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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에 젖다 ㅣ 케이스릴러
이수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1월
평점 :
16년 전, 고향 무억도를 도망치듯 떠나온 정영선은 과거를 지우고 ‘정태희’로 개명까지 한 후 ‘강남 사모님’이 되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배송된 의문의 향수에 의아해하던 태희는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곤 충격에 빠집니다. 다름 아닌 자신이 버린 이름 ‘정영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잊고 살았던 무억도 시절의 절친들이 갑자기 떼를 지어 나타나선 16년 전 벌어진 한 전학생의 죽음을 거론하며 거액의 돈을 요구합니다.
과거와의 단절을 결혼조건으로 내걸었던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경우 풍족하고 화려한 삶이 단박에 붕괴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태희는 어떻게든 무억도 친구들의 협박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고민하기에 이릅니다.
고즈넉이엔티의 ‘케이 스릴러 시리즈’는 기성작가보다는 대부분 신인작가의 데뷔작인 작품이 많이 포진돼있습니다. ‘케이 스릴러 시리즈’ 가운데 여덟 번째로 만난 ‘향수에 젖다’도 그런 경우인데, 그런 점에서 이 시리즈가 한국 장르물의 든든한 토대로 기능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족도나 평점은 들쑥날쑥한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작 소식이 들리면 어떤 이야기들인지 대략의 소개글이라도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보게 되곤 합니다.
‘향수에 젖다’는 과거의 비밀을 놓고 협박, 복수, 살인이 벌어진다는, 다소 고전적인 설정이면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선명한 구도 때문에 선택한 작품입니다. 요약한 줄거리는 초반 전개부 정도만 정리한 것인데, 이 뒤로는 스포일러가 될 내용들이 줄줄이 이어지기 때문에 더는 상세한 소개가 어렵습니다. “인연을 끊어냈던 절친들이 16년 만에 나타나 과거를 들먹이며 협박하자 주인공이 그에 대처한다.”는 이야기에 그쳤다면 뼈대도 근육도 빈약한 단순한 스릴러에 머물렀겠지만, 작가는 ‘태희를 향한 정체불명의 또 다른 위협’을 설정함으로써 이야기의 층위도 복잡하게 만들고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감정도 다양하고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태희는 절친들의 협박에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활용하는 것은 물론, 그들 사이의 미묘한 대립 관계를 역이용하며 나름 유리한 싸움을 벌이기도 하지만, 양쪽의 전세는 그야말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좀처럼 승부를 가늠하기 어렵게 전개됩니다. 특히 독자 입장에선 협박에 시달리는 태희를 ‘선한 주인공’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여러 복잡한 상황들 때문에 딱히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돈을 요구하는 절친들보다 훨씬 더 위험해 보이는 ‘누군가’의 존재가 독자의 눈길을 계속 사로잡는데, 태희뿐 아니라 절친들 모두에게 의문의 선물(향수와 디퓨저)을 보낸 ‘누군가’는 초반부터 16년 전 무억도에서 벌어진 한 전학생의 죽음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는 것으로 소개된 덕분에 비밀과 거짓말, 원한과 복수 등 좀더 긴장감 넘치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스릴러를 구축합니다.
중반 또는 중후반까지만 해도 선명한 캐릭터, 단단한 문장들, 깔끔하고 정교한 구성이 돋보여서 작가에게 거는 기대감도 커졌고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너무 궁금했지만, 작가가 승부를 건 트릭이 조금씩 엿보일 때부터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실제로 그 트릭이 완전히 공개될 즈음에는 꽤 큰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 좀처럼 수긍하기 어려운 ‘막판 트릭’이 몇 가지 있는데, 이 작품의 트릭이 그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트릭이라도 마지막까지 예상 밖의 전개를 보였다면 얼마든지 박수를 쳐줄 수 있겠지만, 실은 이 작품의 후반부는 트릭 자체도 전형적이었던 것은 물론 주요 인물들의 감정, 목표, 태도 등도 애매모호하게 마무리돼서 책장을 덮는 순간에도 “그래서, 다들 어떻게 됐다는 거지?”라는 의문만 머릿속에 남고 말았습니다.
막연한 추측이지만, 진부하고 타성적인 엔딩에서 벗어나려다 오히려 이야기가 길을 잃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진의 신작 소식이 들린다면 기꺼이 찾아 읽고 싶은 욕심이 드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만큼 필력과 내공이 돋보였고, 자기 스타일에 잘 맞는 재료들을 끌어 모은다면 ‘향수에 젖다’의 아쉬움을 전부 날리고도 남을 매력적인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꽤 높은 확률로 기대하고 싶은 작가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