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연극 킴 스톤 시리즈 4
앤절라 마슨즈 지음, 강동혁 옮김 / 품스토리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체의 부패를 연구하는 웨스털리의 법의학연구소, 일명 시체농장을 방문했던 킴 스톤과 그녀의 팀원들은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될 시체, 즉 전날 밤 살해된 뒤 유기된 것이 분명한 한 여자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완전히 함몰된 얼굴, 몸에 난 의문의 자국, 깨끗하게 면도된 다리털과 일부러 광택을 없앤 손발톱 등 기이한 시체의 상태에 모두들 놀랐지만, 다음날 똑같은 형태의 피해자가 시체농장에서 또다시 발견되자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피해자의 신원 확보부터 난항을 겪지만 킴 스톤은 집요한 탐문 끝에 오래 전 벌어졌던 한 사건이 현재의 연쇄살인을 촉발시켰음을 깨닫습니다. 한편 증오심이 들 정도로 자신을 괴롭혀온 기자 트레이시의 도발에 넘어간 킴 스톤은 다른 경찰서 관할인 한 미제사건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죽음의 연극은 출판사에서 돌김이라는 재미있는 별명을 붙여준 열혈 걸크러시 여형사 킴 스톤의 네 번째 이야기입니다. 잔혹한 사건과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 서사에다 의외의 반전까지 여러 가지 미덕을 골고루 갖추고 있지만, 이 시리즈의 단연 최고의 매력은 바로 주인공 킴 스톤의 캐릭터입니다. 앞서 전작의 서평에 쓴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제로에 가까운 사교술, 휘발된 감정과 공감능력, 상대는 안중에도 없는 거친 태도, 조직의 논리나 정치적 맥락 따위는 무시하고 오롯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만 걷는 타고난 반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능력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현재 나이 34세의 팀장급 여형사입니다. 용의자는 물론 직속상사에게까지 거침없는 돌직구를 던지는 킴의 언행은 매번 사이다의 쾌감을 전해주는데 그래선지 때로는 이야기의 흐름보다도 킴의 광폭 행보에 더 관심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갖가지 시신의 부패과정을 연구하는 시체농장에서 갓 발생한 살인사건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아이러니,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자세로 발견된 나머지 동기나 수법을 가늠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 신원확인 자체가 난감한 시체들, 그리고 어딘가 조금씩 비밀과 거짓말을 품고 있는 듯한 시체농장의 여러 연구원 등 킴에게는 이번에도 좀처럼 풀기 어려운 난제가 주어집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이번 작품에선 킴의 과거와 현재에 걸친 개인사가 어느 때보다 더 구체적이고 고통스럽게 묘사됩니다. 범죄 혐의가 있는 정신 질환자들을 수용한 폐쇄병동에 입원 중인 어머니와 어릴 적 잠시나마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양부모에 대한 기억이 수시로 킴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면, 자신에게는 희망이나 행복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모든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고 일부러 일에 몰입하는 안쓰러운 모습은 현재의 킴이 처한 처지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실은 언제나 그랬지만) 사건을 대하는 킴의 태도는 일반적인 스릴러 주인공과는 사뭇 다른 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사건을 개인적인 차원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고 할까요?

 

대장은 어떻게든 피해자들과 친숙해지고, 그러면 변화가 일어나요. 더는 정의를 위해 살인자를 잡으려 하지 않죠. (피해자들을 위해서 움직이는 거예요.) 이젠 개인적인 사건이 된 겁니다. 그러면 대장의 목소리가 바뀌어요.” (p350~351)

 

킴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영국식 블랙유머를 난사하는 감초 조연들입니다. 수사 자체에 큰 역할을 하는 건 아니지만 킴의 폭주와 분노를 제어하는 역할을 맡은 띠동갑 연상의 베테랑 형사 브라이언트를 비롯하여 툭하면 킴에게 꾸중을 들으면서도 나름 열심히 애쓰는 케빈과 탁월한 정보수집력을 자랑하는 스테이시 등 킴의 팀원들의 활약도 이 시리즈를 꾸준히 지켜봐온 독자라면 애정과 흥미를 갖고 읽게 될 대목입니다.

가장 의외였던 건 그동안 살의를 야기할 정도로 킴의 증오를 샀던 기자 트레이시가 이번 작품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한 점입니다. 스릴러 시리즈의 주인공을 괴롭히는 기자는 비중은 작더라도 늘 밉상 캐릭터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곤 하는데, 전작인 사라진 소녀들에서 킴을 궁지에까지 몰아넣었던 트레이시가 이번에는 사건의 한복판에 휘말리면서 킴과 더 세게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스릴러의 구도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고 범인의 정체 역시 예상 못할 반전의 수준은 아니지만, 구원(舊怨)과 복수심이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뒤 폭발했을 때 얼마나 가공할 만한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또한 별개의 것으로 보이던 사건들이 의외의 접점을 통해 연결되는 짜릿함도 맛볼 수 있고, 덤으로 시체농장이라 불리는 법의학연구소의 기괴하고도 음습한 분위기도 마치 그곳을 직접 견학하는 듯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개정판을 제외하더라도 올 한해에만 킴 스톤 시리즈두 편이 한국에 출간됐는데, 영국에서 20편까지 출간된 점을 감안하면 내년에는 좀더 많은 작품들을 만나보고 싶은 욕심입니다. 부디 제 욕심과 바람이 조금이라도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사족으로, 전작까지만 해도 킴 스톤의 소속이 웨스트미드랜드 경찰청 산하 헤일조웬 경찰서였는데, 이번 작품부터 갑자기 웨스트미들랜즈 경찰청 산하 헤일소언 경찰서로 바뀌었습니다. 관점에 따라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읽는 내내 살짝 거슬렸던 게 사실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