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뽑은 '도쿄 기담집' 수록작 중 베스트는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단편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읽기 편한 전통적인 내러티브에 가까웠고,
'도쿄 기담집' 전체를 관통하는 '우연'과 '상실'이라는 모티브가 가장 잘 살아있는,
그리고 매력적인 캐릭터와 스토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기리에 같은 신비한 존재와의 만남을 꿈꿉니다.
그 만남이 파티장에서 '우연과 우연'이 겹친 끝에 이뤄진다면,
또한 그 상대가 내가 찾던 '정말 의미 있는 여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면
그 로망은 완벽하게 실현되겠지요.
불행히도 그런 로망은 말 그대로 꿈일 뿐이고,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하루키는 준페이와 기리에의 만남과 짧은 연애를 담담하면서도 리얼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의 대리만족감을 훨씬 더 고양시켰습니다.
준페이가 기리에를 '상실'하는 과정 역시 하루키답게 애틋하지만 깔끔했습니다.
그를 통해 준페이는 비록 31살의 나이지만 또한번 삶의 진화를 이루게 됩니다.
아버지에게 세뇌당한(?) '세 명의 의미 있는 여자'의 참뜻도 깨닫게 되지요.
기리에가 고층 빌딩 위의 외줄 위에서 바람과 함께 서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괜히 가슴이 시큰해집니다.
신비하지만 어딘가 큰 상처를 감추고 있는 듯한 기리에의 삶이
한 눈에 보이는 듯한 느낌 때문입니다.
아마 라디오로 기리에의 이야기를 듣던 준페이도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더불어 소설 속의 소설인 준페이의 동명 단편 역시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콩팥 돌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완결된 단편의 매력이 있었습니다.
우연과 상실, 사랑과 로망, 그리고 아스라한 추억 등이
읽는 내내 그림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걸 보면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은 영상물로 만들어진다면
훌륭한 단편 영화 또는 단막극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이 슌지나 고레에다 가즈히로 같은 명장들이 만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