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 Medusa Collection 1
토머스 H. 쿡 지음, 김시현 옮김 / 시작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1952년 가을, 뉴욕. 공원 연못가에서 8살 소녀 캐시 레이크의 사체가 발견되고, 인근 굴다리 아래 살던 노숙자 앨버트 스몰스가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됩니다. 하지만 심증만 가득할 뿐 물증도 목격자도 없고 자백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더는 스몰스를 붙잡아둘 수 없게 됐고, 경찰은 그를 풀어줘야 하는 다음날 오전 6시까지 12시간 동안 최종 심문을 가하기로 합니다. 담당형사인 코언과 피어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몰스를 심문하지만 좀처럼 자백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스몰스의 과거를 파헤치기로 한 코언은 피어스를 그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보내고 홀로 심문을 이어갑니다. 잔혹한 연쇄 아동살해범이 분명해 보이지만 심문이 진행될수록 코언은 스몰스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위화감만 느낄 뿐입니다.

 

토머스 H. 쿡은 해외에서의 명성에 비해 한국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한 작가입니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앤솔로지를 제외하고 그가 펴낸 작품이 2018년까지 모두 33편인데, 한국에는 6편만 소개된 상태이고, 그나마도 2017년에 출간된 브레이크하트 힐’(Breakheart Hill, 1995)을 끝으로 5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6편 중 줄리언 웰즈의 죄를 제외하고 모두 읽었으니 쿡의 성향을 어느 정도는 파악했다고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쿡이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해외에서 그의 강점이자 미덕으로 꼽는 이유, 아름다우면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때문으로 보입니다. 깔끔한 미스터리도, 화려하거나 인상적인 스릴러도 아닌 그의 작품들은 매번 비슷한 인상과 여운을 남기곤 했는데, 읽는 내내 마음 한쪽에 무거운 돌이 얹힌 듯한 불편함과 묵직함을 감수해야 했고,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한없는 안타까움 혹은 비정함이 전신을 뒤덮는 경험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상처 입은 천사처럼 글을 쓰는 작가’, ‘어두운 렌즈를 통해 밤을 그려내 영혼을 사로잡는 작가’, ‘음울한 아름다움과 철학적 고민을 담은 스릴러등이 쿡에게 바쳐진 헌사들인데, 바로 이런 매력들이 한국에선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심문은 개인적으론 붉은 낙엽다음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역시나 쿡의 환영받지 못한 재능이 강렬하게 배어있는 작품이라 소수의 팬들 외엔 쉽게 소구하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증이나 단서 외에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용의자의 자백밖에 없습니다. 심문은 용의자가 뛰어난 연기력을 지녔거나 애초 무죄라면 그저 강압적이되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는 무력한 수단입니다. 8살 소녀를 상대로 악랄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분명한 노숙자 스몰스가 범행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 과거의 행적에 대해서도 입을 꼭 다문 탓에 담당형사인 코언과 피어스는 12시간이라는 시간제한까지 걸린 이 최종 심문이 더더욱 무력하게만 느껴집니다. ‘착한 경찰-나쁜 경찰’, ‘어르고 달래다가 느닷없이 윽박지르기’, ‘감정에 호소하기등 폭력 외에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전략을 구사하지만 스몰스의 태도는 체포됐을 당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어쩌면 잔혹한 연쇄 아동살해범일지도 모르는 스몰스가 자유의 몸이 될 오전 6시는 속절없이 다가옵니다.

 

심문정의롭고 선한 경찰이 심문과 단서 추적을 병행하며 악당을 응징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딘가 다른 세계에 정신줄을 놓고 온 것 같은 평범한 노숙자 스몰스에게서 소녀 살해범의 기운 같은 건 엿보이지도 않습니다. 담당형사 중 유대인인 코언은 2차 대전 중 목격한 동족의 대량학살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있고, 피어스는 어린 딸을 무참한 범죄로 잃은데다 그 용의자가 유유히 자유의 몸이 된 악몽을 품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 외에도 마약중독으로 만신창이가 된 아들을 둔 수사반장, 중후한 은발과 관대한 인격을 지닌 듯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진 경찰청장, 무능하기 짝이 없지만 유일한 쓸모 한 가지 때문에 해고를 면한 부패한 경찰 등 소녀 살인사건을 둘러싼 인물 대부분이 악취와 불온함이 잠식한 1950년대 초반 뉴욕의 뒷골목 풍경과 꼭 닮아있어서 단순히 누가 범인인가? 스몰스는 정말 무고한가?”라는 미스터리 자체보다 더 눈길을 끕니다.

 

인물도, 사건도 어디 하나 밝은 구석을 찾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문아름다우면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로 읽히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쿡의 문장은 아름다움도 고통스러움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냉엄한 하드보일드 스타일마냥 건조하고 객관적입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은 페이지와 챕터를 이루면서 쿡에게 바쳐진 헌사들이 그저 사탕발림이나 형식적인 예의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입증합니다. 읽을 때마다 힘들고 불편하면서도 간혹 그의 작품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오르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약 같은 매력이라고나 할까요?

 

심문의 엔딩은 화들짝 놀랄 정도는 아니어도 묵직한 반전을 품고 있습니다. 동시에 소녀 살해사건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 특히 최종 심문에 관여한 사람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과 허탈함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깊디깊은 심연 같으면서도 아주 미약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미묘한 엔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에 소개된 쿡의 작품 중 유일하게 읽지 않은 건 줄리언 웰즈의 죄밖에 없습니다. 언제 읽을지 기약은 없지만 분명 언젠가 쿡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튀어오를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더 이상 쿡의 작품이 한국에 소개되지 않는다면) “더는 읽을 게 없구나.”라는 진한 아쉬움을 느낄 것만 같습니다. ‘다시는 읽고 싶지 않지만, 기어이 다시 읽게 되는 작가가 몇 명 있는데 아마도 쿡은 그 목록에선 거의 최상단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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