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황무지
S. A. 코스비 지음, 윤미선 옮김 / 네버모어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러가드 버그몽타주는 한때 범죄현장 도주차량 운전에 관한 한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드라이버입니다. 과거를 청산한 뒤로 버지니아의 레드힐 카운티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며 가족과의 안온한 삶을 유지해왔지만, 인근에 대형 정비소가 들어선 이후로 보러가드는 치명적인 위기에 빠집니다. 은행 대출이 막혀 정비소의 존폐조차 위태로워진데다 10대 시절에 낳은 딸의 대학등록금, 어머니의 요양 병원비 단돈 1달러가 절실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함께 일했던 미치광이로니로부터 다이아몬드 탈취라는 솔깃한 제안을 받은 보러가드는 고민 끝에 딱 한 번만 과거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사태는 급변하고 보러가드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위험한 지경에 빠지고 맙니다.

 

첫 장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주인공 보러가드가 모는 머슬카에 탑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옮긴이의 말대로 읽는 내내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급격하게 요동치는 탈선 직전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하이스트 누아르, 즉 범죄의 계획과 실행과정을 상세히 묘사한 전형적인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지만, ‘검은 황무지는 주인공 보러가드의 캐릭터와 그의 상처투성이 가족사 덕분에 혈관을 폭발시킬 것 같은 초긴장에 더해 묵직하고 애틋한 비극의 서사까지 맛볼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지막 딱 한 번!”이란 다짐으로 시작된 다이아몬드 탈취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보러가드는 말 그대로 지옥불에 빠지고 맙니다. 문제는 그 지옥불이 보러가드의 모든 것이기도 한 아내와 자식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친 점입니다. 결국 보러가드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피와 살이 난무하는 전쟁을 치르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의 한복판으로 내동댕이쳐집니다. 과거를 청산하고 평범한 삶을 꿈꾸던 보러가드는 자신에게 내재된 또 하나의 자아, 즉 최고의 도주차량 드라이버였던 시절의 버그가 결국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고 자책합니다.

 

제 자아가 두 개라고 생각해왔어요. 보러가드에게는 와이프와 아이들이 있어요. 사업을 운영하고 아이들 학예회에 빠지지 않죠. 버그는 은행을 털고 급회전구간에서도 시속 160km로 차를 몰아요. 사촌을 죽인 놈들을 차 분쇄기에 넣고 갈아버리죠. 아빠가 옳았어요. 한 사람이 두 개의 삶을 살 수는 없어요. 결국엔 한 놈의 고삐가 풀려 다 망쳐버리죠.” (p342)

 

굉음을 내며 거침없이 폭주하는 머슬카와 함께 보러가드의 삶을 지배해온 건 품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아버지의 망령입니다. 특히 도주차량 드라이버의 완벽한 재능과 잔혹한 폭력성의 유전자까지 고스란히 물려준 아버지는 보러가드에게는 평생 애증의 대상이었습니다. 가족들을 버리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동시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웅으로 여기며 그가 남긴 머슬카 더스터를 목숨만큼 아끼는 집착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자기 자신도 아버지처럼 가족을 위기에 몰아넣고 어디론가 사라져야만 하는 처지가 되자 차라리 범죄자에 술주정뱅이에 나쁜 남편이었던 아버지가 더 솔직하고 당당했다는 자책에 빠지게 됩니다. ‘검은 황무지가 단순히 돈을 목적으로 한 주인공의 범행을 그린 하이스트 누아르 이상의 품격을 갖추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보러가드의 가족사 덕분입니다.

 

다이아몬드 탈취사건이 일으킨 나비효과와도 같은 피비린내 진동하는 살육전은 반전을 거듭하며 팽팽한 긴장감과 잔혹한 폭력성 이상의 흥분을 선사합니다. 때론 보러가드에 지나치게 이입한 나머지 마치 직접 총과 주먹을 휘두르는 듯한 쾌감에 빠지기도 하고, 때론 그가 처한 비참한 처지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안쓰러움과 애틋함에 푹 젖어들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검은 황무지라는 제목에 걸맞게 누아르를 읽으면서 만끽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컷 즐기고도 남을 만큼 순도와 농도가 대단한 작품이란 뜻입니다.

 

검은 황무지S. A. 코스비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데뷔작인 ‘My Darkest Prayer’는 물론 세 번째 작품으로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는 ‘Razorblade Tears’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너무 궁금해졌는데, ‘검은 황무지가 좋은 성과를 내서 그의 작품들이 계속 한국에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리의 대마초 여인
안네로르 케르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사상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0대 여성 파티앙스 포르트푀의 직함은 프랑스 법무부 소속 아랍어 통번역사지만, 실은 불규칙한 시간당 페이를 받을 뿐 사회보장도 연금도 못 받는 불법노동자입니다. 두 딸의 교육비와 어머니의 요양 병원비 때문에 25년 넘게 고된 삶을 살아온 파티앙스에게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워낙 어수룩한데다 순진함마저 엿보여 인간적인 호감까지 느꼈던 한 모로코 대마초 딜러의 통화 내역을 번역하던 파티앙스는 프랑스 경찰의 체포 계획을 눈치 채곤 엉겁결에 연락을 취해 당장 대마초를 버리고 신속히 피하라고 권합니다. 문제는 그 직후 복잡한 심경들이 파티앙스를 뒤흔들었다는 점입니다. 늘 돈에 쪼들려온 비루한 자신의 현실, 법을 지키지 않는 법무부의 이중성, 공공연한 마약 거래의 실상... 결국 파티앙스는 그 모든 지긋지긋한 현실을 증오하며 모로코 딜러가 버린 대마초를 빼돌리기로 결심합니다.

 

파리의 대마초 여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롤러코스터처럼 급상승과 급하강을 쉴 새 없이 반복하는 흥미진진한 작품입니다. 아랍권 범죄자의 통화 도청내역을 번역하던 일종의 감시자였던 평범한 여성이 감시대상이던 대마초 딜러를 도우려다가 오히려 대량의 대마초를 손에 넣은 뒤 중간도매상으로 맹활약한다는 설정 자체만 봐도 이야기의 굴곡이 얼마나 크고 급격할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돈은 모든 것이다’(1), ‘겁대가리 없는 유대인 여자에게 불가능이란 없다’(3)라는 소제목들은 주인공 파티앙스가 어떤 캐릭터의 여성인지 잘 대변하고 있는데, 실제 이야기 속의 파티앙스는 그 이상의 카리스마와 매력을 내뿜으며 거침없는 광폭행보를 내딛습니다.

 

하지만 대마초 중간도매상파티앙스의 석세스 스토리만 그려졌다면 아마 단순한 할리우드 액션 스릴러 이상의 미덕을 찾아보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에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끈 대목은 현실에 분노하고 환멸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된 그녀의 기구한 성장기와 가족사입니다.

어린 시절, 불법적인 사업으로 큰돈을 거머쥔 부모 덕분에 파티앙스는 평생 전 세계의 여름을 찾아다니며 불꽃놀이를 수집하겠다는 꿈을 품기도 했지만, 한순간 인생 경로가 나락으로 내팽개쳐진 뒤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해왔습니다. 하루 종일 중국인들의 고함소리가 날뛰는 낡은 아파트는 지긋지긋했고, 딸들과 어머니에게 들어가는 돈은 한도 끝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범죄를 막기 위해 자신의 아랍어 재능을 쥐어짜내면서도 결코 정규직으로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현실들에 치인 나머지 언젠가부터 자신이 감시하는 일부 아랍인 범죄자들에게 차별받는 약자라는 연대감과 함께 동정과 연민을 보내온 파티앙스로서는 엉겁결이긴 해도 어수룩한 모로코 대마초 딜러를 돕는 것이 그리 놀라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후 자신이 다론’(엄마를 뜻하는 은어)이라는 별명까지 얻어가며 대마초 도매상으로 맹활약할 거라곤 전혀 예측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대마초 딜러를 도망치게 돕고, 그의 대마초를 불법적으로 손에 넣은 뒤 큰돈을 거머쥐는 파티앙스의 행동은 올바름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이지만, 파티앙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녀가 혐오한 프랑스의 현실이 설득력 있게 설정된 덕분에 옮긴이의 말대로 일종의 후련함마저 느낄 수 있는 중년여성의 분투기 혹은 판타지로 읽힌 게 사실입니다.

파티앙스의 여정은 그저 돈으로 처바른 즐거움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또 경찰의 주요 목표물이 된 대마초 도매상 다론파티앙스의 행보 역시 결코 순탄하게만 전개되지 않습니다. 300페이지도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쉽사리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짜릿한 롤러코스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족으로... 올해(2021) 프랑스 미스터리-스릴러를 세 편 읽었는데, ‘프랑스 소설하면 떠오르는 어쩔 수 없는 편견을 저 역시 어느 정도 갖고 있었지만, ‘파리의 대마초 여인을 비롯하여 포커 플레이어 그녀’(브누아 필리퐁)마리에게 생긴 일’(이네스 바야르) 모두 독특한 매력과 여운을 만끽할 수 있어서 스스로 무척 놀란 게 사실입니다. 영미권과 북유럽 스릴러와는 사뭇 다른 프랑스 장르물만의 스타일과 힘을 새롭게 발견한 한 해라고 할까요? 내년에도 이런 즐거운 발견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인의 예술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정윤희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필립 말로 시리즈가 제 책장에 꽂힌 건 꽤 오래 전 일이지만, 앞선 두 편만 읽은 뒤로 거의 방치해온 게 사실입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제 취향과 잘 안 맞은 탓에 흠뻑 빠져들지 못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꼭 한 번 재도전하고 싶은 시리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레이먼드 챈들러의 단편집이 출간됐다는 소식에 색다른 기대감이 들었던 건데, ‘살인의 예술1934~1944년 사이에 발표된 그의 단편 가운데 다섯 편을 수록한 작품입니다.

 

다섯 편 모두 제각각의 (전현직) 사립탐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복수와 탐욕에서 비롯된 살인사건부터 유쾌한 블랙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절도사건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포진돼있습니다. 무미건조까지는 아니어도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캐릭터로 설정돼있는데, 심성과 관계없이 대체로 딱딱하거나 차갑거나 혹은 훈훈한 캐릭터라 해도 타인과의 거리감을 확실하게 두는 인물들이라 나름 독특한 매력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정도 상처도 풍부한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지만, 영화에서나 맛볼 수 있는 1930~40년대 미국 대도시의 아날로그 감성과 잘 맞아 떨어지는 인물들이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도 적지 않고 사건의 배경 역시 꽤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대충 숲은 보이는데 그 안의 나무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난감한 상황들과 종종 마주치곤 합니다. 두 번째, 다섯 번째 수록작인 영리한 살인자시라노 클럽 총격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리저리 복잡하게 꼬인 설정들 때문에 범인의 동기나 사립탐정의 행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도 깔끔한 마무리를 맛볼 수 없었습니다. 빠르고 독한 이야기와 확실하고 선명한 구도를 선호하는 요즘의 스릴러 독자에겐 (레이먼드 챈들러가 20세기 초중반에 활약한 작가라는 점과 관계없이) 조금은 버거운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다소 평범한 구도이긴 해도 의외의 범인이 폭로된 황금 옷을 입은 왕과 블랙코미디의 미덕이 빛났던 사라진 진주 목걸이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편집에 관해 몇 마디 꼭 보태고 싶은 점들이 있는데, 우선 책날개에 인쇄된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소개가 너무 부실합니다. 그가 활약했던 시대에 대한 언급 하나 없이 마치 최근까지 활동한 작가처럼 보이게 만든 점도, 또 그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하드보일드에 대한 설명 하나 없던 점도 아쉬웠습니다. , 번역제목을 살인의 예술로 삼았고 원제를 ‘The Simple Art of Murder’로 소개했지만, 레이먼드 챈들러가 기존의 추리소설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짧은 에세이 ‘The Simple Art of Murder’는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제목만 빌려오고 정작 그 에세이는 빠진 셈입니다. 더불어, 각 단편마다 각주로 원제를 표기해줬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도 함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간혹 두세 번 되읽어도 애매모호했던 번역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는데, 원작 자체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때도 있었지만 앞뒤 맥락이 안 맞거나 비문처럼 읽힌 경우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책장에 방치된 필립 말로 시리즈를 볼 때마다 마무리 짓지 못한 숙제처럼 늘 찜찜함을 느끼곤 했는데, 이 작품을 계기로 재도전해보려는 욕심을 가져본 게 사실입니다. 절반쯤은 여전히 그 욕심이 꿈틀대지만, 절반쯤은 역시 나랑은 잘 안 맞나?”라는 회의가 들기도 하는데, 머잖아 시리즈 첫 편인 빅 슬립을 통해 결단(?)을 내려 보려고 합니다. 오래 전 기억과 달리 어쩌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진짜 매력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기대와 함께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임 워칭 유
테레사 드리스콜 지음, 유혜인 옮김 / 마시멜로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런던행 기차를 탄 중년여성 엘라는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20대 남자들이 런던이 초행인 10대 소녀들을 유혹하는 위험한 상황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서 엘라는 소녀들을 도우려던 생각을 접습니다. 다음 날 소녀들 중 한 명인 애나 밸러드가 실종됐다는 뉴스를 본 엘라는 충격에 빠집니다. 더구나 목격 증언을 한 뒤로 엘라는 기차에서 애나를 돕지 않았다며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맹비난을 받는 처지가 됩니다. 사건 1주년 특별방송 즈음, 엘라를 비롯하여 애나 주위의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비밀이 혹시라도 애나의 실종과 이어져 있을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편 엘라는 익명의 검은 엽서를 받는데, 거기엔 1년 전 그녀의 실수를 비난하는 협박 메시지가 적혀있습니다.

 

1년 전 실종된 애나를 찾는 이야기(누가 애나를 납치했나?)와 현재 엘라에게 협박 엽서를 보내는 자가 누구인지를 찾는 미스터리가 핵심이지만, 오히려 애나의 실종과 관련된 주변 인물들의 비밀과 두려움을 다룬 심리 스릴러의 성격이 더 강한 작품입니다.

기차에서 애나를 돕지 않은 일 때문에 사회적인 비난은 물론 그녀 스스로 죄책감에 사로잡혀있던 엘라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과 가정의 뿌리까지 뒤흔들리는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실종 당일 애나와 동행했던 세라는 혹시 자신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애나가 끔찍한 짓을 당한 게 아닐지 두려워합니다. 애나의 아버지 헨리는 실종 당일 애나가 자신에게 실망하며 격분했던 일도 걱정되지만, 그날 자신의 행적을 거짓으로 진술했던 일 때문에 더욱 전전긍긍합니다. 엘라에게 고용된 전직 경찰이자 사설탐정인 매슈는 검은 엽서의 발신자를 찾기 위해 애쓰면서 동시에 애나 실종사건의 실마리를 잡으려는 노력도 병행합니다.

 

엘라를 포함하여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여러 명의 화자가 번갈아 챕터를 이끌어 가는데, 덕분에 애나 실종사건의 이면에 얽힌 여러 인물들의 복잡한 사정이 사건 자체보다 더 눈길을 끕니다. 이런 설정은 사건의 단순성을 극복하는 힘을 갖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사건 자체를 덜 흥미롭게 만드는 약점도 갖고 있습니다.

애나 실종사건 자체와 별 관계없는, 그러니까 어차피 벌어졌을 일들이 꽤 많은 분량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인데, 실종사건과 무관하게 별거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애나 부모의 사정이라든가, 애나의 실종에 가장 큰 죄책감을 갖고 있는 세라의 끔찍한 가족사, 경찰을 그만두고 탐정의 길을 택한 매슈의 개인적인 사정 등이 그것입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모두 흥미롭긴 하지만, 정작 중심 사건인 애나의 실종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특히 막판에 밝혀진 애나 실종사건의 진실과 범인의 정체는 반전이라기보다는 조금은 뜬금없기도 하고 반전을 위한 반전처럼 억지스럽게 보여서 이 작품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실종 미스터리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그렇다고 심리스릴러로 보기에는 각 인물의 에피소드가 독립성이 너무 강해서 중심사건과 무관한 따로국밥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실종사건에 연루된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비밀은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소재이긴 하지만, 뭔가 있어 보이게 포장됐던 실종 미스터리가 너무 맥없이 풀리는 바람에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엔딩이 되고 말았다고 할까요? 마지막 장을 덮은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어떤 이야기를 읽은 건지 한 줄로 정리되지 않는 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진 소녀들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46년 뉴욕. 작은 법률사무소의 사무원인 그레이스 힐리는 기차역 벤치에 버려진 여행가방에서 10여 장에 가까운 젊은 여자들의 독사진을 발견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가방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그레이스는 알 수 없는 호기심에 사진들을 갖고 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가방 주인인 엘레노어 트리그라는 여자가 2차 세계대전 중 창설된 영국 특수작전국 요원임을 알아내곤 그녀와 사진 속 젊은 여자들의 사연을 조사하기로 결심합니다.

1944년 런던과 파리. 영국 특수작전국장의 비서였던 엘레노어 트리그는 국장의 전격적인 결정에 의해 여자 특수요원들을 발굴하고 훈련시키는 일을 맡습니다. 엘레노어에 의해 발굴된 요원 중 한 명은 홀로 5살 딸을 키우던 마리입니다. 프랑스어에 능통하지만 특수요원으로서의 재능이라곤 전혀 없었던 마리는 파리에 투입된 이후 위험한 작전들을 무사히 수행합니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 파리의 비밀조직과 특수요원들이 독일군에게 일망타진됩니다. 누군가의 배신이 아니고선 절대 벌어질 수 없었던 대참극에 엘레노어와 마리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나 스릴러는 무려 80여 년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인 서사와 진한 여운을 품고 있는 장르입니다. 올해(2021) 유독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거나 그 당시 사건이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많이 접했는데, 리스 보엔의 팔리 들판에서’, 에릭 앰블러의 공포로의 여행’, 헤더 모리스의 실카의 여행이 전자라면, 넬레 노이하우스의 깊은 상처는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사라진 소녀들은 공식 직함은커녕 아무런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여자 특수요원들의 활약과 비극을 한 축으로, 또 그녀들의 감춰진 진실을 좇는 긴박한 미스터리를 다른 한 축으로 삼아 전쟁의 비극이라는 주제를 나름 독특한 관점에서 바라본 작품입니다. 엘레노어와 마리가 1943~1944년의 런던과 파리를 무대로 여자 특수요원들의 활약과 비극을 설명하고 있고, 전쟁 직후인 1946년을 무대로 우연히 엘레노어의 여행가방에서 젊은 여자들의 사진을 발견한 그레이스가 그녀들의 사연을 조사하며 누가 그녀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으며, 왜 엘레노어는 전쟁이 끝난 후 그녀들의 사진을 들고 뉴욕에 나타났나?”를 추적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독일에게 점령당한 이후 젊은 남자들이 사라진 프랑스에서 영국의 남자 특수요원들이 속절없이 독일군에게 체포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여자 특수요원이었습니다. 지극히 남성우월의식이 팽배해있던 시절인데다 군대라는 조직의 보수성은 더 극단적이어서 애초 여자 특수요원의 양성과 파견은 잘 해야 비웃음, 보통은 비아냥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레노너와 마리 등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고 불과 1년 만에 여자 특수요원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소소한 희생은 불가피한 법이라는 전쟁의 딜레마 속에서 여자 특수요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고문 후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이해야 했고, 1944년 런던의 엘레노어와 1946년 뉴욕의 그레이스는 그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큰 틀만 놓고 보면 조국을 위해 싸웠지만 무참히 버려진 이름 없는 용사들의 진실을 좇는 이야기라는, 다소 낯익은 구조를 갖고 있지만, 엘레노어-마리-그레이스라는 세 명의 화자를 동원하여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정교하게 병행시킨 덕분에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전쟁의 비극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우연히 습득한 젊은 여자들의 사진에 마음을 빼앗겨 그녀들이 겪은 참상을 조사하는 그레이스의 챕터는 명탐정 미스터리 못잖은 긴장감과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전쟁 장르물 이상의 미덕을 만끽하게 만듭니다. 또 스스로 발굴하고 훈련시킨 특수요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전쟁 중에는 물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집요하게 추적하는 엘레노어의 죄책감과 사명감은 비장한 느낌까지 들게 만듭니다.

 

전쟁 서사와 미스터리의 조합 자체가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사라진 소녀들은 그 분야에 있어서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2차 대전과 여자 특수요원이란 설정 때문에 자칫 선입견을 가질 독자도 적지 않을 것 같지만 사라진 소녀들은 분명 그 선입견 이상의 여운을 제공하는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론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기도 했는데, 시공간은 물론 캐릭터들도 워낙 매력적이라 영상으로 만난다면 원작 이상의 감흥을 누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