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 케이스릴러
전건우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캐릭터와 사건 설정에 관해 약간 상세한 소개가 포함돼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눈에 파묻혀 고립되어 버리는 강원도 산골 마을 소복리.

첫눈이 내리던 날, 소복리 언덕 위에 세워진 붉은 별장에 정체불명의 외지인들이 찾아온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실종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종된 현장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이 반복해서 발견된다.

문제 청소년 선우와 소복리 출신 말단 형사 동수는 힘을 합쳐 실종자들의 흔적을 찾는다.

그러던 중 붉은 별장과 그곳에 온 낯선 자들이 수상하다는 걸 알게 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전건우는 단편선과 앤솔로지를 빼고 단독 작품만 마귀까지 7편을 출간한 중견작가입니다.

그동안 한국 추리스릴러 단편선 5’(황금가지)에 실린 단편 해무를 시작으로

소용돌이’(엘릭시르)고시원 기담’(캐비넷)을 읽었는데,

중도에 포기한 고시원 기담을 제외하면 단독 작품으로는 두 번째 만남입니다.

 

고립된 산골마을, 정체불명의 외지인과 그들이 머무는 별장, 연쇄실종과 특이한 문양 등

좋아하는 호러 코드들이 많이 깔려 있어서 사뭇 기대가 많은 작품이었는데,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을 좋아하는 저의 취향과도 잘 맞아보였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능력자가 아니라 문제 청소년과 신참 형사라는 평범한 주인공 설정도 좋았고

초반부터 빠른 속도로 호러 코드들을 전개한 점도 눈길을 끌었지만

판이 깔린 뒤 시작된 본격적인 이야기는 점점 위화감과 실망을 안긴 게 사실입니다.

 

호러의 주역인 의 궁극적 목표는 부활과 영생입니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작은 산골마을 소복리를 선택했고

가공할 영적 능력으로 끔찍한 살상을 저지르며 오직 부활과 영생을 향해 진격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해 소복리의 문제 청소년과 신참 형사가 용감하게 나서는 한편

특별한 능력을 지닌 외부의 조력자들까지 그들을 도와 목숨을 걸고 과 싸웁니다.

상투적이긴 해도 친근하고 익숙한 선악의 대결 구도인 건 맞지만

문제는 부활과 영생, 루시퍼와 사타니즘(Satanism)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기대했던 한국형 호러와는 거리가 먼, 조금은 국적불명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는 점입니다.

전형적인 서양식 루시퍼 전승 스토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진부한 형태라고 할까요?

 

때로 지적 과잉으로 보인 루시퍼와 사타니즘에 대한 장황한 설명은 거리감만 준 것은 물론

의 능력과 스케일을 불필요할 정도로 무적에 가깝게 키우면서 되려 역효과만 일으킵니다.

, 능력으로 따지면 은 세계 정복(?)도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대단해 보이는데

(막판에 그 이유가 설명되긴 하지만) 강원도의 작은 마을을 무대로 한 그들의 작전과 계획은

보유한 능력에 비하면 허술하거나 허접하기 그지없습니다.

오지나 다름없는 곳에 만인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유럽 고성 스타일의 별장을 지은 일도,

얼마든지 편하게 의식을 치르고 부활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남들 눈에 띄는 방식으로 요란하게, 그것도 서둘러가며 치른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웠고

자초한 거나 다름없는 방해꾼들때문에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무너지는 과정은

솔직히 애초부터 부활이나 영생을 꿈꿀 만한 깜냥들이 못됐다는 허망함마저 들게 했습니다.

 

사족이지만, 주인공들을 돕기 위해 등장한 소위 유해종교 와해단은 희극적이기만 했습니다.

신부, 수녀, 스님, 무당으로 구성된 이들은 루시퍼에 맞서는 독수리오형제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해내는 일은 별로 없는, 다분히 연극적이고 현실성도 없는 설정에 불과합니다.

물론 문제 청소년과 막내 형사만으로 막강한 을 물리치는 것도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이들에게 단지 이야기의 볼륨감을 키우는 것 이상의 특별한 역할을 부여해야 했고

그래야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저수지, 태풍, 익사 등 물의 공포를 배경으로 삼은 작가의 전작 소용돌이

인간으로서 어찌해볼 수 없는 자연의 힘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등장시키고 있지만

오히려 현실감도 있고, 연쇄살인 코드까지 잘 버무려진 한국형 호러였는데,

그래선지 비슷한 인상을 기대했던 마귀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민속학을 기반으로 일본 고유의 호러 작품들을 창조한 미쓰다 신조처럼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가 잘 녹아있는 전건우의 호러 작품을 꼭 만나보고 싶은 건

아마 저만의 욕심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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