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론
리사 가드너 지음, 박태선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연초에 세운 책장에 방치된 책 구하기계획 중 절대 빼먹지 않기로 결심한 게 리사 가드너의 얼론입니다. 2005년 작품으로 한국엔 2007년에 소개됐고, 그해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가 선정한 10대 스릴러에도 뽑힌 작품이라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읽는 건 물론 구매조차 차일피일 미루기만 해왔습니다. 결국 인터넷 중고서점을 통해 손에 넣은 건 출간 후 10년이 훌쩍 지난 시점이었는데, 그러고도 5년을 더 방치했으니 책에 대한 미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래서 올해는 어떻게든 읽어내리라 다짐하게 된 것입니다.

 

분량에 걸맞게 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인물은 두 명입니다. 심야에 아내와 아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남자를 사살했지만 오히려 살인범으로 몰린 경찰 저격수 바비, 남편의 폭력과 바람에 시달리면서도 병약한 아들 네이던을 위해 헌신해왔지만 시아버지로부터 경찰을 끌어들여 남편을 죽게 만든 악녀취급을 받으며 양육권과 재산을 모조리 빼앗길 위기에 처한 캐서린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며느리 캐서린으로부터 손자 네이던을 빼앗고 저격수 바비의 삶을 박살내겠다고 으르렁대는 냉혈한 고위급 판사 제임스와 25년 만에 가석방된 뒤 캐서린 주위의 인물들을 살해하고 다니는 일명 미스터 보수리처드가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출판사 홍보카피에 심리범죄스릴러라는 문구가 포함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단지 저격수 바비의 누명을 벗기고 진실을 밝히는 것 이상의 미묘한 심리극 서사가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두 주인공 바비와 캐서린 모두 어린 시절 평생 지워지지 않을 끔찍한 폭력을 겪었으며 지금도 그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인데, 하필 그런 두 사람이 정당한 법 집행이냐? 사전에 모의된 계획살인이냐?”라는 미묘한 사건을 통해 만난 탓에 그들의 어둡고 음습한 내면이 적잖은 분량을 통해 설명됩니다.

 

바비의 경우 베테랑으로서 확실한 판단에 의거하여 예비살인자를 사살했다고 확신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쩌면 폭력으로 인해 가족이 해체된 이후 억눌러왔던 자기 안의 무언가가 방아쇠를 당기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빠집니다. 또 남편이 총을 겨눈 와중에도 아들을 꼭 끌어안고 있던 캐서린에게 정체모를 욕망을 느끼는 자신이 너무나도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캐서린의 경우는 더욱 참혹합니다. 12살 때 소아성애자에게 납치되어 28일간 감금됐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그녀는 몸과 마음에 남은 깊은 트라우마로 인해 자살시도까지 경험한 바 있습니다. 부자 남편을 만나 잠시 행복을 누렸지만 결국 또 다른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 그녀는 이제 병약한 아들을 학대한 혐의와 함께 의도적으로 남편을 도발하여 죽음에 이르게 만든 악녀로 취급받기에 이릅니다.

 

이야기를 좀더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은 희대의 소아성애자이자 소시오패스인 일명 미스터 보수리처드입니다. 과거 캐서린을 납치 감금했던 그가 25년 만에 누군가의 사주로 가석방된 뒤 캐서린 주변 인물들을 살해하면서 바비 사건과 접점을 이뤄가는 과정은 흥미로우면서도 시종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부와 권력을 지닌 냉혹한 판사 제임스가 며느리 캐서린을 증오하며 손자 네이던의 양육권을 확보하려는 이유 역시 마지막까지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클라이맥스 즈음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과 함께 밝혀집니다.

 

매력적인 주조연과 잇달아 벌어지는 사건들 덕분에 페이지는 정신없이 넘어갔지만, 막상 다 읽고 보니 뭔가 좀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맛깔난 재료들이 너무 많이 들어간 탓에 정작 결과물은 무슨 맛인지 알 수 없게 됐다고 할까요? 미묘한 사건을 통해 얽힌 데다 각자 폭력의 트라우마를 품고 있는 바비와 캐서린, 25년 만에 출소한 뒤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소시오패스, 비밀을 움켜쥐고 있는 듯한 고위급 판사의 폭주 등 따로 떼어놓고 보면 별개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모두 매력적인 요소들인데 왠지 무리하게 하나의 이야기 속에 욱여넣은 듯한 인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서점의 평가가 다소 극과 극으로 나뉜 건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론을 제외하고 한국에 소개된 리사 가드너의 작품은 서바이버 클럽과 앤솔로지 한 편(‘페이스 오프’)뿐입니다. ‘서바이버 클럽역시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돼있는 신세인데, 내년쯤엔 쌓인 먼지를 털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얼론보다 3년 앞서 출간된 작품이지만 리사 가드너의 진면목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래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