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을 쏴라 (리커버 특별판)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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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으로 처음 만났을 때는 서사와 캐릭터 등 모든 것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고,

‘28’을 읽곤 악의 순수한 단면과 정면으로 마주친 끔찍함에 꽤 긴 후유증을 겪었습니다.

종의 기원은 전작들보다 더 독하고 센 것을 찾다가 길을 잃은 듯한 아쉬움을 느꼈는데,

그래서 오히려 초기작인 내 심장을 쏴라는 남다른 기대감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p213)

 

이 작품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 트라우마로 인해 미쳐서 갇힌정신분열증 환자 이수명과

타고난 운명 때문에 타인에 의해 갇혀서 미쳐가는류승민의 정신병원 탈출기를 그립니다.

이수명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수차례 정신병원을 드나들던 베테랑(?)이라면,

류승민은 재벌가의 유산싸움에 휘말린 끝에 납치되다시피 정신병원에 갇힌 인물입니다.

물론 류승민도 어린 시절부터 방화를 즐겼으니 딱히 평범한 일반인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갇힌 수리 희망병원은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악하고 악질적인 정신병원입니다.

폭력이 난무하고 강제적인 약물과 전기치료로 환자들을 길들이는 게 일상적인 곳입니다.

덕분에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수명과 승민의 고통스런 시간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바깥에서의 삶을 포기한 채 체념의 길을 선택한 수명과 달리

승민은 혹독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바깥으로의 탈출을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승민이 정신병원에 갇힌 사연을 알게 된 수명은 그의 희망과 의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승민의 탈출을 돕는 과정에서 진작 포기했던 바깥세상의 삶에 애착을 갖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스스로 굳게 봉인했던 과거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미션이 정신병원 탈출이니 당연히 마지막에 성공하긴 합니다. 일단....

(수명과 승민의 운명이 탈출 후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009년 세계문학상 심사위원들은 처음 60쪽의 지루함만 참아내면...”이라고 지적했지만

개인적으론 승민의 정체가 제대로 드러나는 1/3지점까지 꽤 지루한 동어반복으로 읽혔습니다.

, 그 뒤로도 대부분의 이야기는 반복되는 승민의 탈출 시도와 실패,

그리고 뒤로 물러날 줄만 알았던 수명이 조금씩 분노를 느끼게 되는 과정에 할애됐고,

둘의 대척점에 서있는 정신병원의 관계자들의 폭력과 동정이 그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어서

기승전결 식 이야기 전개라기보다는 심리 스릴러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전혀 다른 이유로 정신병원에 갇힌 두 사람이 끝내 자신이 꿈꾸던 세계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뜨거운 감동과 생에 대한 각성이 꿈틀대며, 희망에 대한 끈을 다시 움켜잡게 만드는

마력이 깃든 작품이라는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목표자체가 미약하게 느껴진 탓인지 탈출이 성공하길 바라는 절실함이 들지 않았고

승민의 캐릭터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다소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으로 설정된 듯 한데다

무엇보다 감동, 각성, 희망이라는 걸 어디서 찾고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탓에

어느 정도이상은 심사위원들의 평에 공감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자신을 옥죄는 현실에서 탈출하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과 영화가 팽팽한 긴장감을 갖는 이유는

갇힌 이유, 갇힌 상태의 절망감, 탈출 후 누리고자 하는 바나 목표가 설득력을 갖기 때문인데

수명과 승민의 경우 가장 중요한 목표가 모호하거나 미약해 보이기만 했습니다.

수명에겐 자신을 파멸시킨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게 전부이고,

승민의 경우 복수도 도주도 아닌 판타지 같은 낭만적 자기애의 실현을 목표로 할 뿐입니다.

독자에 따라 이들의 목표를 감동, 각성, 희망의 구현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정유정 스타일의 독하고 구체적인 기승전결을 기대한 저에겐

밋밋하고 어정쩡한 해피엔딩 이상으로 다가오지는 못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서평들을 찾아보니 대부분 호평 일색이라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별 두 개나 세 개에 머문 서평들도 간혹 보여서 다행스럽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독특한 서사와 캐릭터, 성실한 취재에 기반한 디테일한 묘사는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아무래도 감동, 각성, 희망에 방점을 찍은 엔딩에는 제 취향이 적응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7년의 밤‘28’로 눈이 번쩍 뜨였지만 종의 기원에서 실망한 탓인지

이후 출간된 따스하고 다정하고 뭉클하다진이, 지니는 아예 읽을 생각도 안 했는데

아무래도 제겐 독하고 센 정유정 이야기만이 어울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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