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부패에서 구하소서
쯔진천 지음, 박소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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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교수이자 범죄논리학자 옌량을 앞세운 일명 추리의 왕(推理之王) 시리즈로 잘 알려진 쯔진천이 이전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이야기를 선보였습니다. 묵직하고 어두운 미스터리가 주 특기였던 그가 슬랩스틱 스릴러 혹은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추리소설의 탈을 쓴 코믹 활극이라는 가볍고 통통 튀는 서사를 다룰 거라곤 예상할 수 없었기에 읽기 전부터 무척이나 흥미를 끄는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범죄 자체는 심상치 않습니다. 폭탄까지 동원하는 2인조 강도, 부와 권력을 지닌 부패한 기업가와 정치인, 그리고 적잖이 벌어지는 살인사건 등 범죄의 무게감이나 잔혹함은 여느 장르물 못잖게 심각하게 설정돼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심각한 재료들을 지지고 볶기 위한 레시피는 슬랩스틱과 코믹이라는 정반대의 코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레시피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좌충우돌 경찰 캐릭터입니다. 주인공 장이앙은 무능한 것인지 관운이 따르지 않았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인물로 어느 날 갑자기 낙하산을 타고 싼장커우 공안국 부국장에 취임한 뒤 잇달아 강력범죄를 해결하면서 주목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어찌 보면 100% 행운에 의한 걸식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정말 뛰어난 직감과 추리력에 의한 것 같기도 해서, 마지막까지도 그의 진면목이 어떤 것인지 그저 애매모호할 따름입니다. (물론 이 애매모호함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장이앙 주위의 경찰들 역시 코믹 경찰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인데, 늘 실수만 저지르는 머저리’, 모범경찰 같지만 속물적인 근성을 지닌 자, 고위직의 조카로 현장 형사를 꿈꾸는 사고뭉치, 그리고 장이앙의 성공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고위관료들이 그들입니다.

 

슬랩스틱 코믹 레시피의 또 다른 핵심요소는 우연과 필연을 통해 거미줄처럼 연결되는 사건들입니다. 애초 아무 상관도 없는 인물과 사건들이 예기치 못한 우연을 통해 연결이 되고, 그 결과는 또 다른 인물과 사건에 영향을 미칩니다. 가령, 형사 장이앙과 2인조 무장강도는 이 연결고리 중 하나만 빠졌어도 절대로 만날 일이 없는 관계였지만 몇 번의 우연과 필연이 거듭된 끝에 그야말로 어이없는 상황에서 대치하게 됩니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인물들이 이런 식의 예상치 못한 악연을 맺게 되는데 이 복잡하고 정교한 장면들은 동시에 쉴 새 없이 실소를 자아내는 코믹 요소까지 품고 있어서 이 작품이 슬랩스틱 스릴러혹은 추리소설의 탈을 쓴 코믹 활극으로 불리는 이유를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도 워낙 많고 사건도 그만큼 많아서 줄거리 정리가 쉽지 않아 대략적인 인상비평이 되고 말았는데,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천재인지 운빨이 좋은 건지 알 수 없는 형사 장이앙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사건에 관여하던 중 싼장커우의 부패한 기업가, 흉포한 2인조 무장강도, 경찰과 민간인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을 잇달아 제압하는 이야기입니다. (사건의 진상은 장이앙의 노력과는 거의 무관하게 범죄자들간의 우연한 악연 덕분에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고,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장이앙은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들고 나타난 명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대목이 이 작품의 가장 매력적인 설정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선 다만 부패에서 구하소서라는 흥미진진한 제목으로 출간됐지만 사실 이 작품의 원제는 低智商犯罪’, 즉 한국식으로 직역하면 저지능범죄입니다. 아예 제목부터 작정하고 코믹을 강조한 셈인데, 실제로 경찰과 범죄자를 막론하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 풀린 듯한 저지능캐릭터에 가깝습니다. 또 쯔진천 스스로 그냥 재미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 즐겁게 읽으면 그만이다.”라고 밝힌 걸 보면 이 작품의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작품이 쯔진천의 작품 세계 제2막을 여는 신호탄 격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옮긴이의 말은 조금은 우려되는(?) 대목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론 이 작품이 맛깔난 간식으로는 괜찮았지만 쯔진천이 계속 이런 스타일을 고집하는 건 그다지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 작품이 SF를 기반으로 한 범죄추리소설이라고 하는데, 그 역시 코믹을 바탕에 둔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추리의 왕 시리즈가 한 편이라도 더 나오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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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시간 스토리콜렉터 94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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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삼킨 소녀’, ‘끝나지 않는 여름에 이은 셰리든 그랜트 3부작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독일의 명품 스릴러 타우누스 시리즈의 작가인 넬레 노이하우스가 10대 소녀의 성장통을, 그것도 미국을 배경으로 그렸다는 것 자체가 무척 특이한 일인데, 앞선 두 작품 모두 (출판사가 명명한) ‘미스터리 로맨스이상의 재미와 긴장감, 그리고 묵직한 여운을 남긴 덕분에 셰리든 그랜트의 마지막 여정이 너무 궁금하고 기대됐던 게 사실입니다.

 

1990년대 중반, 주민 1,500명에 불과한 네브라스카 주 소도시 페어필드에서 무자비하고 잔혹한 10대 시절을 보낸 셰리든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지만 그 여정은 시작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이후 그녀의 삶은 21살이 되기까지 이보다 더 나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시련으로 채워지고 맙니다. (여기까지가 앞선 두 편의 대략의 내용입니다.)

성실한 외과의사 폴을 만나 가까스로 안식처를 찾은 듯 보였지만 셰리든의 심장은 그 안식처가 절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리고 실은 자신이 집과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돌아온 탕아같은 모습으로 5년 만에 페어필드로 돌아온 셰리든은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지만 이내 다시 불안과 혼란에 빠져듭니다. 그런 그녀에게 기적 같은 일들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진정한 사랑을 나눌 남자가 나타났고, 그녀의 음악적인 재능을 알아본 거대 음반회사의 러브콜이 도착합니다. 하지만 셰리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과거의 끔찍한 사건들은 언제든 그녀의 기적을 박살 낼 태세로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내 심장은 나에게 실수를 반복하게 했다.”


뒷표지에 실린 이 카피는 셰리든의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한마디로 잘 압축해놓은 문장입니다. 10대 시절부터 누구보다 강렬한 카리스마와 의지를 지녔지만 그녀의 삶은 늘 타인에 의해 뒤흔들렸고,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한 채 끊임없는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며 스스로를 만신창이로 만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출생의 비밀이 안긴 엄청난 충격, 전국적인 뉴스거리가 된 의붓오빠의 광란의 살인, 결코 잊지 못할 강간의 악몽은 셰리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은 물론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들이었고, 21살이 된 현재까지도 여전히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름을 삼킨 소녀가 세 번의 여름에 걸친 10대 소녀 셰리든의 고통스런 성장기였다면, ‘끝나지 않는 여름은 그녀가 고향을 떠난 뒤에 겪은 악몽 같은 나날들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폭풍의 시간은 롤러코스터처럼 번갈아 벌어지는 극과 극의 사건들을 이겨낸 셰리든이 가까스로 사랑과 안식을 찾아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는 단순히 10대 소녀의 성장통 혹은 미스터리 로맨스라는 말랑말랑한 수식어와는 거리가 먼 잔혹한 서사들이 등장합니다. 살인, 폭력, 매춘, 강간, 연쇄살인범 등 끔찍하고 가혹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어지간한 범죄스릴러를 능가하는 긴장감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넬레 노이하우스 특유의 미스터리와 범죄스릴러 코드가 제대로 녹아있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폭풍의 시간은 앞선 두 작품에 등장했던 사건들과 셰리든의 10대 시절을 부족하지 않게 설명해주고 있지만, 그 작품들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조금은 감정이입이 쉽지 않을 거란 생각입니다. 앞선 두 작품에서 축적된 셰리든의 실수와 실패들이 폭풍의 시간속의 그녀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다면 여름을 삼킨 소녀끝나지 않는 여름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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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새겨진 소녀 스토리콜렉터 44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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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스릴러 가운데 남녀 콤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경우가 몇몇 있는데, 마르틴 S. 슈나이더와 자비네 네메즈는 (제가 알기론) 경력과 나이에서 가장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입니다. 한쪽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라면 한쪽은 새내기의 풋내가 가시지 않은 신참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외적인 면만 아니라 성격에서도 극단적으로 대비됩니다. 슈나이더가 괴팍하고 거만한데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고집쟁이라면 자비네는 다정다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평범한 축에 속하는 캐릭터입니다. 다만, 둘 사이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절차와 규정 따위는 무시하고 오직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드는 돌직구 같은 경찰이란 점입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독일 연방범죄수사국에 근무하는 슈나이더는 천재와 광인(狂人)을 오가는 사건분석가이자 범죄심리학자입니다. 타고난 반골기질에 오만함과 거만함으로 똘똘 뭉쳤지만 거의 완벽한 프로파일링 능력 덕분에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한 인물입니다. , 극단적인 방법 마리화나에 취한 채 범행 현장에 틀어박혀 범인의 행동과 사고를 유추한다든지 도 마다하지 않는 이해 불가한 일면도 있습니다. “살인자의 뇌에 들어가서 악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대사는 프로파일러로서의 그의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카만 머리의 금발 소년에서 슈나이더와 인연을 맺었던 자비네는 연방범죄수사국 아카데미에서 사제 관계로 슈나이더와 재회합니다. 슈나이더는 여전히 불친절하고 거만했지만, 자비네는 번번이 고배를 마셨던 아카데미 입학에 그가 적잖은 힘을 써줬음을 눈치 챕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슈나이더와 자비네가 맡은 독일의 살인사건들인데, 처음에는 범행 수법도 다르고 희생자 간의 연관성도 없어 보였지만, 두 사람의 집요한 수사 끝에 연결고리가 드러나면서 충격적인 진상이 드러납니다. 또 하나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이어 발생한 소녀 유괴살해사건으로, 희생자들의 등에서 단테의 신곡지옥 편을 묘사한 끔찍한 문신이 발견된 엽기적인 사건입니다. 빈의 여검사 멜라니 디츠가 노회한 경찰 하우저와 함께 이 사건을 맡습니다. 연관성이 없어 보이던 두 사건은 후반부에 가서야 접점이 드러나게 되고, 슈나이더-자비네 콤비가 멜라니 디츠와 협력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밝혀냅니다.

 

사건의 잔혹함이라든가 심리극을 연상시키는 복잡다단한 묘사 등 유럽 스릴러 특유의 미덕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슈나이더-자비네 콤비의 캐릭터입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도 없고, 또는 물과 불처럼 상극으로만 보이는 두 주인공이 날선 공방과 비아냥, 협조와 동지애를 주고받으며 엎치락뒤치락 하는 모습은 사건 자체보다 더 큰 재미를 선사합니다. 슈나이더는 자신과 꼭 닮은 자비네에게 무자비한 스승이자 이 세상 최고의 멘토가 돼줍니다. 자비네 역시 슈나이더의 모난 부분을 증오하면서도 자신에게도 그와 꼭 닮은 경찰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무척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0.5개를 뺀 것은 사건 해결 과정이 다소 구태의연하고 안이하게 설정된 탓이 제일 컸고, 결론을 위해 억지스럽게 그려진 몇몇 인물들 간의 작위적인 관계라든가, 두 사건 사이의 접점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느낀 위화감 때문입니다.

하지만 슈나이더-자비네 콤비의 캐릭터만 놓고 보면 5개 이상의 별도 충분한 작품입니다. 물론 주연급 조연으로 소녀 유괴살해사건을 담당한 멜라니 디츠의 공도 컸습니다. 그녀가 앞으로도 슈나이더-자비네와 함께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 중요한 카메오로 한번쯤은 얼굴을 비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사건 자체보다 주조연 캐릭터의 힘이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까요? 이런저런 아쉬움을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매력적인 슈나이더-자비네 콤비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활약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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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계단 스토리콜렉터 93
딘 쿤츠 지음, 유소영 옮김 / 북로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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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계단사일런트 코너’, ‘위스퍼링 룸에 이은 제인 호크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남편 닉의 갑작스런 자살에 의문을 품고 조사를 시작했던 FBI요원 제인은 이후 무장괴한들에게 공격을 당하는가 하면 어린 아들의 목숨까지 협박받기에 이르렀는데,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어가며 그녀가 알아낸 악당의 정체는 나노테크놀러지를 이용하여 인간의 뇌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신기술을 확보한 테크노 아르카디언이었습니다.

호박색 액체에 담긴 신물질은 인간의 뇌 속에 특별한 네트워크를 설치하는데, 이 네트워크에게 장악된 인간은 특정 메시지에 절대 승복하게끔 개조됩니다. 즉 누군가가 내리는 명령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살인자나 노예가 되거나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뇌를 통제할 대상의 선택 기준은 문명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입니다. 즉 자신들이 계획하는 미래에 반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사전에 제거하겠다는 신의 권위를 손에 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밀한 감시카메라와 위치추적 장치, 혁명적인 사물인터넷과 소프트웨어 등 먹잇감을 손쉽게 주무를 수 있는 엄청난 자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앞선 두 작품에서 제인은 숱한 위기를 겪으며 이 전무후무한 악당의 정체를 밝혀낸 것은 물론 최고위직 일부를 제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위세는 대단했고 무엇보다도 정관계, 정보기관, 언론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라 그 누구에게도 이들의 정체와 범죄를 알릴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있습니다. 이미 간첩행위와 반역, 살인죄로 기소된 제인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태에서 홀로 고독한 싸움을 벌여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특히 테크노 아르카디언이 자신의 가장 약한 고리인 아들 트래비스를 노린다는 점 때문에 제인의 싸움은 몇 배나 더 힘들고 고통스럽게 전개됩니다.

 

구부러진 계단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는 테크노 아르카디언의 최정점을 파악하고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려는 제인의 싸움을 그립니다. 그녀의 타깃은 테크노 아르카디언의 최고위직이자 법무부 고위관료로서 직전 작품인 위스퍼링 룸에서도 끔찍한 악행을 저질렀던 부스 헨드릭슨입니다. 그를 통해 세상을 납득시킬 수 있는 확실한 물리적 단서를 손에 넣으려는 것입니다.

동시에 또 다른 큰 줄기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촉망받는 쌍둥이 남매 소설가인 타누자와 산자이 슈클라의 뇌를 통제하려는 테크노 아르카디언의 집요한 추격전이 그것입니다. 문명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 가능성이 있는 인기 소설가는 그들에겐 더없이 위험한 요인인 탓에 동원가능한 모든 시스템을 통해 집요하고 잔혹한 추격전을 펼칩니다.

 

개인적으론 구부러진 계단제인 호크 시리즈의 최종편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최정점과의 마지막 대결은 다음 작품으로 미뤄졌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쉬웠던 건 적잖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제인의 행보는 전편에 비해 그리 멀리 나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부스 헨드릭슨을 앞세워 모든 악행의 시발점이 된 구부러진 계단 아래 으스스한 공간에 이르는 제인의 여정은 실은 무척 단선적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녀가 겪는 위기와 갈등은 숨 가쁘게 그려졌고, 딘 쿤츠의 문장은 여느 스릴러와 달리 깊고 그윽한 맛을 지니고 있어서 페이지를 넘기는 일이 결코 지루하거나 느슨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굳이 결말을 다음으로(이마저도 확실하진 않지만) 미룰 정도로 장황한 분량이 필요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 제인의 이야기와 함께 병행된 쌍둥이 남매 작가 추격전은 나름 임팩트와 스릴을 갖추긴 했어도 이미 이 시리즈의 전작을 읽은 독자에겐 전혀 새롭지 않은 내용들이라 그 많은 분량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통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전작인 위스퍼링 룸에서 짧지만 강렬한 오프닝을 담당했던 헌신적인 특수아동교사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자동차 테러로 46명의 목숨을 앗아간 코라 건더슨 사건과 별 차이 없는 내용을 주인공의 이야기에 맞먹는 분량으로 세세히 묘사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딘 쿤츠의 문장은 너무도 매력적이고 유려하고 감칠맛이 돌아서 그 어떤 이야기가 됐든 독자의 눈길을 확 잡아끄는 힘이 있습니다. 결말이 다음 작품으로 밀린 점이나 과도하게 부풀려진 조연들의 이야기의 아쉬움이 크긴 했지만 그래도 딘 쿤츠의 매력적인 문장들이 많은 부분을 상쇄시켜준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후속작이 나왔을 땐 그 작품이 확실히 제인 호크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지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만일 그런 정보가 없다면 읽을지 말지 잠시 고민하게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결말이 미뤄진다면 그땐 아무래도 노작가의 과욕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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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룸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7
마이클 코널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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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룸블랙박스이후 한국에 2년 만에 소개된 해리 보슈 시리즈의 신작이자 17번째 작품입니다. 원작 출간이 2014년이니 무려 7년이 지나서야 한국 독자와 만나게 된 셈인데, 미국에선(2020년 기준) ‘해리 보슈 시리즈’ 23편이자 미키 할러 시리즈’ 6편인 ‘The Law of Innocence’가 출간됐다고 하니 시리즈 팬 입장에선 아직 읽을 작품이 많이 남았다는 기대감도 들지만 동시에 너무 늦어지고 있는 한국 출간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버닝 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새 출발의 인상을 주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시리즈 14나인 드래곤부터 시작됐던 개성 없는 표지들이 사라지고 강렬하고 화려한 표지가 등장한 점입니다. 개인적으론 여전히 나인 드래곤이전의 표지들이 그립지만 그래도 전집류 같은 획일적인 표지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내용면에서는 해리 보슈의 새로운 파트너 루시아 소토(이하 루시)가 등장한 점이 눈길을 끌었는데, 멕시코계 미국인, 5년도 안 된 신참, 강력계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체구 등 그동안의 보슈의 파트너들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무장 강도떼와의 총격전으로 스타덤에 오른 그녀는 럭키라는 별명처럼 행운을 몰고 다니는 것은 물론 침착하고 신중한 태도,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아는 총명함, 신참임을 무색하게 만드는 노련함 등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형사이기도 합니다. 애초 신경 쓰이는 교육생정도로 루시를 대했던 보슈는 함께 수사를 하는 동안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인재인지를 여러 차례 깨닫곤 합니다.

 

미제사건 전담반 소속의 보슈와 루시는 10년 전 광장 한복판에서 악단 연주자가 피격됐던 사건을 맡습니다. 최근 그 연주자가 사망하면서 몸 안에 박혀있던 총알을 회수할 수 있게 됐고 그 총알을 단서 삼아 범인을 찾아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정치적 거물과 그를 후원하는 재력가가 연루돼있는 탓에 두 사람의 수사는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힙니다.

한편 보슈는 루시가 다른 미제사건에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아냅니다. 21년 전의 방화사건이 그것인데, 루시는 당시 어린 희생자가 많았던 그 사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였고, 경찰이 된 뒤 언젠가 그 사건을 직접 파헤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슈는 상부에 알리지 않은 채 루시를 돕습니다. 하지만 21년이란 시간은 두 사람에겐 큰 장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리즈 15드롭에서 퇴직유예제도(DROP)를 통해 형사로서의 삶을 39개월 연장받았던 보슈는 이제 퇴직까지 겨우 12개월 남짓한 시간만을 남겨놓은 상태입니다. 오랜 시간 몸담았던 경찰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착잡함을 감출 수 없던 그에게 유능하고 예의바른 신참 루시는 새로운 희망을 심어줍니다.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자신만의 노하우를 이 똑부러진 후배에게 모두 전수해주고 싶어진 것입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끝물 고참과 쌩쌩 신참의 케미는 지금껏 맛보지 못한 해리 보슈 시리즈의 신선하고 흥미로운 대목이었습니다.

 

여느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수사는 난항과 장벽에 수시로 부딪힙니다. 조기 해결을 강요하면서도 예산에는 인색한 상부,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정치가와 재력가, 하이에나 같은 언론의 관심까지 더해져 보슈와 루시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합니다. 또 루시가 연루된 21년 전 방화사건 역시 좀처럼 진척을 보지 못한 채 답답한 행보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1/3지점까지는 예전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리고 처진다는 느낌을 받은 게 사실입니다.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완만한 신중함이 도드라졌고, 전광석화 같은 속도감보다는 거북이걸음 같은 꼼꼼함과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식의 디테일이 더 강조됐다는 뜻입니다.

 

뜨거운 문은 조심해야지. 불타는 방의 문을 섣불리 열면 안 되잖아.”(p187)

 

하지만 신참 루시의 캐릭터와 활약 덕분에 이 모든 아쉬움들이 어느 정도 상쇄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장래 경찰을 꿈꾸는 보슈의 17살 딸 매디의 미래를 보는 것 같기도 해서 더 이입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마이클 코넬리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루시는 다음 작품인 ‘The Crossing’까지만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루시가 보슈 곁을 떠나는 상황은 두세 가지 정도로 예상할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그저 아쉬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경찰로서의 삶이 12개월 남짓 남은 보슈가 LA경찰국 미제사건 전담반으로 활약할 작품은 잘 해야 두 편 정도일 것 같은데, 언제나 그랬듯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지 않은 버닝 룸의 결말이 잘 해야 두 편 정도일 것 같은 보슈의 남은 경찰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벌써부터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입니다. 부디 다음 작품 ‘The Crossing’의 한국 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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