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 Medusa Collection 1
토머스 H. 쿡 지음, 김시현 옮김 / 시작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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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52년 가을, 뉴욕. 공원 연못가에서 8살 소녀 캐시 레이크의 사체가 발견되고, 인근 굴다리 아래 살던 노숙자 앨버트 스몰스가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됩니다. 하지만 심증만 가득할 뿐 물증도 목격자도 없고 자백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더는 스몰스를 붙잡아둘 수 없게 됐고, 경찰은 그를 풀어줘야 하는 다음날 오전 6시까지 12시간 동안 최종 심문을 가하기로 합니다. 담당형사인 코언과 피어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몰스를 심문하지만 좀처럼 자백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스몰스의 과거를 파헤치기로 한 코언은 피어스를 그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보내고 홀로 심문을 이어갑니다. 잔혹한 연쇄 아동살해범이 분명해 보이지만 심문이 진행될수록 코언은 스몰스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위화감만 느낄 뿐입니다.

 

토머스 H. 쿡은 해외에서의 명성에 비해 한국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한 작가입니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앤솔로지를 제외하고 그가 펴낸 작품이 2018년까지 모두 33편인데, 한국에는 6편만 소개된 상태이고, 그나마도 2017년에 출간된 브레이크하트 힐’(Breakheart Hill, 1995)을 끝으로 5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6편 중 줄리언 웰즈의 죄를 제외하고 모두 읽었으니 쿡의 성향을 어느 정도는 파악했다고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쿡이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해외에서 그의 강점이자 미덕으로 꼽는 이유, 아름다우면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때문으로 보입니다. 깔끔한 미스터리도, 화려하거나 인상적인 스릴러도 아닌 그의 작품들은 매번 비슷한 인상과 여운을 남기곤 했는데, 읽는 내내 마음 한쪽에 무거운 돌이 얹힌 듯한 불편함과 묵직함을 감수해야 했고,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한없는 안타까움 혹은 비정함이 전신을 뒤덮는 경험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상처 입은 천사처럼 글을 쓰는 작가’, ‘어두운 렌즈를 통해 밤을 그려내 영혼을 사로잡는 작가’, ‘음울한 아름다움과 철학적 고민을 담은 스릴러등이 쿡에게 바쳐진 헌사들인데, 바로 이런 매력들이 한국에선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심문은 개인적으론 붉은 낙엽다음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역시나 쿡의 환영받지 못한 재능이 강렬하게 배어있는 작품이라 소수의 팬들 외엔 쉽게 소구하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증이나 단서 외에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용의자의 자백밖에 없습니다. 심문은 용의자가 뛰어난 연기력을 지녔거나 애초 무죄라면 그저 강압적이되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는 무력한 수단입니다. 8살 소녀를 상대로 악랄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분명한 노숙자 스몰스가 범행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 과거의 행적에 대해서도 입을 꼭 다문 탓에 담당형사인 코언과 피어스는 12시간이라는 시간제한까지 걸린 이 최종 심문이 더더욱 무력하게만 느껴집니다. ‘착한 경찰-나쁜 경찰’, ‘어르고 달래다가 느닷없이 윽박지르기’, ‘감정에 호소하기등 폭력 외에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전략을 구사하지만 스몰스의 태도는 체포됐을 당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어쩌면 잔혹한 연쇄 아동살해범일지도 모르는 스몰스가 자유의 몸이 될 오전 6시는 속절없이 다가옵니다.

 

심문정의롭고 선한 경찰이 심문과 단서 추적을 병행하며 악당을 응징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딘가 다른 세계에 정신줄을 놓고 온 것 같은 평범한 노숙자 스몰스에게서 소녀 살해범의 기운 같은 건 엿보이지도 않습니다. 담당형사 중 유대인인 코언은 2차 대전 중 목격한 동족의 대량학살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있고, 피어스는 어린 딸을 무참한 범죄로 잃은데다 그 용의자가 유유히 자유의 몸이 된 악몽을 품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 외에도 마약중독으로 만신창이가 된 아들을 둔 수사반장, 중후한 은발과 관대한 인격을 지닌 듯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진 경찰청장, 무능하기 짝이 없지만 유일한 쓸모 한 가지 때문에 해고를 면한 부패한 경찰 등 소녀 살인사건을 둘러싼 인물 대부분이 악취와 불온함이 잠식한 1950년대 초반 뉴욕의 뒷골목 풍경과 꼭 닮아있어서 단순히 누가 범인인가? 스몰스는 정말 무고한가?”라는 미스터리 자체보다 더 눈길을 끕니다.

 

인물도, 사건도 어디 하나 밝은 구석을 찾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문아름다우면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로 읽히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쿡의 문장은 아름다움도 고통스러움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냉엄한 하드보일드 스타일마냥 건조하고 객관적입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은 페이지와 챕터를 이루면서 쿡에게 바쳐진 헌사들이 그저 사탕발림이나 형식적인 예의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입증합니다. 읽을 때마다 힘들고 불편하면서도 간혹 그의 작품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오르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약 같은 매력이라고나 할까요?

 

심문의 엔딩은 화들짝 놀랄 정도는 아니어도 묵직한 반전을 품고 있습니다. 동시에 소녀 살해사건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 특히 최종 심문에 관여한 사람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과 허탈함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깊디깊은 심연 같으면서도 아주 미약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미묘한 엔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에 소개된 쿡의 작품 중 유일하게 읽지 않은 건 줄리언 웰즈의 죄밖에 없습니다. 언제 읽을지 기약은 없지만 분명 언젠가 쿡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튀어오를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더 이상 쿡의 작품이 한국에 소개되지 않는다면) “더는 읽을 게 없구나.”라는 진한 아쉬움을 느낄 것만 같습니다. ‘다시는 읽고 싶지 않지만, 기어이 다시 읽게 되는 작가가 몇 명 있는데 아마도 쿡은 그 목록에선 거의 최상단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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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선 Oslo 1970 Series 2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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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온 스노우에 이은 오슬로 1970’s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다르지만 시공간적 배경이 동일하고 조연들(오슬로의 암흑가를 양분하고 있던 보스들)도 같은 인물이라 두 작품은 거의 쌍둥이 급으로 닮은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를 연상시키는 비장미와 로맨스의 조합이라든가 킬러지만 킬러로서의 덕목을 상실한 아이러니한 캐릭터라든가 주인공 주변을 위성처럼 떠돌며 그의 트라우마를 보듬어주는 상처투성이 여인이라든가 많은 부분에서 무척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6년 만에 다시 읽었지만 두 작품 모두 요 네스뵈의 새로운 면모를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작품들이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오슬로의 암흑가는 호프만과 뱃사람이 양분하고 있었습니다. 전작인 블러드 온 스노우의 주인공 올라브는 피도 눈물도 없는 프로페셔널 킬러였지만 아내를 살해하라는 보스 호프만을 배신하고 비극의 길을 걸었던 인물입니다. 반면 미드나잇 선의 주인공 울프는 호프만 사후 오슬로를 장악한 뱃사람을 배신하는 킬러인데, 문제는 그가 사람 하나 제대로 죽이지 못하는 어리숙한 인물이란 점입니다. 애초 킬러의 자질이라곤 조금도 없는 소심남이지만 엉뚱한 오해 때문에 반강제로 등을 떠밀린 끝에 킬러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 울프가 딸의 치료비를 위해 암살 대상을 살려 보낸 뒤 돈을 챙깁니다. 하지만 운명은 울프의 편이 아니어서 그는 우여곡절 끝에 황량하고 척박한 노르웨이의 최북단 핀마르크 주의 코순이라는 마을에 몸을 숨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0살 소년 크누트와 그의 어머니 레아를 만납니다. 언제 자신을 찾아올지 모르는 뱃사람의 킬러를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블러드 온 스노우의 올라브가 그랬듯 울프 역시 절망적인 캐릭터입니다. 가족으로부터, 사랑으로부터 도망치기 급급했던 고독한 존재였고, 지금도 심연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어둠과 추위와 죽음 뿐이라 확신하며 생각하는 사람도, 돌봐줄 사람도, 돌봐야 할 사람도 없는삶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런 그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땅으로 도망친 끝에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인 레아를 만난 일은 새로운 비극의 시작일 수도, 연약한 희망의 끈을 잡는 일일 수도 있어서 시종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말하자면 미드나잇 선은 소심한 킬러의 사투의 기록이자 수렁에 빠진 두 남녀의 로맨스입니다. 이야기의 흐름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통속적으로 흘러가지만, 요 네스뵈 특유의 문장과 매력적인 인물들 덕분에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습니다.

 

(‘블러드 온 스노우의 서평에서도 썼듯이)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요 네스뵈의 대표 캐릭터 해리 홀레가 경찰이 아니라 킬러가 됐다면 올라브 아니면 울프 둘 중 한 인물이 됐을 게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안과 밖으로 가시를 두른 채 자신은 물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상처 주는 인물, 하지만 저 깊은 곳 어딘가에 아주 작은 한 조각의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 그래서 차라리 자신이 더 다치고 상처받더라도 결국엔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고 마는 인물. 해리와 올라브와 울프는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긴 하지만 속내를 뜯어보면 이란성 쌍둥이 같은 형제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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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데이 아르테 미스터리 15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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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로언, 제니퍼, 이지. 대학시절부터 20년 동안 절친으로 지내온 네 사람은 각자의 가족들을 데리고 남프랑스의 고급 별장에서 1주일간의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합니다. 하지만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남편 숀의 폰에서 불륜의 흔적을 발견한 케이트는 충격과 절망에 사로잡힙니다. 더욱 놀라운 건 숀과 메시지를 주고받은 여자가 절친 셋 중 한 명이 틀림없다는 점입니다. 분노와 자책을 거듭하며 싸울 것인지, 떠날 것인지 혼란을 겪던 케이트는 별장에서 절친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자신을 배신한 게 누구인지 알아내기로 결심합니다.

 

함께 1주일의 휴가를 보내게 된 절친 가운데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케이트가 배신자를 찾아 나선다는 설정은 확장된 도메스틱 스릴러 구도이자 밀실 아닌 밀실에서 범인을 찾는 서사와 닮은꼴이라 초반부터 눈길을 끕니다. 남편은 물론 친구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까지 눈여겨보며 은밀하게 숨겨진 불륜의 흔적을 캐내려는 케이트의 심정은 남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광과는 대조적으로 거의 숨 막힐 듯한 절박함 그 자체입니다. 더구나 세 친구 모두 의심스러운 언행들을 거리낌없이 저지르는데다 남편 숀 역시 수시로 부적절한 모습을 보이는 탓에 케이트의 혼란은 더욱 가중됩니다. 나보다 똑똑하고 돈 잘 버는 로언, 나보다 예쁜데다 학창시절 숀의 연인이었던 제니퍼, 마흔까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싱글 생활을 즐기다가 정착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매력적인 이지, 그리고 여전히 여성들의 눈길을 끄는 다정다감한 남편 숀. 이들은 하나같이 케이트로 하여금 분노 이상의 자책과 열등감을 느끼게 만드는 인물들입니다.

 

절친들 가운데 배신자를 찾아내려는 케이트의 이야기가 중심축이지만, 그녀들의 남편과 자식들의 이야기 역시 꽤 큰 비중으로 나란히 전개됩니다. 케이트의 남편 숀을 비롯하여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는 남편, 문제 있는 자식들을 마치 연구대상인 타인처럼 여길 뿐인 상담심리사 남편이 등장하고, 단순히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중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예비 사이코패스 10대 형제와 역시 10대지만 뭔가 심각한 고민거리를 지닌 듯한 소녀 등 주인공들 못잖게 눈길을 끄는 문제적 가족들이 시한폭탄마냥 고급별장을 어슬렁거립니다.

 

출판사 소개글 중 마지막 100페이지를 위해 달려가는 심리 스릴러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 작품을 잘 압축한 카피입니다. “절친들 중 진짜 불륜녀가 있을까?” “혹시 케이트가 불륜의 증거로 여긴 단서들이 다른 사건과 어떤 식으로 연결돼있는 건 아닐까?” 이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막판 100페이지에 걸쳐 폭죽처럼 터지기 때문입니다. 앞선 500여 페이지가 시속 60km의 정속주행 구간이었다면, 막판 100페이지는 그야말로 아우토반 그 자체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우선 케이트의 직업은 런던경찰청 범죄과학수사관으로 설정돼있지만 그 재능이 특별히 발휘되진 않습니다. 또 막판 100페이지가 분명 전광석화 같은 전개를 보이긴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정속으로 주행한 서론이 너무 길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작인 ‘29에서도 비슷한 아쉬움을 느꼈는데, ‘홀리데이의 경우 인물과 사건만 놓고 보면 600여 페이지의 분량까지 필요해 보이진 않았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 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케이트의 의심을 초래한 숀의 수상쩍은 행동들의 진짜 이유, 그러니까 막판에 드러난 진짜 사건은 개연성도 충분하고 얼마든지 납득 가능한 설정이지만 다소 뜬금없어 보인 면도 없지 않습니다. 물론 작가가 중간중간 노골적인 힌트를 주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역시 앞선 500여 페이지는 너무 길었다.”라는 느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데뷔작인 리얼 라이즈를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었지만 ‘29에서 다소 실망한 기억이 있어서 세 번째 작품인 홀리데이는 남다른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와 취향이 잘 맞는 작가는 아닌 것 같지만, T. M. 로건이 궁금한 독자라면 우선 리얼 라이즈를 먼저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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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섀도우
마르크 파스토르 지음, 유혜경 옮김 / 니케북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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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매춘부의 아이들이 연이어 실종됩니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물론 실종된 아이들의 어머니들마저 매춘부라는 신분 때문에 신고조차 하지 못합니다. 범인이 괴물이니 흡혈귀니 불온한 소문만 무성한 가운데 모이세스와 후안은 경찰 수뇌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아이들을 찾는데 전력을 다합니다. 어딘가 수상쩍은 오스트리아 출신 골상학 박사 이삭의 설명을 듣고 아이들의 피를 탐하는 흡혈귀의 범행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게 된 모이세스는 그와 동시에 납치된 아이들을 성매매에 이용하는 대형 매음굴의 존재를 파악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경찰 수뇌부는 모이세스의 수사를 중지시킵니다. 그런 가운데 평범한 중산층의 아이까지 실종되자 바르셀로나는 공포에 휩싸입니다.

 

언뜻 보면 아동을 대상으로 한 엽기적인 연쇄살인마 혹은 권력형 인신매매 사건을 다룬 정통 스릴러 같지만, ‘바르셀로나 섀도우는 괴담 스타일의 호러물에 더 가까운 작품입니다.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아이들의 순수한 피를 마시는 흡혈귀, 살해한 아이들의 신체와 장기를 약재로 만들어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밀매하는 인물, 여자라면 시체라도 마다하지 않는 중증 시간증(屍姦症) 소년, 시신을 해부하여 인간이 짐승처럼 행동하게 하는 메커니즘을 밝혀내려는 수상쩍은 골상학 박사, 그리고 이야기 곳곳에서 1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저승사자에 이르기까지 현실을 뛰어넘는 캐릭터가 훨씬 더 많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수사를 이끄는 주인공 모이세스는 수뇌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매춘부의 아이들을 찾아 나선 정의로운 경찰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내 몰래 수시로 매춘부를 찾는 호색한이기도 하고, 상관의 명령을 개떡처럼 여기는 반골 기질인가 하면,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셜록 홈즈 시리즈를 비롯 탐정소설의 마니아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인물입니다. 뼛속까지 마초 기질인 정의로운 한량이라고 할까요?

 

모이세스와 후안의 수사는 현실감을 갖춘 미스터리와 스릴러로 포장돼있지만,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이 워낙 비현실적 호러물 캐릭터라 좀처럼 이야기의 정체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이야기가 3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와중에 아무런 예고나 줄 바꿈도 없이 수시로 툭툭 튀어나오는 1인칭 화자, 그것도 죽은 자의 영혼을 데려가는 저승사자의 존재 때문에 독자 입장에선 무척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는 연극 속 설명역처럼 여기저기 출몰하여 그동안 자신이 거둬간 영혼들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독자가 궁금히 여기는 정보들을 제공하긴 하지만 그다지 눈길을 끌진 못합니다. 그나마 (초반부터 정체가 공개된) 흡혈귀이자 연쇄살인마인 40대 여성 엔리케타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려주는 대목이 흥미롭긴 하지만 결과적으론 이야기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La Mala Dona’인데 어설프게 번역하면 악녀쯤 되는 것 같습니다. 즉 수사를 맡은 모이세스만큼 비중이 큰 흡혈귀이자 연쇄살인마인 40대 여성 엔리케타를 지칭하는 듯한데, 이 인물은 실은 20세기 초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바르셀로나의 흡혈귀로도 알려진 그녀는 아이들의 매춘을 알선했고, 아이들을 납치하여 살해한 다음 신체 부위를 이용해 연고와 물약을 만들어 부유한 고객에게 팔았다.”고 합니다. 팩션의 주인공으론 더없이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정작 이 작품에서는 너무 신비하거나 애매하게 그려진 탓에 다 읽고도 그녀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역할도 등장 이유도 불분명한 저승사자대신 엔리케타를 전면에 내세웠더라면 다소 평범하긴 해도 훨씬 더 흥미진진한 스릴러가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1911년의 바르셀로나에 대해 작가는 살아있는 자들의 묘지또는 빈부 격차가 극심하고 질병과 강력범죄가 만연한 암울한 공간으로 설명합니다. 바르셀로나가 풍기는 불온한 기운과 섬뜩한 호러물 캐릭터들이 자아낸 서늘한 분위기는 압권이었지만, 이야기 자체가 너무 산만하고 모호해서 좀처럼 몰입하기 어려웠던 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불가능한 발상이긴 하지만 누군가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고스란히 재활용하여 좀더 대중적이고 선명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면 제 취향에 너무나도 잘 맞는 매력적인 호러 스릴러가 돼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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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론
리사 가드너 지음, 박태선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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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세운 책장에 방치된 책 구하기계획 중 절대 빼먹지 않기로 결심한 게 리사 가드너의 얼론입니다. 2005년 작품으로 한국엔 2007년에 소개됐고, 그해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가 선정한 10대 스릴러에도 뽑힌 작품이라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읽는 건 물론 구매조차 차일피일 미루기만 해왔습니다. 결국 인터넷 중고서점을 통해 손에 넣은 건 출간 후 10년이 훌쩍 지난 시점이었는데, 그러고도 5년을 더 방치했으니 책에 대한 미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래서 올해는 어떻게든 읽어내리라 다짐하게 된 것입니다.

 

분량에 걸맞게 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인물은 두 명입니다. 심야에 아내와 아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남자를 사살했지만 오히려 살인범으로 몰린 경찰 저격수 바비, 남편의 폭력과 바람에 시달리면서도 병약한 아들 네이던을 위해 헌신해왔지만 시아버지로부터 경찰을 끌어들여 남편을 죽게 만든 악녀취급을 받으며 양육권과 재산을 모조리 빼앗길 위기에 처한 캐서린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며느리 캐서린으로부터 손자 네이던을 빼앗고 저격수 바비의 삶을 박살내겠다고 으르렁대는 냉혈한 고위급 판사 제임스와 25년 만에 가석방된 뒤 캐서린 주위의 인물들을 살해하고 다니는 일명 미스터 보수리처드가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출판사 홍보카피에 심리범죄스릴러라는 문구가 포함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단지 저격수 바비의 누명을 벗기고 진실을 밝히는 것 이상의 미묘한 심리극 서사가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두 주인공 바비와 캐서린 모두 어린 시절 평생 지워지지 않을 끔찍한 폭력을 겪었으며 지금도 그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인데, 하필 그런 두 사람이 정당한 법 집행이냐? 사전에 모의된 계획살인이냐?”라는 미묘한 사건을 통해 만난 탓에 그들의 어둡고 음습한 내면이 적잖은 분량을 통해 설명됩니다.

 

바비의 경우 베테랑으로서 확실한 판단에 의거하여 예비살인자를 사살했다고 확신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쩌면 폭력으로 인해 가족이 해체된 이후 억눌러왔던 자기 안의 무언가가 방아쇠를 당기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빠집니다. 또 남편이 총을 겨눈 와중에도 아들을 꼭 끌어안고 있던 캐서린에게 정체모를 욕망을 느끼는 자신이 너무나도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캐서린의 경우는 더욱 참혹합니다. 12살 때 소아성애자에게 납치되어 28일간 감금됐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그녀는 몸과 마음에 남은 깊은 트라우마로 인해 자살시도까지 경험한 바 있습니다. 부자 남편을 만나 잠시 행복을 누렸지만 결국 또 다른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 그녀는 이제 병약한 아들을 학대한 혐의와 함께 의도적으로 남편을 도발하여 죽음에 이르게 만든 악녀로 취급받기에 이릅니다.

 

이야기를 좀더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은 희대의 소아성애자이자 소시오패스인 일명 미스터 보수리처드입니다. 과거 캐서린을 납치 감금했던 그가 25년 만에 누군가의 사주로 가석방된 뒤 캐서린 주변 인물들을 살해하면서 바비 사건과 접점을 이뤄가는 과정은 흥미로우면서도 시종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부와 권력을 지닌 냉혹한 판사 제임스가 며느리 캐서린을 증오하며 손자 네이던의 양육권을 확보하려는 이유 역시 마지막까지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클라이맥스 즈음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과 함께 밝혀집니다.

 

매력적인 주조연과 잇달아 벌어지는 사건들 덕분에 페이지는 정신없이 넘어갔지만, 막상 다 읽고 보니 뭔가 좀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맛깔난 재료들이 너무 많이 들어간 탓에 정작 결과물은 무슨 맛인지 알 수 없게 됐다고 할까요? 미묘한 사건을 통해 얽힌 데다 각자 폭력의 트라우마를 품고 있는 바비와 캐서린, 25년 만에 출소한 뒤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소시오패스, 비밀을 움켜쥐고 있는 듯한 고위급 판사의 폭주 등 따로 떼어놓고 보면 별개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모두 매력적인 요소들인데 왠지 무리하게 하나의 이야기 속에 욱여넣은 듯한 인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서점의 평가가 다소 극과 극으로 나뉜 건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론을 제외하고 한국에 소개된 리사 가드너의 작품은 서바이버 클럽과 앤솔로지 한 편(‘페이스 오프’)뿐입니다. ‘서바이버 클럽역시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돼있는 신세인데, 내년쯤엔 쌓인 먼지를 털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얼론보다 3년 앞서 출간된 작품이지만 리사 가드너의 진면목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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