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부패에서 구하소서
쯔진천 지음, 박소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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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교수이자 범죄논리학자 옌량을 앞세운 일명 추리의 왕(推理之王) 시리즈로 잘 알려진 쯔진천이 이전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이야기를 선보였습니다. 묵직하고 어두운 미스터리가 주 특기였던 그가 슬랩스틱 스릴러 혹은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추리소설의 탈을 쓴 코믹 활극이라는 가볍고 통통 튀는 서사를 다룰 거라곤 예상할 수 없었기에 읽기 전부터 무척이나 흥미를 끄는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범죄 자체는 심상치 않습니다. 폭탄까지 동원하는 2인조 강도, 부와 권력을 지닌 부패한 기업가와 정치인, 그리고 적잖이 벌어지는 살인사건 등 범죄의 무게감이나 잔혹함은 여느 장르물 못잖게 심각하게 설정돼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심각한 재료들을 지지고 볶기 위한 레시피는 슬랩스틱과 코믹이라는 정반대의 코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레시피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좌충우돌 경찰 캐릭터입니다. 주인공 장이앙은 무능한 것인지 관운이 따르지 않았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인물로 어느 날 갑자기 낙하산을 타고 싼장커우 공안국 부국장에 취임한 뒤 잇달아 강력범죄를 해결하면서 주목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어찌 보면 100% 행운에 의한 걸식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정말 뛰어난 직감과 추리력에 의한 것 같기도 해서, 마지막까지도 그의 진면목이 어떤 것인지 그저 애매모호할 따름입니다. (물론 이 애매모호함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장이앙 주위의 경찰들 역시 코믹 경찰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인데, 늘 실수만 저지르는 머저리’, 모범경찰 같지만 속물적인 근성을 지닌 자, 고위직의 조카로 현장 형사를 꿈꾸는 사고뭉치, 그리고 장이앙의 성공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고위관료들이 그들입니다.

 

슬랩스틱 코믹 레시피의 또 다른 핵심요소는 우연과 필연을 통해 거미줄처럼 연결되는 사건들입니다. 애초 아무 상관도 없는 인물과 사건들이 예기치 못한 우연을 통해 연결이 되고, 그 결과는 또 다른 인물과 사건에 영향을 미칩니다. 가령, 형사 장이앙과 2인조 무장강도는 이 연결고리 중 하나만 빠졌어도 절대로 만날 일이 없는 관계였지만 몇 번의 우연과 필연이 거듭된 끝에 그야말로 어이없는 상황에서 대치하게 됩니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인물들이 이런 식의 예상치 못한 악연을 맺게 되는데 이 복잡하고 정교한 장면들은 동시에 쉴 새 없이 실소를 자아내는 코믹 요소까지 품고 있어서 이 작품이 슬랩스틱 스릴러혹은 추리소설의 탈을 쓴 코믹 활극으로 불리는 이유를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도 워낙 많고 사건도 그만큼 많아서 줄거리 정리가 쉽지 않아 대략적인 인상비평이 되고 말았는데,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천재인지 운빨이 좋은 건지 알 수 없는 형사 장이앙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사건에 관여하던 중 싼장커우의 부패한 기업가, 흉포한 2인조 무장강도, 경찰과 민간인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을 잇달아 제압하는 이야기입니다. (사건의 진상은 장이앙의 노력과는 거의 무관하게 범죄자들간의 우연한 악연 덕분에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고,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장이앙은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들고 나타난 명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대목이 이 작품의 가장 매력적인 설정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선 다만 부패에서 구하소서라는 흥미진진한 제목으로 출간됐지만 사실 이 작품의 원제는 低智商犯罪’, 즉 한국식으로 직역하면 저지능범죄입니다. 아예 제목부터 작정하고 코믹을 강조한 셈인데, 실제로 경찰과 범죄자를 막론하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 풀린 듯한 저지능캐릭터에 가깝습니다. 또 쯔진천 스스로 그냥 재미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 즐겁게 읽으면 그만이다.”라고 밝힌 걸 보면 이 작품의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작품이 쯔진천의 작품 세계 제2막을 여는 신호탄 격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옮긴이의 말은 조금은 우려되는(?) 대목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론 이 작품이 맛깔난 간식으로는 괜찮았지만 쯔진천이 계속 이런 스타일을 고집하는 건 그다지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 작품이 SF를 기반으로 한 범죄추리소설이라고 하는데, 그 역시 코믹을 바탕에 둔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추리의 왕 시리즈가 한 편이라도 더 나오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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