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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배틀 ㅣ 케이스릴러
주영하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17년 ‘청계산장의 재판’(박은우)을 시작으로 ‘곤충’(장민혜), ‘붉은 열대어’(김나영),
그리고 ‘현장검증’(이종관)까지 네 편의 케이스릴러를 읽었습니다.
인터넷서점을 찾아보니 11월에 출간될 ‘언노운 피플’(김나영)이 19번째 케이스릴러인데,
만 5년도 안 된 시점에 낸 기대 이상의 파이팅에 정말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개인적으론 ‘행복배틀’이 겨우 다섯 번째 만난 케이스릴러라 민망하지만,
한국 장르물에 이처럼 꾸준히 투자와 노력을 기울이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행복배틀’은 기대 이상의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처음엔 “SNS에서 행복배틀을 겨루던 강남 영어유치원생 엄마 살인사건”이라는 카피 때문에
읽을까 말까 고민하며 살짝 주저했던 게 사실입니다.
SNS를 하지 않는데다 스릴러 소재로서 SNS에 별 매력을 못 느꼈고,
살인사건 피해자가 부유한 강남 영어유치원생 엄마란 점도 호기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읽게 돼있는 책은 어떻게든 인연이 닿게 되는 건지 어찌어찌 ‘행복배틀’을 읽게 됐고,
생각지도 못하게 첫 장을 열자마자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완주하게 됐습니다.
‘행복배틀’은 독자에 따라 무척 가벼운 이야기가 담겼다고 오해할 수 있는 제목이지만
사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오랜 상처와 악몽에 시달려 온 불행한 사람들이거나
그 불행을 잊거나 보상받기 위해 실재하지도 않는 행복에 매달리는 사람들이거나
또는 누군가의 행복을 파괴함으로써 희열을 맛보는 ‘칼만 안 든 사이코패스들’입니다.
강남 부유층들의 얄팍한 SNS 놀이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멋대로 예상했던 탓에
초반부터 묵직하게 전개되는 비극에 사뭇 놀라면서 페이지를 넘기게 됐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17년 전 3총사처럼 어울려 지냈던 미호, 유진, 세경이 겪은 참혹한 비극이고,
또 하나는 현재 강남 부촌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상 사건 미스터리입니다.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던 유진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미호는 스스로 진실 찾기에 나서지만
그와 함께 17년 전 사건에 대한 죄책감과 자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3총사의 비극은 실은 처음부터 싹을 잘라낼 수도 있었던 ‘작은 사건’에서 잉태됐습니다.
반항기 섞인 불장난, 엉겁결의 거짓말 한마디, 그리고 사악한 악의 등
어디선가 분명 끊어낼 수 있었던 작은 사건들이 탄탄한 고리에 연결된 듯 연이어 벌어졌고
그로 인해 3총사의 짧았던 행복한 시간들은 17년 전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행복배틀이라는, 유치하지만 악의로 가득 차있는 부유층들의 SNS 놀이는
더 이상 물질적인 자랑거리가 무의미해진 자들이 벌인 ‘행복 자랑질’이 그 실체입니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타인에게 무한한 시기와 질투심을 느낀 자들은
타인의 삶을 흠집 내거나 그들의 행복을 파괴하면서 더 큰 희열을 만끽했고,
그것은 더 이상 장난 같은 배틀이 아닌 피비린내 나는 살상극을 초래하고 맙니다.
유진의 죽음을 조사하던 미호가 발견한 부유층의 시궁창 같은 SNS 놀이 속에는
행복 따위와는 무관한, 누군가를 향한 증오와 살의만 가득했을 뿐입니다.
살상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정작 경찰이나 형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호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미스터리와 스릴러는 무척 매력적입니다.
17년에 걸친 불행에 마음 아파하면서, 또 사악한 자들의 악의에 분노하면서 읽다 보면
작가가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하게 이야기를 설계했는지 여러 번 깨닫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점에서 별 0.5개를 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최종 반전 때문입니다.
이 반전은 개인적으로 너무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없었더라면, 아니, 없었어야 이 작품의 여운을 길게 간직할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 사족과도 같은 최종 반전을 설정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앞서 읽은 이야기들을 다소 허망하게 만들 정도로 억지스러웠고,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작가의 과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의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처음 만난 주영하라는 한국 장르물 작가에게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읽는 내내 페이지는 거부감이나 위화감 없이 술술 넘어갔고,
설계와 문장 모두 탄탄함 이상의 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의 후속작 소식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