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자에게 잊혀진 시체 보관 기록 쿤룬 삼부곡 3
쿤룬 지음, 진실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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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 지침서’, 2선생님이 알아서는 안 되는 학교 폭력 일기에 이은 쿤룬 3부곡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1편이 무차별 살인집단 잭(Jack)의 조직원들에게 피의 복수를 펼치는 미소년 스녠의 이야기였다면 2편은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가 살인괴물이 돼버린 장페이야의 이야기였는데, 3편은 이전까지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이 총출연하여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3편의 핵심 서사는 그동안 스녠에게 속수무책으로 사냥 당하던 살인집단 잭이 드디어 스녠의 정보를 입수하곤 반격에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반격의 여파는 스녠뿐 아니라 이 시리즈의 주요 인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말 그대로 피의 광풍을 일으킵니다. 앞선 1~2편보다 더 많은 시신들이 등장하고 더 잔혹한 장면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더불어 2편에서 살인괴물로 변신한 장페이야가 종적을 감춘 연인 촨한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 기억을 잃은 채 신입 시체 수거업자가 된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와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다가 끝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게 되는 이야기 등 시리즈 대미에 걸맞은 살인마 스릴러가 실려 있습니다.

 

쿤룬 3부곡의 살인마 서사 자체는 무척 비현실적입니다. 전설적인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를 숭배하며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는 잭이라는 조직도,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밤낮없이 조직원을 색출해 살해하는 스녠도,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가 하루아침에 살인괴물로 진화하는 장페이야도, 또 순전히 재미와 쾌감을 위해 음모를 꾸미고 살인을 조장하는 주요 조연들도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 비현실감을 거의 느끼기 어려운데, 그것은 아마도 각 인물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가 묘하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중에서도 주인공들에게 부여된 결코 충족되지 않는 복수심은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잭의 조직원에게 누나를 잃은 스녠과 살인마에게 아버지를 잃은 뒤 학교폭력의 희생자가 됐던 장페이야는 이미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독자를 응원군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감도 없고, 잔인한 장면들이 거듭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게 어디 있어?”라는 자문 없이 마지막 장까지 단번에 달릴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설정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거의 순도 100%의 오락성 스릴러라고 할 수 있지만, ‘충족되지 않는 복수심이 주요 코드라서 그런지 결코 사이다처럼 읽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무겁고 어두운 여운을 남긴다고 할 수 있는데, 시리즈는 마무리됐지만 살아남은 인물들이 앞으로 마주해야 할 날들이 지금보다 괜찮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에 묻은 피는 지울 수 있겠지만, 마음속의 지옥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할까요? 다만 피의 복수를 거듭하면서도 종종 소박하고 따뜻한 행복을 그리워하던 스녠의 소망만큼은 조금이라도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습니다.

 

1~2편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줄거리를 언급할 수 없다 보니 시리즈 전체에 대한 인상 비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잔혹한 살인마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더없이 흥미로운 작품이 되겠지만, 그 수위가 좀 높은 편이라 이야기와 관계없이 거부감을 갖는 독자도 적지 않을 거란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시리즈가 종료된 게 좀 아쉽긴 하지만, 동시에 쿤룬이 어떤 이야기를 들고 다시 독자를 찾을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3부곡이 완결된 게 2018년이니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셈인데, 조만간 그의 신작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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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 프럼 더 우즈 보이 프럼 더 우즈
할런 코벤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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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힘을 당하던 여학생 나오미가 사라지자 같은 반의 매슈는 형사사건 전문변호사인 할머니 헤스터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헤스터는 매슈의 대부인 와일드에게 나오미를 찾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의외의 장소에서 나오미를 찾아내긴 하지만 얼마 후 다시 사라진데다 이번에는 사건으로 비화할 조짐까지 보이자 와일드는 초조해집니다. 와일드는 나오미를 괴롭히던 일당의 우두머리 크래시에게 나오미의 행방을 물으며 거칠게 몰아세우지만 그 직후 크래시마저 실종되자 당황합니다. 더구나 경호원까지 내세워 자신을 압박하던 크래시의 부모가 헤스터와 자신을 초대하자 크게 놀랍니다. 헤스터와 함께 크래시 부모의 저택을 찾은 와일드는 크래시의 목숨을 담보로 요구조건을 내건 범인들의 이메일을 보곤 더 이상 실종이나 가출이 아닌 납치사건임을 깨닫습니다.

 

보이 프럼 더 우즈는 할런 코벤의 와일드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주인공 와일드는 조금 특별한 이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30여 년 전 숲에서 야생 상태로 발견됐을 당시 6~8살로 추정됐던 와일드는 자신에 대한 기억 자체가 전혀 없었습니다. 숲에 살면서 유일하게 소통했던 인간은 형사사건 전문변호사 헤스터의 막내아들 데이비드뿐이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와일드는 헤스터와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됐고, 이후 위탁가정에서 제대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유일한 친구였던 데이비드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대자(代子)인 매슈, 그리고 데이비드의 아내 라일라를 각별히 살피기도 합니다. 학업과 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특수부대원으로 파병된 경험까지 있지만 와일드는 여전히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는 숲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에코캡슐이라는 일종의 캠핑카에서 홀로 살아갈 뿐입니다.

 

와일드에게 주어진 미션은 실종된 여학생 나오미 찾기로 시작되지만, 얼마 후 나오미를 괴롭히던 부잣집 아들 크래시까지 실종되면서 예상치 못한 형태로 확대됩니다. 몇몇 정황 상 나오미와 크래시가 동반가출한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였던 점을 감안하면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고, 이내 크래시를 인질로 삼은 범인들의 협박 이메일이 도착하면서 와일드는 이제 납치범들과의 전쟁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할런 코벤이 즐겨 사용하는 실종으로 시작됐다가 납치극으로 이어지긴 해도 이 내용이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음모와 비밀을 넘어 학원폭력, SNS 등 인터넷 문화의 어두운 뒷면, 인종차별, 미디어와 정치의 부패로까지 이야기가 확장되면서 꽤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가정폭력과 오래 전 살인사건의 진실 등 여러 가지 소재가 가미되기도 했고 그만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해서 단 몇 줄로 줄거리를 요약하는 게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다채로움이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가장 아쉬운 부분으로 느껴졌습니다. 시리즈 첫 편이라 이것저것 설명할 정보가 많아서 산만하기도 했고,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제각각 흘러가다가 하나의 줄기로 합쳐지곤 하는 코벤 특유의 서사와 달리 여러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보일 정도로) 각자의 흐름을 갖고 있는 탓에 전체적으로 머릿속에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이런 전개와 구성을 반길 수도 있으니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다른 서평들도 꼭 참고했으면 좋겠습니다.

 

와일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은 보이 인 더 하우스로 이미 한국에 출간돼있습니다. 당장 찾아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떡밥 때문에 와일드의 이후 행보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할런 코벤의 몇몇 작품에서 감초 같은 조연으로 활약하다가 이 시리즈에서 중심인물로 등장한 헤스터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입니다. 이야기는 다소 아쉬웠지만 두 주인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책읽기였습니다. 후속작에서도 매력적인 두 주인공의 활약을 지켜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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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연극 킴 스톤 시리즈 4
앤절라 마슨즈 지음, 강동혁 옮김 / 품스토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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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의 부패를 연구하는 웨스털리의 법의학연구소, 일명 시체농장을 방문했던 킴 스톤과 그녀의 팀원들은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될 시체, 즉 전날 밤 살해된 뒤 유기된 것이 분명한 한 여자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완전히 함몰된 얼굴, 몸에 난 의문의 자국, 깨끗하게 면도된 다리털과 일부러 광택을 없앤 손발톱 등 기이한 시체의 상태에 모두들 놀랐지만, 다음날 똑같은 형태의 피해자가 시체농장에서 또다시 발견되자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피해자의 신원 확보부터 난항을 겪지만 킴 스톤은 집요한 탐문 끝에 오래 전 벌어졌던 한 사건이 현재의 연쇄살인을 촉발시켰음을 깨닫습니다. 한편 증오심이 들 정도로 자신을 괴롭혀온 기자 트레이시의 도발에 넘어간 킴 스톤은 다른 경찰서 관할인 한 미제사건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죽음의 연극은 출판사에서 돌김이라는 재미있는 별명을 붙여준 열혈 걸크러시 여형사 킴 스톤의 네 번째 이야기입니다. 잔혹한 사건과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 서사에다 의외의 반전까지 여러 가지 미덕을 골고루 갖추고 있지만, 이 시리즈의 단연 최고의 매력은 바로 주인공 킴 스톤의 캐릭터입니다. 앞서 전작의 서평에 쓴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제로에 가까운 사교술, 휘발된 감정과 공감능력, 상대는 안중에도 없는 거친 태도, 조직의 논리나 정치적 맥락 따위는 무시하고 오롯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만 걷는 타고난 반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능력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현재 나이 34세의 팀장급 여형사입니다. 용의자는 물론 직속상사에게까지 거침없는 돌직구를 던지는 킴의 언행은 매번 사이다의 쾌감을 전해주는데 그래선지 때로는 이야기의 흐름보다도 킴의 광폭 행보에 더 관심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갖가지 시신의 부패과정을 연구하는 시체농장에서 갓 발생한 살인사건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아이러니,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자세로 발견된 나머지 동기나 수법을 가늠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 신원확인 자체가 난감한 시체들, 그리고 어딘가 조금씩 비밀과 거짓말을 품고 있는 듯한 시체농장의 여러 연구원 등 킴에게는 이번에도 좀처럼 풀기 어려운 난제가 주어집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이번 작품에선 킴의 과거와 현재에 걸친 개인사가 어느 때보다 더 구체적이고 고통스럽게 묘사됩니다. 범죄 혐의가 있는 정신 질환자들을 수용한 폐쇄병동에 입원 중인 어머니와 어릴 적 잠시나마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양부모에 대한 기억이 수시로 킴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면, 자신에게는 희망이나 행복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모든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고 일부러 일에 몰입하는 안쓰러운 모습은 현재의 킴이 처한 처지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실은 언제나 그랬지만) 사건을 대하는 킴의 태도는 일반적인 스릴러 주인공과는 사뭇 다른 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사건을 개인적인 차원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고 할까요?

 

대장은 어떻게든 피해자들과 친숙해지고, 그러면 변화가 일어나요. 더는 정의를 위해 살인자를 잡으려 하지 않죠. (피해자들을 위해서 움직이는 거예요.) 이젠 개인적인 사건이 된 겁니다. 그러면 대장의 목소리가 바뀌어요.” (p350~351)

 

킴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영국식 블랙유머를 난사하는 감초 조연들입니다. 수사 자체에 큰 역할을 하는 건 아니지만 킴의 폭주와 분노를 제어하는 역할을 맡은 띠동갑 연상의 베테랑 형사 브라이언트를 비롯하여 툭하면 킴에게 꾸중을 들으면서도 나름 열심히 애쓰는 케빈과 탁월한 정보수집력을 자랑하는 스테이시 등 킴의 팀원들의 활약도 이 시리즈를 꾸준히 지켜봐온 독자라면 애정과 흥미를 갖고 읽게 될 대목입니다.

가장 의외였던 건 그동안 살의를 야기할 정도로 킴의 증오를 샀던 기자 트레이시가 이번 작품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한 점입니다. 스릴러 시리즈의 주인공을 괴롭히는 기자는 비중은 작더라도 늘 밉상 캐릭터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곤 하는데, 전작인 사라진 소녀들에서 킴을 궁지에까지 몰아넣었던 트레이시가 이번에는 사건의 한복판에 휘말리면서 킴과 더 세게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스릴러의 구도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고 범인의 정체 역시 예상 못할 반전의 수준은 아니지만, 구원(舊怨)과 복수심이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뒤 폭발했을 때 얼마나 가공할 만한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또한 별개의 것으로 보이던 사건들이 의외의 접점을 통해 연결되는 짜릿함도 맛볼 수 있고, 덤으로 시체농장이라 불리는 법의학연구소의 기괴하고도 음습한 분위기도 마치 그곳을 직접 견학하는 듯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개정판을 제외하더라도 올 한해에만 킴 스톤 시리즈두 편이 한국에 출간됐는데, 영국에서 20편까지 출간된 점을 감안하면 내년에는 좀더 많은 작품들을 만나보고 싶은 욕심입니다. 부디 제 욕심과 바람이 조금이라도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사족으로, 전작까지만 해도 킴 스톤의 소속이 웨스트미드랜드 경찰청 산하 헤일조웬 경찰서였는데, 이번 작품부터 갑자기 웨스트미들랜즈 경찰청 산하 헤일소언 경찰서로 바뀌었습니다. 관점에 따라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읽는 내내 살짝 거슬렸던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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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걷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110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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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와 가스의 노다지로 알려진 노스다코타주의 소도시 런던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자 FBI는 에이머스 데커와 파트너 알렉스 재미슨을 파견합니다. FBI가 개입할 만한 사건으로 보이지 않은데다 정작 데커와 재미슨조차도 자신들이 파견된 정확한 이유를 모릅니다. 문제는 수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살인과 실종사건이 연이어 벌어진 점입니다. 데커와 재미슨은 살인사건 외에도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 런던의 분위기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사방에서 석유 시추가 이뤄지고 가스의 불기둥이 치솟는가 하면, 오래된 공군기지는 철저한 경비 속에 음모가 도사리는 듯 보였고, 인접한 종교단체 역시 전혀 순수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석유와 가스가 창출한 부를 놓고 노골적인 갈등을 빚는 지역유지들 역시 수상해 보일 뿐입니다. 수사가 난항을 겪는 사이 데커는 누군가의 기습공격으로 큰 위기에 빠집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이머스 데커의 여섯 번째 이야기로, 전작인 진실에 갇힌 남자이후 (한국 기준으로) 3년 만에 출간된 작품입니다. 미식축구선수 시절 엄청난 부상과 함께 과잉기억증후군공감각이라는 증상을 얻은 데커는 이후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FBI에서 일하게 됐고,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을 통해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해왔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데커는 그 특별한 능력을 발휘한다기보다 발군의 추리력과 순발력으로 다양한 사건들을 해결합니다. 재미있는 건 노스다코타주의 소도시 런던이 데커에게 내민 숙제가 꽤나 복잡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모두 연관된 것 같지만 달리 보면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데커 앞에서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데커는 재미슨과 함께 런던에 파견된 첫 번째 이유, 즉 한 여성의 죽음에 몰입하려 하지만, 세기말적 풍경을 자아내는 석유 시추시설, 지금은 그 용도가 불분명한 오랜 공군기지, 비밀을 감추는 듯한 종교단체, 그리고 호황과 불황을 거듭해 온 런던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여온 지역유지 등 혼란스러운 상황들 때문에 좀처럼 수사의 실마리를 찾지 못합니다. 특히 정체불명의 청부살인업자가 자신을 노린 일도, 또 위기의 순간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을 구해준 인물의 등장도 데커의 수사 방향에 혼란만 가중시킵니다. 한 여성의 죽음의 배경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감조차 잡기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읽은 그 어느 작품보다 사선을 걷는 남자는 복잡한 설계도를 지닌 작품입니다. 꽤 많은 사람이 죽거나 실종되거나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지는데, 이 많은 사건들이 전부 제각각의 단서를 남기는 바람에 하필데커가 와있는 중에 공교롭게도 사건들이 한꺼번에 일어난 건지, 아니면 그 많은 사건들이 실은 한 뿌리에서 시작된, 모조리 연관된 사건들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제대로 따라가려면 메모장에 등장인물의 이름이라도 적어놓는 것이 유용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려야 이 작품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으니 바쁜 시간을 쪼개 나눠 읽기보다는 주말에 완주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선을 걷는 남자에는 데커와 재미슨 콤비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윌 로비와 제시카 릴 콤비입니다. 해외 관련 첩보기관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이번 작품에서 가공할 살상력과 무력을 선보이며 데커와 재미슨의 수호천사같은 역할을 맡습니다. 후속작에서도 이들이 데커의 도우미가 돼줄 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모로 합이 잘 맞는 네 사람의 협업을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워낙 서사의 판이 크고 복잡하게 짜여서 그런지 다른 어느 작품보다 집중력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다소 아쉬웠던 건 결정적인 순간마다 데커의 추리가 다소 지나치게 비약을 반복한 점입니다. “왜 갑자기 저런 생각이 떠올랐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데커의 추리는 동료들은 물론 독자마저 멀찌감치 떼어놓고 홀로 폭주하곤 합니다. 나중에 그에 대해 딱히 설명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선지 ... 그런 거였나?”라고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기곤 했는데, 흥분지수가 고조된 지점에서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조금은 아쉽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지만 별 0.5개를 뺀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인 ‘Long Shadows’2022년에 이미 출간됐습니다. 올해 한국에 처음 소개된 데이비드 발다치의 새 시리즈 ‘620분의 남자의 두 번째 작품도 기대되지만 에이머스 데커의 새 이야기도 빠른 시간 안에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들의 매력과 카리스마가 철철 넘쳐흐르기 때문인데 이왕이면 2024년 상반기에 두 작품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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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메이드
프리다 맥파든 지음, 김은영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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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서 10년을 복역한 뒤 가석방된 밀리는 전과 사실을 숨긴 채 윈체스터 집안의 저택에 가사도우미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다정한 미소로 자신을 채용했던 안주인 니나가 갑자기 냉랭한 태도와 함께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하자 밀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더구나 주변사람들로부터 니나의 정신병원 입원 내력은 물론 어린 딸을 해치려 했다는 말까지 들은 뒤론 겁에 질리기까지 합니다. 그런 밀리에게 유일한 위안은 니나의 남편 앤드류의 친절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앤드류가 왜 니나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던 밀리는 어느 새 자신이 점점 앤드류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곤 크게 놀랍니다.

 

한때 범람했던 도메스틱 스릴러에 질려 잠시 멀리하고 있던 터라 신간소식에서 하우스메이드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보류목록에 넣어뒀지만,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프리다 맥파든의 핸디맨을 읽곤 마음을 고쳐먹게 됐습니다. 고백하자면, 일단 100페이지까지만 읽어보고 접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첫 페이지를 펼쳤는데, 의외로 순식간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리게 됐습니다.

 

도메스틱 스릴러의 전형적인 특징들이 작품 전반에 깔려있긴 하지만 하우스메이드는 군살 없이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이야기 때문에 큰 거슬림 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가석방 후 궁핍한 생활을 타개하기 위해 전과를 숨긴 채 저택의 가사도우미로 들어간 밀리, 하루에도 몇 번씩 극단적인 감정 변화를 보이며 밀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안주인 니나, 거의 완벽에 가까운 스펙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병에 걸린 아내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앤드류 등 비밀과 거짓말로 포장된 듯한 불온한 분위기를 내뿜는 세 주인공의 행보는 시종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거기에다 밀리가 저택에 온 첫날, 속삭이듯 위험이라는 말을 건넨 이탈리아인 정원사 엔조, 니나의 정신병력을 공공연하게 들먹이며 거침없이 그녀를 비난하는 이웃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밖에서만 문을 잠글 수 있는 3층의 좁은 다락방의 냉기 등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설정들도 눈길을 끄는 부분들입니다.

 

모두 3부로 구성돼있는데, 2부 시작과 함께 이 작품의 큰 반전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내용들은 서평에서 공개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도메스틱 스릴러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설정이라 그리 놀랍진 않지만, 그래도 꽤 묵직한 힘을 가진 반전인데다 세 주인공 모두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에 무척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나름 쾌감을 맛볼 수 있는 클라이맥스도 좋았고, 소소한 짜릿함이 느껴지는 에필로그도 매력적입니다. 심리묘사에 치중하거나 느리고 지루한 전개로 맥 빠지게 만드는 평범한 도메스틱 스릴러와는 달리 간단명료한 서사가 장점인 작품이라고 할까요?

 

올해 출간된 프리다 맥파든의 두 작품 - ‘핸디맨’, ‘하우스메이드’ - 은 각각 연쇄살인 스릴러와 도메스틱 스릴러로 장르가 확연히 구분되지만, 읽기 쉽고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뇌손상 전문의이자 소설가인 그녀의 작품이 얼마나 더 한국에 소개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관심작가 목록에 올려놔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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