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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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시인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운 난설헌은 8살에 지은 백옥루 상량문으로 놀라운 재능을 세상에 알린다. 여자에겐 암흑과도 같은 시대였지만, 아버지 초당 허엽과 오빠 허봉은 난설헌의 재능을 아끼고 존중해주었다. 그러나 15살에 김성립과 혼인하며 그녀의 삶은 삐걱대기 시작한다. 신분 차이 때문에 갈라서야 했던 사내 최순치, 똑똑하고 당찬 며느리를 지독히 혐오한 시어머니, 열등감으로 아내에게 마음을 닫은 남편, 아버지와 오빠의 잇따른 객사, 자식들을 앞세운 상실감까지.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시를 쓰는 일, 그뿐이었다. 규범의 족쇄와 규방 속 고통을 모두 끌어안았음에도 난설헌의 영혼은 시 안에서 자유로웠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주로 추미스(추리, 미스터리, 스릴러)에 집착하는 편이지만 나름 역사소설도 좋아하는데, 우연한 기회에 다산북스를 통해 받은 난설헌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란 타이틀까지 갖추고 있어서 큰 기대를 가졌던 작품입니다.

허난설헌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학생 시절에 배운 여성이 글 자체를 금지 당하던 시대에 태어났지만 빼어난 작품들을 남긴 천재 시인”, 또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정도가 전부였습니다. 27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결혼 후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도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들입니다. 혹시나 소설적 허구의 산물은 아닐까, 싶어 인터넷에서 지식백과들을 검색해보니 거의 엇비슷한 내용들이 실려 있었는데, 아마도 그녀가 남긴 시 속에서 그녀의 삶의 모습들을 추정한 결과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작가 스스로 고백했듯 허난설헌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무척 빈약했지만 작가는 거기에 탄탄한 허구와 상상을 덧붙임으로써 불과 27년이란 허난설헌의 짧은 생을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생생히 그려냈습니다. 특히 작가가 가장 공들여 묘사한 대목, 즉 가장 봉건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그녀의 안타깝고 비극적인 운명은 성별을 떠나 어느 독자에게든 강한 인상을 남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삼종지도와 굴종만을 강요받은 것은 물론 지필묵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자신의 치마 끝자락에 시선을 고정해야 했던 조선시대 여성들의 숙명이 유독 허난설헌에게 더 깊고 아픈 상처를 남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지닌 천재적 재능 때문입니다. 8살에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시를 짓지 않았다면, 또 가족들이 그녀의 능력을 아끼고 존중해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허난설헌의 삶은 조금은 덜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수많은 족쇄와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시를 통해 자신을 잃지 않으려 한 허난설헌의 의지를 집요하고 세밀하게 그림으로써 그녀의 아이러니함을 동정하지도 않고 가련히 여기지도 않는 일관적인 시선을 유지합니다. “(허난설헌의) 시는 그 고단한 삶으로 인하여 더욱 처절하고 처연해지며 급기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작품이 된다.”라는 혼불문학상 심사평은 작가의 그런 일관된 시선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실존인물을 다룬 소설이다 보니 소설 자체에 대한 서평을 쓰기가 쉽지 않지만 한두 마디만 덧붙이자면, 우선, 예스러운 비유와 정갈한 고어(古語)가 넘쳐나는 문장들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허난설헌과 그녀 주변의 분위기를 사실적인 문장보다 더 사실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이 작품만의 특별한 매력일 수도 있지만 다소 난해하고 어지럽게 읽힐 여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실존인물이 주인공이라고 해도 나름의 기승전결을 바라는 독자가 많겠지만 이 작품은 허난설헌의 고통스런 삶의 기록에 더 가깝기 때문에 계속 오르막이거나 반대로 계속 내리막처럼 읽힐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개인적으론 분노와 슬픔만이 엇갈리는 이야기에 가끔 숨이 막히듯 답답함을 느끼곤 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을 읽고 허난설헌을 모델로 삼되 조금은 통쾌하고 따뜻하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100% 허구의 이야기를 바라는 독자가 제법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저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허난설헌의 꿈과 삶이 허구를 통해서라도 구현됐으면 하는 바람이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입니다. , 교과서에 실린 단편적인 정보 외에 허난설헌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역시 ‘100% 허구의 이야기에 대한 바람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허난설헌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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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에 젖다 케이스릴러
이수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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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 고향 무억도를 도망치듯 떠나온 정영선은 과거를 지우고 정태희로 개명까지 한 후 강남 사모님이 되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배송된 의문의 향수에 의아해하던 태희는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곤 충격에 빠집니다. 다름 아닌 자신이 버린 이름 정영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잊고 살았던 무억도 시절의 절친들이 갑자기 떼를 지어 나타나선 16년 전 벌어진 한 전학생의 죽음을 거론하며 거액의 돈을 요구합니다.

과거와의 단절을 결혼조건으로 내걸었던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경우 풍족하고 화려한 삶이 단박에 붕괴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태희는 어떻게든 무억도 친구들의 협박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고민하기에 이릅니다.

 

고즈넉이엔티의 케이 스릴러 시리즈는 기성작가보다는 대부분 신인작가의 데뷔작인 작품이 많이 포진돼있습니다. ‘케이 스릴러 시리즈가운데 여덟 번째로 만난 향수에 젖다도 그런 경우인데, 그런 점에서 이 시리즈가 한국 장르물의 든든한 토대로 기능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족도나 평점은 들쑥날쑥한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작 소식이 들리면 어떤 이야기들인지 대략의 소개글이라도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보게 되곤 합니다.

 

향수에 젖다는 과거의 비밀을 놓고 협박, 복수, 살인이 벌어진다는, 다소 고전적인 설정이면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선명한 구도 때문에 선택한 작품입니다. 요약한 줄거리는 초반 전개부 정도만 정리한 것인데, 이 뒤로는 스포일러가 될 내용들이 줄줄이 이어지기 때문에 더는 상세한 소개가 어렵습니다. “인연을 끊어냈던 절친들이 16년 만에 나타나 과거를 들먹이며 협박하자 주인공이 그에 대처한다.”는 이야기에 그쳤다면 뼈대도 근육도 빈약한 단순한 스릴러에 머물렀겠지만, 작가는 태희를 향한 정체불명의 또 다른 위협을 설정함으로써 이야기의 층위도 복잡하게 만들고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감정도 다양하고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태희는 절친들의 협박에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활용하는 것은 물론, 그들 사이의 미묘한 대립 관계를 역이용하며 나름 유리한 싸움을 벌이기도 하지만, 양쪽의 전세는 그야말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좀처럼 승부를 가늠하기 어렵게 전개됩니다. 특히 독자 입장에선 협박에 시달리는 태희를 선한 주인공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여러 복잡한 상황들 때문에 딱히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합니다.

, 돈을 요구하는 절친들보다 훨씬 더 위험해 보이는 누군가의 존재가 독자의 눈길을 계속 사로잡는데, 태희뿐 아니라 절친들 모두에게 의문의 선물(향수와 디퓨저)을 보낸 누군가는 초반부터 16년 전 무억도에서 벌어진 한 전학생의 죽음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는 것으로 소개된 덕분에 비밀과 거짓말, 원한과 복수 등 좀더 긴장감 넘치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스릴러를 구축합니다.

 

중반 또는 중후반까지만 해도 선명한 캐릭터, 단단한 문장들, 깔끔하고 정교한 구성이 돋보여서 작가에게 거는 기대감도 커졌고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너무 궁금했지만, 작가가 승부를 건 트릭이 조금씩 엿보일 때부터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실제로 그 트릭이 완전히 공개될 즈음에는 꽤 큰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 좀처럼 수긍하기 어려운 막판 트릭이 몇 가지 있는데, 이 작품의 트릭이 그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트릭이라도 마지막까지 예상 밖의 전개를 보였다면 얼마든지 박수를 쳐줄 수 있겠지만, 실은 이 작품의 후반부는 트릭 자체도 전형적이었던 것은 물론 주요 인물들의 감정, 목표, 태도 등도 애매모호하게 마무리돼서 책장을 덮는 순간에도 그래서, 다들 어떻게 됐다는 거지?”라는 의문만 머릿속에 남고 말았습니다.

 

막연한 추측이지만, 진부하고 타성적인 엔딩에서 벗어나려다 오히려 이야기가 길을 잃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진의 신작 소식이 들린다면 기꺼이 찾아 읽고 싶은 욕심이 드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만큼 필력과 내공이 돋보였고, 자기 스타일에 잘 맞는 재료들을 끌어 모은다면 향수에 젖다의 아쉬움을 전부 날리고도 남을 매력적인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꽤 높은 확률로 기대하고 싶은 작가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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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몬 부티크
강지영 지음 / 씨네21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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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 또는 불명예라는 딱지가 붙은 멤버들이 모인 하서경찰서 표적수사대’.

유일하게 그 딱지에서 자유로운 경위 민재경은 대원들과 함께 팀장 정두현의 지휘 아래

7년에 걸쳐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나온 수험생 연쇄살인사건을 수사 중입니다.

그런데 재경은 두현을 통해 이해 불가능한 괴짜 인물을 소개받습니다.

일말의 체취만으로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포착해내는 뛰어난 후각의 남자 남타신은

두현으로부터 오래 전부터 수사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받았지만 내내 거절해왔는데,

그런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표적수사대에 도움을 주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온갖 재수 없음의 총집합체인 남타신으로 인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던 재경은

그의 뛰어난 능력을 직접 체험하곤 인내심을 발휘하여 파트너로 받아들입니다.

또 그가 갑자기 수사에 도움을 주기로 한 이유가 자신 때문임을 알곤 깜짝 놀랍니다.

 

고백하자면, ‘페로몬 부티크는 한 번 중도포기했던 작품입니다.

100페이지도 채 못 가 책장을 덮었던 가장 큰 이유는 현실감 없는 멋부림이었는데,

황당하기만 했던 재경과 타신의 첫 만남 에피소드에서 바로 질려버렸기 때문입니다.

동물을 능가하는 후각을 지닌데다 VVIP급 고객을 거느린 향수 전문가인 남타신은

비뚤어지고 뒤틀린 성격에 막말과 안하무인이 몸에 밴 인물인데,

그와 재경과의 첫 만남부터 어이없는 판타지 로맨스 같은 장면이 펼쳐진 탓에

그 뒤의 연쇄살인 이야기를 읽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어찌어찌 다시 연이 닿아 결국 마지막 장까지 읽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역시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었습니다.

사건도, 캐릭터도, 범인의 정체와 동기도 무엇 하나 자연스럽게 따라가지지 않았고,

이야기는 화려하고 복잡하긴 한데 산만하기만 할 뿐 중심이 잡히지 않아 보였습니다.

 

꽤 많은 등장인물들이 죄다 어떤 식으로든 연쇄살인과 엮여 있는데

필연적인 경우도 있지만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연인 경우도 있습니다.

, 소위 찌질이들을 갖다 모아놓은 표적수사대라는 곳은

고위간부 한 사람의 입김만으로도 쉽게 해체시켜버릴 만한 만만한 곳처럼 그려졌지만

정작 훨씬 더 강력한 권력을 지닌 자들조차 무슨 이유에선지 쉽게 손대지 못합니다.

7년을 끌어온 사건인데 유력한 용의자는 어느 날 갑자기 으로 수사선상에 떠올랐고,

범인은 즉시 제거했어야 할 피해자들을 별 이유도 없이 7년 동안 질질 끌며 처리해왔습니다.

재경과 타신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끌려가는 이미지가 더 강했고

어설픈 티격태격 로코의 뒤끝은 조금도 예쁘지도, 흥분되지도 않았습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사건도 복잡다단한데다 스포일러가 될 대목들이 많아서

내용 소개는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인상비평에 가까운 혹평만 하게 됐는데,

대중적이고 말초적인 재미는 분명 여러 곳에서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미스터리도, 로맨스도 여기저기 산만하게 씨앗들만 잔뜩 뿌려놓았을 뿐

무엇 하나 제대로 회수되지 못한 채 어중간한 엔딩을 맞이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강지영을 처음 만난 건 개들이 식사할 시간이라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단편집이었는데,

그 뒤로 만난 살인자의 쇼핑몰’, ‘심여사는 킬러는 대중적 재미와 안정적 구도는 갖췄더라도

개들이 식사할 시간의 강렬한 개성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라 다소 아쉬웠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페로몬 부티크는 한 가지 매력이라도 딱히 손꼽기 어려웠던 것은 물론

강지영의 장점과 필력 역시 찾아보기 힘들었던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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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 케이스릴러
전건우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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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와 사건 설정에 관해 약간 상세한 소개가 포함돼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눈에 파묻혀 고립되어 버리는 강원도 산골 마을 소복리.

첫눈이 내리던 날, 소복리 언덕 위에 세워진 붉은 별장에 정체불명의 외지인들이 찾아온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실종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종된 현장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이 반복해서 발견된다.

문제 청소년 선우와 소복리 출신 말단 형사 동수는 힘을 합쳐 실종자들의 흔적을 찾는다.

그러던 중 붉은 별장과 그곳에 온 낯선 자들이 수상하다는 걸 알게 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전건우는 단편선과 앤솔로지를 빼고 단독 작품만 마귀까지 7편을 출간한 중견작가입니다.

그동안 한국 추리스릴러 단편선 5’(황금가지)에 실린 단편 해무를 시작으로

소용돌이’(엘릭시르)고시원 기담’(캐비넷)을 읽었는데,

중도에 포기한 고시원 기담을 제외하면 단독 작품으로는 두 번째 만남입니다.

 

고립된 산골마을, 정체불명의 외지인과 그들이 머무는 별장, 연쇄실종과 특이한 문양 등

좋아하는 호러 코드들이 많이 깔려 있어서 사뭇 기대가 많은 작품이었는데,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을 좋아하는 저의 취향과도 잘 맞아보였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능력자가 아니라 문제 청소년과 신참 형사라는 평범한 주인공 설정도 좋았고

초반부터 빠른 속도로 호러 코드들을 전개한 점도 눈길을 끌었지만

판이 깔린 뒤 시작된 본격적인 이야기는 점점 위화감과 실망을 안긴 게 사실입니다.

 

호러의 주역인 의 궁극적 목표는 부활과 영생입니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작은 산골마을 소복리를 선택했고

가공할 영적 능력으로 끔찍한 살상을 저지르며 오직 부활과 영생을 향해 진격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해 소복리의 문제 청소년과 신참 형사가 용감하게 나서는 한편

특별한 능력을 지닌 외부의 조력자들까지 그들을 도와 목숨을 걸고 과 싸웁니다.

상투적이긴 해도 친근하고 익숙한 선악의 대결 구도인 건 맞지만

문제는 부활과 영생, 루시퍼와 사타니즘(Satanism)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기대했던 한국형 호러와는 거리가 먼, 조금은 국적불명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는 점입니다.

전형적인 서양식 루시퍼 전승 스토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진부한 형태라고 할까요?

 

때로 지적 과잉으로 보인 루시퍼와 사타니즘에 대한 장황한 설명은 거리감만 준 것은 물론

의 능력과 스케일을 불필요할 정도로 무적에 가깝게 키우면서 되려 역효과만 일으킵니다.

, 능력으로 따지면 은 세계 정복(?)도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대단해 보이는데

(막판에 그 이유가 설명되긴 하지만) 강원도의 작은 마을을 무대로 한 그들의 작전과 계획은

보유한 능력에 비하면 허술하거나 허접하기 그지없습니다.

오지나 다름없는 곳에 만인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유럽 고성 스타일의 별장을 지은 일도,

얼마든지 편하게 의식을 치르고 부활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남들 눈에 띄는 방식으로 요란하게, 그것도 서둘러가며 치른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웠고

자초한 거나 다름없는 방해꾼들때문에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무너지는 과정은

솔직히 애초부터 부활이나 영생을 꿈꿀 만한 깜냥들이 못됐다는 허망함마저 들게 했습니다.

 

사족이지만, 주인공들을 돕기 위해 등장한 소위 유해종교 와해단은 희극적이기만 했습니다.

신부, 수녀, 스님, 무당으로 구성된 이들은 루시퍼에 맞서는 독수리오형제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해내는 일은 별로 없는, 다분히 연극적이고 현실성도 없는 설정에 불과합니다.

물론 문제 청소년과 막내 형사만으로 막강한 을 물리치는 것도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이들에게 단지 이야기의 볼륨감을 키우는 것 이상의 특별한 역할을 부여해야 했고

그래야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저수지, 태풍, 익사 등 물의 공포를 배경으로 삼은 작가의 전작 소용돌이

인간으로서 어찌해볼 수 없는 자연의 힘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등장시키고 있지만

오히려 현실감도 있고, 연쇄살인 코드까지 잘 버무려진 한국형 호러였는데,

그래선지 비슷한 인상을 기대했던 마귀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민속학을 기반으로 일본 고유의 호러 작품들을 창조한 미쓰다 신조처럼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가 잘 녹아있는 전건우의 호러 작품을 꼭 만나보고 싶은 건

아마 저만의 욕심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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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리커버 특별판)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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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으로 처음 만났을 때는 서사와 캐릭터 등 모든 것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고,

‘28’을 읽곤 악의 순수한 단면과 정면으로 마주친 끔찍함에 꽤 긴 후유증을 겪었습니다.

종의 기원은 전작들보다 더 독하고 센 것을 찾다가 길을 잃은 듯한 아쉬움을 느꼈는데,

그래서 오히려 초기작인 내 심장을 쏴라는 남다른 기대감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p213)

 

이 작품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 트라우마로 인해 미쳐서 갇힌정신분열증 환자 이수명과

타고난 운명 때문에 타인에 의해 갇혀서 미쳐가는류승민의 정신병원 탈출기를 그립니다.

이수명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수차례 정신병원을 드나들던 베테랑(?)이라면,

류승민은 재벌가의 유산싸움에 휘말린 끝에 납치되다시피 정신병원에 갇힌 인물입니다.

물론 류승민도 어린 시절부터 방화를 즐겼으니 딱히 평범한 일반인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갇힌 수리 희망병원은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악하고 악질적인 정신병원입니다.

폭력이 난무하고 강제적인 약물과 전기치료로 환자들을 길들이는 게 일상적인 곳입니다.

덕분에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수명과 승민의 고통스런 시간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바깥에서의 삶을 포기한 채 체념의 길을 선택한 수명과 달리

승민은 혹독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바깥으로의 탈출을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승민이 정신병원에 갇힌 사연을 알게 된 수명은 그의 희망과 의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승민의 탈출을 돕는 과정에서 진작 포기했던 바깥세상의 삶에 애착을 갖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스스로 굳게 봉인했던 과거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미션이 정신병원 탈출이니 당연히 마지막에 성공하긴 합니다. 일단....

(수명과 승민의 운명이 탈출 후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009년 세계문학상 심사위원들은 처음 60쪽의 지루함만 참아내면...”이라고 지적했지만

개인적으론 승민의 정체가 제대로 드러나는 1/3지점까지 꽤 지루한 동어반복으로 읽혔습니다.

, 그 뒤로도 대부분의 이야기는 반복되는 승민의 탈출 시도와 실패,

그리고 뒤로 물러날 줄만 알았던 수명이 조금씩 분노를 느끼게 되는 과정에 할애됐고,

둘의 대척점에 서있는 정신병원의 관계자들의 폭력과 동정이 그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어서

기승전결 식 이야기 전개라기보다는 심리 스릴러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전혀 다른 이유로 정신병원에 갇힌 두 사람이 끝내 자신이 꿈꾸던 세계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뜨거운 감동과 생에 대한 각성이 꿈틀대며, 희망에 대한 끈을 다시 움켜잡게 만드는

마력이 깃든 작품이라는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목표자체가 미약하게 느껴진 탓인지 탈출이 성공하길 바라는 절실함이 들지 않았고

승민의 캐릭터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다소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으로 설정된 듯 한데다

무엇보다 감동, 각성, 희망이라는 걸 어디서 찾고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탓에

어느 정도이상은 심사위원들의 평에 공감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자신을 옥죄는 현실에서 탈출하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과 영화가 팽팽한 긴장감을 갖는 이유는

갇힌 이유, 갇힌 상태의 절망감, 탈출 후 누리고자 하는 바나 목표가 설득력을 갖기 때문인데

수명과 승민의 경우 가장 중요한 목표가 모호하거나 미약해 보이기만 했습니다.

수명에겐 자신을 파멸시킨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게 전부이고,

승민의 경우 복수도 도주도 아닌 판타지 같은 낭만적 자기애의 실현을 목표로 할 뿐입니다.

독자에 따라 이들의 목표를 감동, 각성, 희망의 구현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정유정 스타일의 독하고 구체적인 기승전결을 기대한 저에겐

밋밋하고 어정쩡한 해피엔딩 이상으로 다가오지는 못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서평들을 찾아보니 대부분 호평 일색이라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별 두 개나 세 개에 머문 서평들도 간혹 보여서 다행스럽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독특한 서사와 캐릭터, 성실한 취재에 기반한 디테일한 묘사는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아무래도 감동, 각성, 희망에 방점을 찍은 엔딩에는 제 취향이 적응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7년의 밤‘28’로 눈이 번쩍 뜨였지만 종의 기원에서 실망한 탓인지

이후 출간된 따스하고 다정하고 뭉클하다진이, 지니는 아예 읽을 생각도 안 했는데

아무래도 제겐 독하고 센 정유정 이야기만이 어울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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