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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엄마 ㅣ 케이스릴러
이지은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2020년에 출간된 장르물 가운데 아직 못 읽은 작품들을 살펴보다가 발견한 ‘비행엄마’입니다.
제목은 분명 본 적 있는데 실은 “뒤늦게 비행(非行) 맛에 빠져든 엄마들 이야기”로 오해하곤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라 여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아줌마들의 코믹한 좌충우돌 스토리’가 떠오르는 제목이었다고 할까요?
하지만 ‘케이스릴러 시리즈’ 중 한 편인 ‘행복배틀’을 읽고 쓴 서평의 댓글을 통해
“이 작품은 엄마들의 악인전”이라는 걸 알게 된 뒤 불쑥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20년 만에 돌아온 엄마들의 숙명적인 대결”이라는 출판사 홍보카피대로
이 작품에는 수십 년 동안 증오, 복수심, 업보를 가슴에 새겨온 ‘엄마들’이 등장합니다.
소중한 딸을 잃은 뒤 그 복수를 위해 험난한 삶을 마다하지 않았던 엄마,
살인범 누명을 쓴 것은 물론 그로 인해 딸까지 빼앗겨야 했던 엄마,
그리고 운명처럼 자신이 품게 된 남의 딸을 20년 동안 애지중지 키워온 엄마 등이 그들인데,
현재에 이르러 이들은 서로를 향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20년 동안 등을 지고 살았던 엄마 청옥으로부터 갑작스런 호출을 받은 영도,
20년 동안 소식을 모르던 친모 준미가 옥중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놀라는 영도의 딸 호연,
그리고 이들 사이에 공통분모처럼 존재하는 미스터리한 인물 미셸 등이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그 외에도 적잖은 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270페이지에 불과한 내용임에도 등장인물만 보면 거의 500~600페이지 급 서사에 맞먹는데
그래서인지 어느 지점부터는 메모가 필요해 보일 정도로 무척이나 복잡한 구도를 이룹니다.
거기다가 이 모든 참극의 출발점과 그것의 증식 과정을 그린 과거 이야기들 역시
우연과 필연이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겹치고 또 겹쳐 뒤얽힌 실타래마냥 구성돼있는데
덕분에 짧은 분량임에도 꽤 높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화해는 말할 것도 없고 타협의 여지라곤 조금도 없이
상대를 죽여야만 가슴에 얹힌 무거운 돌덩이를 덜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엄마들’의 폭주는
때론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하고, 때론 서릿발처럼 소름을 돋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들 나름대로 자신의 감정과 소명에 충실하게 ‘살육전’에 임하다 보니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라고 확실히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제목’과 ‘분량’이었는데,
이토록 무겁고 잔혹한 서사에 어울리는 제목이 붙었다면
좀더 스릴러 독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었을 것 같아 무척 아쉬웠고,
등장인물이나 스토리에 어울리는 좀더 두툼한 분량이었다면
읽는 동안 느낀 혼란을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해서 역시 아쉬웠습니다.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인 걸로 보이는데,
이만큼 탄탄한 필력이라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다음 이야기 역시 이만한 서사라면 좀더 분량에 욕심을 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