 딱히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는데, 뒷표지 카피에 실린 폭풍 같은 두뇌 게임이란 문구와 달리 렌의 역할은 정공법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요약하자면 포장에 비해 내실이 부족한 주인공이라고 할까요?

 

미국에선 주인공 렌을 앞세운 후속작 ‘The Butcher Game’2024년에 출간됐습니다. 굿리즈 평점이 전작보다 조금 높게 나온 걸 보면 나름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데, 첫 만남이 좀 아쉽긴 했지만 한국에서도 후속작이 출간된다면 한번쯤은 더 만나볼 생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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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
그래디 헨드릭스 지음, 류기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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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캐럴 박사가 이끄는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은 끔찍한 대량 살인극에서 홀로 살아남은 여성 여섯 명으로 이뤄진 상담과 치유를 위한 모임입니다. 리넷 타킹턴을 비롯하여 그녀들이 겪은 비극은 20여 년 전인 1980년대에 벌어졌고, 모임은 어느 새 16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멤버들 간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그룹 자체의 존폐가 거론될 무렵 이들은 또다시 악몽에 사로잡힙니다. 멤버 중 한 명이 대량 살인범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누군가 그룹 멤버 모두를 노리는 정황이 분명하다는 점. 이 사실을 눈치 챈 리넷 타킹턴은 멤버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범인을 밝히기 위해 분투하지만 뜻밖의 사태로 인해 오히려 멤버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은 물론 경찰에게 추적당하는 신세가 됩니다.

 


파이널 걸은 슬래셔 무비 혹은 공포영화에서 대량 살인범의 만행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범인을 죽이거나 제압하는 역할을 맡곤 하는데, 영화는 가족 또는 연인과 감격의 포옹을 나누며 악몽에서 벗어나는 주인공의 웃음으로 마무리되지만, 현실 속 파이널 걸의 진짜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심신의 상처, 술과 약물에 찌들어도 잊히지 않는 사건 당일의 기억, 호기심과 관음증의 대상이 되어 원치 않는 유명세를 타야 하는 절망감 등 파이널 걸에겐 죽어야만 끊어낼 수 있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은 대량 살인극의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처해온 여섯 명의 파이널 걸의 이야기이자 자신들을 노리는 대량 살인범과의 절체절명의 대결을 그린 작품입니다.

 

화자 역할을 맡은 리넷은 파이널 걸이 겪는 후유증과 트라우마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꼭 필요할 때 외엔 외출을 자제하며, 외출할 경우엔 단 한 시도 주위에 대한 경계를 멈추지 않습니다. CCTV, 철망, 금고 등 갖가지 안전장치를 해놓은 집에서조차 안정감을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 교도소에 수감 중인 범인이 언젠가 자신을 죽이러 올 거란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범인은 감형을 받은 뒤 슬래셔 무비의 모델이 되거나 추종자들의 환호를 받지만 피해자인 리넷의 악몽은 1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멤버 중 한 명이 새로운 대량 살인범에게 살해당하자 리넷은 극도의 공포에 빠집니다. 더구나 자신은 기관총 습격을 받고 다른 멤버들도 갖가지 위기에 처하자 누군가 그룹을 노리고 살인극을 벌이려 한다고 확신합니다. 문제는 철저하게 개인정보를 감추며 살아온 멤버들에 대해 범인이 너무나도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멤버 중 누군가가 범인과 내통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남자들은 자기들 실수로 죽는다. 그럼 여자는? 우리는 여자라서 죽는다.” (p43)

 

슬래셔, 혹은 파이널 걸영화는 고기 분쇄기 같은 것이다. 제작자와 제작사 대표들이 기계를 돌리면, 남성 팬들이 침을 흘리며 그 폭력적이고 성적인 판타지를 덥석 받아먹는다.” (p61)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에서 눈길을 끄는 설정 중 하나는 여섯 명의 멤버 모두 자신이 겪은 사건이 영화로 제작된 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영화들은 하나같이 남성 범인여성 희생자를 무자비하게 도륙하고 해체하는 슬래셔 무비로 만들어졌고, 실제 대량 살인극에서 홀로 살아남은 멤버들을 한낱 오락거리의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심지어 잔인무도한 대량 살인범의 캐릭터에만 공을 들임으로써 무참히 살해당한 여성들을 그야말로 이름 없는 소품처럼 취급하기에 이릅니다. 실제로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대중의 뇌리에 남는 건 개성 강한 남성 범인일뿐 여성 희생자는 성적 또는 폭력적 판타지의 대상으로만 기억될 뿐인데, 이런 작태를 노골적으로 고발하려던 작가는 남성들을 위해 분쇄기에 쑤셔 박히는 고기취급을 받았던 파이널 걸의 이미지를 전복시킴으로써 새로운 대량 살인범에 저항하는 그녀들의 분투를 더욱 더 현실감 있게 그려냅니다. 말하자면 슬래셔 무비의 탈을 쓴 슬래셔 무비라고 할까요?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이 단순한 액션스릴러를 넘어 여성 연대서사 혹은 시스터 서사로서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갖춘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늘어지는 전개와 기대에 못 미친 미스터리(누가 새로운 대량살인범인가?) 때문에 조금은 야박한 평점을 줬습니다. ‘메인 요리인 리넷과 멤버들의 생존 투쟁기보다 사이드 메뉴인 슬래셔 무비 관련 서술이 더 눈길을 끈 것도 아쉬운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파이널 걸 자체가 워낙 매력적인 소재인데다 시스터 서사가 탄탄하게 그려진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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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마술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5 링컨 라임 시리즈 5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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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학교의 여학생, 메이크업 아티스트, 승마를 사랑하는 변호사 등 일련의 인물들이 단 하루만에 동일범에 의해 기괴한 형태로 살해되거나 그에 준하는 위기에 빠집니다. 현장에서 수거한 증거들을 분석한 링컨 라임과 아멜리아 색스는 범인이 마술에 능한 인물임을 확신한 것은 물론 다음 범행 현장까지 예측해내지만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견습 마술사 카라의 도움으로 범인의 윤곽을 포착한 라임과 색스는 3년 전 한 서커스장에서 벌어진 화재 참사를 범행동기로 여기지만, 이후 범인은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보여 두 사람을 곤란한 지경에 빠뜨립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다섯 번째 작품의 제목인 사라진 마술사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범행을 저지른 뒤 마술사처럼 감쪽같이 사라진 범인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마술계에서 이른바 탈출 마술의 대명사로 불리는 고도의 수법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한 마지막 반전에서 밝혀지는 마술사의 비밀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사라진 마술사의 핵심 키워드는 미스디렉션(misdirection)입니다. 의도적으로 관객의 주목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끈 뒤 그 틈을 이용하여 자신의 기술을 선보이는 마술사의 필수 덕목으로, 단순히 사물을 이용하는 물리적인 미스디렉션은 물론 관객의 의식까지 장악하고 오도하는 심리적인 미스디렉션도 있습니다.

유명 마술사의 이름에서 따온 말레릭이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범인은 근접, 환상, 동물, 탈출 등 모든 종류의 마술은 물론 독심술과 복화술에도 능한데다 미스디렉션의 천재로 라임과 색스를 수차례 곤경에 빠뜨리곤 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성동격서의 귀재라고 할까요? 라임과 색스는 번번이 그가 쳐놓은 미스디렉션의 함정에 빠져 엉뚱한 곳에서 허우적대다가 큰 위기를 맞이하곤 합니다. 무엇보다 말레릭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난제인데, 막판에 이르기까지 제프리 디버는 연이은 반전을 통해 독자의 궁금증을 극대화시킵니다. 숱한 착오를 겪는 라임과 색스가 그 미스디렉션을 역이용하여 말레릭을 제압할 거란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은 직접 읽기 전까진 좀처럼 예측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이 미스디렉션이 사라진 마술사에서 가장 아쉬운 설정이기도 한 점입니다. 사실 제프리 디버는 미스터리계의 미스디렉션의 장인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반전과 트릭에 관한 한 1인자라 할 수 있습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뿐 아니라 다른 시리즈나 스탠드얼론에서도 그의 미스디렉션은 매번 독자를 희롱하다가 큰 충격에 빠뜨리곤 합니다. 그런데 사라진 마술사의 미스디렉션은 다소 과도하게 설정된데다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도 많아서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켰다는 생각입니다. 좀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만일 말레릭이 애초 자신의 목표에만 매진했다면 오히려 완전범죄를 쉽게 이뤄낼 수 있었을 텐데, 괜히 미스디렉션을 복잡하게 이용하는 바람에 모든 걸 망쳐버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거듭되는 반전을 맛보는 쾌감은 짜릿했지만 말레릭의 납득하기 힘든 행동과 범행 때문에 이내 의아해진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말레릭 못잖게 눈길을 끈 인물은 견습 마술사이자 말레릭과는 대척점에 서있는 선한 마술사카라입니다. 마술이 단순히 오락이나 눈속임이 아닌, 과학과 예술과 심리학의 영역에 닿아있음을 독자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은 물론 말레릭의 내면과 미스디렉션에 대해 결정적인 조언을 건네기도 합니다. 천하의 라임마저 감동시킨 카라의 마술은 마지막 반전에도 등장하는데, ‘링컨 라임 시리즈의 팬이라면 앞선 작품들에서 느끼지 못했던 미묘한 흥분과 여운까지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미스디렉션 얘기만 하느라 정작 내용에 대해선 별로 언급 못했는데, 라임과 색스를 감쪽같이 속인 말레릭의 미스디렉션 자체가 모두 스포일러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만, 매 장면마다 이걸 믿어야 돼? 말아야 돼?”라며 고민하며 마지막 장까지 달려야 하는 건 독자로선 나름 즐거운 고문이라 할 수 있으니, 가급적 줄거리나 다른 분들의 서평을 접하지 말고 바로 본편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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