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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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친구를 살해한 죄로 10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토비아스는 자신 때문에 가족이 산산이 해체되고 가업이 몰락한 현실을 목도하곤 절망감과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사건 당시 술에 취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상태에서 경찰이 들이민 정황 증거만으로 살인범 혐의를 썼던 토비아스는 뒤늦게라도 진실을 알아내려 하지만 폐쇄적인 고향마을 알텐하인 사람들은 그에게 철저히 등을 돌리고 혐오의 시선만 보낼 뿐입니다. 한편 베를린에 살다가 반강제로 따분한 시골마을 알텐하인에 머물게 된 18살 소녀 아멜리는 토비아스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 흥분에 사로잡혀 독자적인 조사를 시작합니다.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팀의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지하탱크에서 발견된 유골과 한 중년여성의 추락사고를 수사하던 중 토비아스 사건과의 연관성을 의심합니다. 그리고 곧 11년 전 경찰 수사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처음 읽은 건 꼭 10년 전의 일입니다. ‘타우누스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지만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이유는 그만큼 재미와 완성도가 뛰어났기 때문인데, 10년 만에 다시 읽어도 역시 그 명성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몇 번이고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큰 틀은 스스로 살인을 저질렀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10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토비아스가 지독히도 폐쇄적인 고향마을 알텐하인에서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여정입니다. 그 여정에는 따분한 일상에 질려있던 호기심 많은 18세 소녀 아멜리와 뛰어난 그림 재능을 갖고 있는 자폐증 환자 티스가 함께 합니다. 또한 다른 사건을 수사하다가 토비아스 사건에 의문을 품게 된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알텐하인 주민들의 비밀들을 차근차근 풀어가는 이야기가 또 하나의 큰 축을 맡고 있습니다.

추악한 행적을 은폐하려는 악의, 피도 눈물도 없는 더러운 탐욕, 일그러진 애정에서 비롯된 시기와 질투, 그리고 이주해오는 사람도 없이 토착민들이 대를 이으며 살고 있는 알텐하인의 폐쇄성까지 뒤섞인 11년 전의 진실은 피아와 보덴슈타인, 아멜리와 티스에 의해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지만 거의 마지막 장까지 새로운 정보와 사실들이 연이어 터지는 탓에 독자 입장에선 쉽사리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앞선 타우누스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등장인물도 워낙 많고 사건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짧게라도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불가능한 작품이지만,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전작들과 달리 모든 요소들이 선명하게 전개되고 깔끔하게 정리돼서 조금의 불편함이나 두통을 겪지 않고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인물관계도를 그리거나 메모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복잡한 대목들이 등장하긴 합니다. 11년 전에 벌어진 사건 자체는 단순했지만 그것을 은폐하고 조작했던 사람들의 머리수도 무척 많고 그들의 악의는 제각각 다른 모양새를 띠고 있는데다 그 뿌리부터 실타래처럼 뒤엉켜있어서 진실을 쫓는 모든 이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넬레 노이하우스는 (전작에서 다소 우왕좌왕했던 것과는 달리) 인물 하나하나, 단서 하나하나까지 잘 챙겨가며 자신이 짠 정교한 설계도에 따라 이야기를 매끄럽게 풀어나갑니다.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적잖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지루할 새가 없었던 건 바로 이런 매력들 덕분입니다.

 

사건 자체만큼 독자의 눈길을 끈 건 보덴슈타인의 개인사, 26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코지마와의 갈등입니다. 거기다가 부하들의 잇단 일탈까지 겹치면서 보데슈타인은 일과 가정 모두를 상실한 듯한 자괴감과 절망감에 빠지는데, 늘 반듯하고 철두철미했던 보덴슈타인이 감정적으로 동요하며 수사에서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타우누스 시리즈의 독자에겐 안타까우면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출간 기준으로) ‘잔혹한 어머니의 날까지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이 소개됐지만 역시 타우누스 시리즈의 정점을 찍은 작품은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입니다. 물론 다른 작품들도 각각 특별한 매력과 미덕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모든 요소들이 골고루 빛을 발하며 마지막까지 흥분과 긴장을 만끽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타우누스 시리즈뿐 아니라 스릴러 전체를 통틀어서도 열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작품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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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황무지
S. A. 코스비 지음, 윤미선 옮김 / 네버모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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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러가드 버그몽타주는 한때 범죄현장 도주차량 운전에 관한 한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드라이버입니다. 과거를 청산한 뒤로 버지니아의 레드힐 카운티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며 가족과의 안온한 삶을 유지해왔지만, 인근에 대형 정비소가 들어선 이후로 보러가드는 치명적인 위기에 빠집니다. 은행 대출이 막혀 정비소의 존폐조차 위태로워진데다 10대 시절에 낳은 딸의 대학등록금, 어머니의 요양 병원비 단돈 1달러가 절실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함께 일했던 미치광이로니로부터 다이아몬드 탈취라는 솔깃한 제안을 받은 보러가드는 고민 끝에 딱 한 번만 과거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사태는 급변하고 보러가드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위험한 지경에 빠지고 맙니다.

 

첫 장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주인공 보러가드가 모는 머슬카에 탑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옮긴이의 말대로 읽는 내내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급격하게 요동치는 탈선 직전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하이스트 누아르, 즉 범죄의 계획과 실행과정을 상세히 묘사한 전형적인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지만, ‘검은 황무지는 주인공 보러가드의 캐릭터와 그의 상처투성이 가족사 덕분에 혈관을 폭발시킬 것 같은 초긴장에 더해 묵직하고 애틋한 비극의 서사까지 맛볼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지막 딱 한 번!”이란 다짐으로 시작된 다이아몬드 탈취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보러가드는 말 그대로 지옥불에 빠지고 맙니다. 문제는 그 지옥불이 보러가드의 모든 것이기도 한 아내와 자식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친 점입니다. 결국 보러가드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피와 살이 난무하는 전쟁을 치르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의 한복판으로 내동댕이쳐집니다. 과거를 청산하고 평범한 삶을 꿈꾸던 보러가드는 자신에게 내재된 또 하나의 자아, 즉 최고의 도주차량 드라이버였던 시절의 버그가 결국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고 자책합니다.

 

제 자아가 두 개라고 생각해왔어요. 보러가드에게는 와이프와 아이들이 있어요. 사업을 운영하고 아이들 학예회에 빠지지 않죠. 버그는 은행을 털고 급회전구간에서도 시속 160km로 차를 몰아요. 사촌을 죽인 놈들을 차 분쇄기에 넣고 갈아버리죠. 아빠가 옳았어요. 한 사람이 두 개의 삶을 살 수는 없어요. 결국엔 한 놈의 고삐가 풀려 다 망쳐버리죠.” (p342)

 

굉음을 내며 거침없이 폭주하는 머슬카와 함께 보러가드의 삶을 지배해온 건 품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아버지의 망령입니다. 특히 도주차량 드라이버의 완벽한 재능과 잔혹한 폭력성의 유전자까지 고스란히 물려준 아버지는 보러가드에게는 평생 애증의 대상이었습니다. 가족들을 버리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동시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웅으로 여기며 그가 남긴 머슬카 더스터를 목숨만큼 아끼는 집착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자기 자신도 아버지처럼 가족을 위기에 몰아넣고 어디론가 사라져야만 하는 처지가 되자 차라리 범죄자에 술주정뱅이에 나쁜 남편이었던 아버지가 더 솔직하고 당당했다는 자책에 빠지게 됩니다. ‘검은 황무지가 단순히 돈을 목적으로 한 주인공의 범행을 그린 하이스트 누아르 이상의 품격을 갖추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보러가드의 가족사 덕분입니다.

 

다이아몬드 탈취사건이 일으킨 나비효과와도 같은 피비린내 진동하는 살육전은 반전을 거듭하며 팽팽한 긴장감과 잔혹한 폭력성 이상의 흥분을 선사합니다. 때론 보러가드에 지나치게 이입한 나머지 마치 직접 총과 주먹을 휘두르는 듯한 쾌감에 빠지기도 하고, 때론 그가 처한 비참한 처지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안쓰러움과 애틋함에 푹 젖어들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검은 황무지라는 제목에 걸맞게 누아르를 읽으면서 만끽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컷 즐기고도 남을 만큼 순도와 농도가 대단한 작품이란 뜻입니다.

 

검은 황무지S. A. 코스비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데뷔작인 ‘My Darkest Prayer’는 물론 세 번째 작품으로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는 ‘Razorblade Tears’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너무 궁금해졌는데, ‘검은 황무지가 좋은 성과를 내서 그의 작품들이 계속 한국에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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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대마초 여인
안네로르 케르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사상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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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여성 파티앙스 포르트푀의 직함은 프랑스 법무부 소속 아랍어 통번역사지만, 실은 불규칙한 시간당 페이를 받을 뿐 사회보장도 연금도 못 받는 불법노동자입니다. 두 딸의 교육비와 어머니의 요양 병원비 때문에 25년 넘게 고된 삶을 살아온 파티앙스에게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워낙 어수룩한데다 순진함마저 엿보여 인간적인 호감까지 느꼈던 한 모로코 대마초 딜러의 통화 내역을 번역하던 파티앙스는 프랑스 경찰의 체포 계획을 눈치 채곤 엉겁결에 연락을 취해 당장 대마초를 버리고 신속히 피하라고 권합니다. 문제는 그 직후 복잡한 심경들이 파티앙스를 뒤흔들었다는 점입니다. 늘 돈에 쪼들려온 비루한 자신의 현실, 법을 지키지 않는 법무부의 이중성, 공공연한 마약 거래의 실상... 결국 파티앙스는 그 모든 지긋지긋한 현실을 증오하며 모로코 딜러가 버린 대마초를 빼돌리기로 결심합니다.

 

파리의 대마초 여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롤러코스터처럼 급상승과 급하강을 쉴 새 없이 반복하는 흥미진진한 작품입니다. 아랍권 범죄자의 통화 도청내역을 번역하던 일종의 감시자였던 평범한 여성이 감시대상이던 대마초 딜러를 도우려다가 오히려 대량의 대마초를 손에 넣은 뒤 중간도매상으로 맹활약한다는 설정 자체만 봐도 이야기의 굴곡이 얼마나 크고 급격할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돈은 모든 것이다’(1), ‘겁대가리 없는 유대인 여자에게 불가능이란 없다’(3)라는 소제목들은 주인공 파티앙스가 어떤 캐릭터의 여성인지 잘 대변하고 있는데, 실제 이야기 속의 파티앙스는 그 이상의 카리스마와 매력을 내뿜으며 거침없는 광폭행보를 내딛습니다.

 

하지만 대마초 중간도매상파티앙스의 석세스 스토리만 그려졌다면 아마 단순한 할리우드 액션 스릴러 이상의 미덕을 찾아보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에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끈 대목은 현실에 분노하고 환멸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된 그녀의 기구한 성장기와 가족사입니다.

어린 시절, 불법적인 사업으로 큰돈을 거머쥔 부모 덕분에 파티앙스는 평생 전 세계의 여름을 찾아다니며 불꽃놀이를 수집하겠다는 꿈을 품기도 했지만, 한순간 인생 경로가 나락으로 내팽개쳐진 뒤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해왔습니다. 하루 종일 중국인들의 고함소리가 날뛰는 낡은 아파트는 지긋지긋했고, 딸들과 어머니에게 들어가는 돈은 한도 끝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범죄를 막기 위해 자신의 아랍어 재능을 쥐어짜내면서도 결코 정규직으로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현실들에 치인 나머지 언젠가부터 자신이 감시하는 일부 아랍인 범죄자들에게 차별받는 약자라는 연대감과 함께 동정과 연민을 보내온 파티앙스로서는 엉겁결이긴 해도 어수룩한 모로코 대마초 딜러를 돕는 것이 그리 놀라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후 자신이 다론’(엄마를 뜻하는 은어)이라는 별명까지 얻어가며 대마초 도매상으로 맹활약할 거라곤 전혀 예측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대마초 딜러를 도망치게 돕고, 그의 대마초를 불법적으로 손에 넣은 뒤 큰돈을 거머쥐는 파티앙스의 행동은 올바름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이지만, 파티앙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녀가 혐오한 프랑스의 현실이 설득력 있게 설정된 덕분에 옮긴이의 말대로 일종의 후련함마저 느낄 수 있는 중년여성의 분투기 혹은 판타지로 읽힌 게 사실입니다.

파티앙스의 여정은 그저 돈으로 처바른 즐거움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또 경찰의 주요 목표물이 된 대마초 도매상 다론파티앙스의 행보 역시 결코 순탄하게만 전개되지 않습니다. 300페이지도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쉽사리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짜릿한 롤러코스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족으로... 올해(2021) 프랑스 미스터리-스릴러를 세 편 읽었는데, ‘프랑스 소설하면 떠오르는 어쩔 수 없는 편견을 저 역시 어느 정도 갖고 있었지만, ‘파리의 대마초 여인을 비롯하여 포커 플레이어 그녀’(브누아 필리퐁)마리에게 생긴 일’(이네스 바야르) 모두 독특한 매력과 여운을 만끽할 수 있어서 스스로 무척 놀란 게 사실입니다. 영미권과 북유럽 스릴러와는 사뭇 다른 프랑스 장르물만의 스타일과 힘을 새롭게 발견한 한 해라고 할까요? 내년에도 이런 즐거운 발견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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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예술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정윤희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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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말로 시리즈가 제 책장에 꽂힌 건 꽤 오래 전 일이지만, 앞선 두 편만 읽은 뒤로 거의 방치해온 게 사실입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제 취향과 잘 안 맞은 탓에 흠뻑 빠져들지 못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꼭 한 번 재도전하고 싶은 시리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레이먼드 챈들러의 단편집이 출간됐다는 소식에 색다른 기대감이 들었던 건데, ‘살인의 예술1934~1944년 사이에 발표된 그의 단편 가운데 다섯 편을 수록한 작품입니다.

 

다섯 편 모두 제각각의 (전현직) 사립탐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복수와 탐욕에서 비롯된 살인사건부터 유쾌한 블랙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절도사건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포진돼있습니다. 무미건조까지는 아니어도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캐릭터로 설정돼있는데, 심성과 관계없이 대체로 딱딱하거나 차갑거나 혹은 훈훈한 캐릭터라 해도 타인과의 거리감을 확실하게 두는 인물들이라 나름 독특한 매력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정도 상처도 풍부한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지만, 영화에서나 맛볼 수 있는 1930~40년대 미국 대도시의 아날로그 감성과 잘 맞아 떨어지는 인물들이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도 적지 않고 사건의 배경 역시 꽤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대충 숲은 보이는데 그 안의 나무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난감한 상황들과 종종 마주치곤 합니다. 두 번째, 다섯 번째 수록작인 영리한 살인자시라노 클럽 총격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리저리 복잡하게 꼬인 설정들 때문에 범인의 동기나 사립탐정의 행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도 깔끔한 마무리를 맛볼 수 없었습니다. 빠르고 독한 이야기와 확실하고 선명한 구도를 선호하는 요즘의 스릴러 독자에겐 (레이먼드 챈들러가 20세기 초중반에 활약한 작가라는 점과 관계없이) 조금은 버거운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다소 평범한 구도이긴 해도 의외의 범인이 폭로된 황금 옷을 입은 왕과 블랙코미디의 미덕이 빛났던 사라진 진주 목걸이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편집에 관해 몇 마디 꼭 보태고 싶은 점들이 있는데, 우선 책날개에 인쇄된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소개가 너무 부실합니다. 그가 활약했던 시대에 대한 언급 하나 없이 마치 최근까지 활동한 작가처럼 보이게 만든 점도, 또 그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하드보일드에 대한 설명 하나 없던 점도 아쉬웠습니다. , 번역제목을 살인의 예술로 삼았고 원제를 ‘The Simple Art of Murder’로 소개했지만, 레이먼드 챈들러가 기존의 추리소설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짧은 에세이 ‘The Simple Art of Murder’는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제목만 빌려오고 정작 그 에세이는 빠진 셈입니다. 더불어, 각 단편마다 각주로 원제를 표기해줬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도 함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간혹 두세 번 되읽어도 애매모호했던 번역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는데, 원작 자체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때도 있었지만 앞뒤 맥락이 안 맞거나 비문처럼 읽힌 경우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책장에 방치된 필립 말로 시리즈를 볼 때마다 마무리 짓지 못한 숙제처럼 늘 찜찜함을 느끼곤 했는데, 이 작품을 계기로 재도전해보려는 욕심을 가져본 게 사실입니다. 절반쯤은 여전히 그 욕심이 꿈틀대지만, 절반쯤은 역시 나랑은 잘 안 맞나?”라는 회의가 들기도 하는데, 머잖아 시리즈 첫 편인 빅 슬립을 통해 결단(?)을 내려 보려고 합니다. 오래 전 기억과 달리 어쩌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진짜 매력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기대와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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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워칭 유
테레사 드리스콜 지음, 유혜인 옮김 / 마시멜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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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행 기차를 탄 중년여성 엘라는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20대 남자들이 런던이 초행인 10대 소녀들을 유혹하는 위험한 상황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서 엘라는 소녀들을 도우려던 생각을 접습니다. 다음 날 소녀들 중 한 명인 애나 밸러드가 실종됐다는 뉴스를 본 엘라는 충격에 빠집니다. 더구나 목격 증언을 한 뒤로 엘라는 기차에서 애나를 돕지 않았다며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맹비난을 받는 처지가 됩니다. 사건 1주년 특별방송 즈음, 엘라를 비롯하여 애나 주위의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비밀이 혹시라도 애나의 실종과 이어져 있을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편 엘라는 익명의 검은 엽서를 받는데, 거기엔 1년 전 그녀의 실수를 비난하는 협박 메시지가 적혀있습니다.

 

1년 전 실종된 애나를 찾는 이야기(누가 애나를 납치했나?)와 현재 엘라에게 협박 엽서를 보내는 자가 누구인지를 찾는 미스터리가 핵심이지만, 오히려 애나의 실종과 관련된 주변 인물들의 비밀과 두려움을 다룬 심리 스릴러의 성격이 더 강한 작품입니다.

기차에서 애나를 돕지 않은 일 때문에 사회적인 비난은 물론 그녀 스스로 죄책감에 사로잡혀있던 엘라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과 가정의 뿌리까지 뒤흔들리는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실종 당일 애나와 동행했던 세라는 혹시 자신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애나가 끔찍한 짓을 당한 게 아닐지 두려워합니다. 애나의 아버지 헨리는 실종 당일 애나가 자신에게 실망하며 격분했던 일도 걱정되지만, 그날 자신의 행적을 거짓으로 진술했던 일 때문에 더욱 전전긍긍합니다. 엘라에게 고용된 전직 경찰이자 사설탐정인 매슈는 검은 엽서의 발신자를 찾기 위해 애쓰면서 동시에 애나 실종사건의 실마리를 잡으려는 노력도 병행합니다.

 

엘라를 포함하여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여러 명의 화자가 번갈아 챕터를 이끌어 가는데, 덕분에 애나 실종사건의 이면에 얽힌 여러 인물들의 복잡한 사정이 사건 자체보다 더 눈길을 끕니다. 이런 설정은 사건의 단순성을 극복하는 힘을 갖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사건 자체를 덜 흥미롭게 만드는 약점도 갖고 있습니다.

애나 실종사건 자체와 별 관계없는, 그러니까 어차피 벌어졌을 일들이 꽤 많은 분량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인데, 실종사건과 무관하게 별거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애나 부모의 사정이라든가, 애나의 실종에 가장 큰 죄책감을 갖고 있는 세라의 끔찍한 가족사, 경찰을 그만두고 탐정의 길을 택한 매슈의 개인적인 사정 등이 그것입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모두 흥미롭긴 하지만, 정작 중심 사건인 애나의 실종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특히 막판에 밝혀진 애나 실종사건의 진실과 범인의 정체는 반전이라기보다는 조금은 뜬금없기도 하고 반전을 위한 반전처럼 억지스럽게 보여서 이 작품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실종 미스터리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그렇다고 심리스릴러로 보기에는 각 인물의 에피소드가 독립성이 너무 강해서 중심사건과 무관한 따로국밥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실종사건에 연루된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비밀은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소재이긴 하지만, 뭔가 있어 보이게 포장됐던 실종 미스터리가 너무 맥없이 풀리는 바람에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엔딩이 되고 말았다고 할까요? 마지막 장을 덮은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어떤 이야기를 읽은 건지 한 줄로 정리되지 않는 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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