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예술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정윤희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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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말로 시리즈가 제 책장에 꽂힌 건 꽤 오래 전 일이지만, 앞선 두 편만 읽은 뒤로 거의 방치해온 게 사실입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제 취향과 잘 안 맞은 탓에 흠뻑 빠져들지 못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꼭 한 번 재도전하고 싶은 시리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레이먼드 챈들러의 단편집이 출간됐다는 소식에 색다른 기대감이 들었던 건데, ‘살인의 예술1934~1944년 사이에 발표된 그의 단편 가운데 다섯 편을 수록한 작품입니다.

 

다섯 편 모두 제각각의 (전현직) 사립탐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복수와 탐욕에서 비롯된 살인사건부터 유쾌한 블랙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절도사건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포진돼있습니다. 무미건조까지는 아니어도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캐릭터로 설정돼있는데, 심성과 관계없이 대체로 딱딱하거나 차갑거나 혹은 훈훈한 캐릭터라 해도 타인과의 거리감을 확실하게 두는 인물들이라 나름 독특한 매력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정도 상처도 풍부한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지만, 영화에서나 맛볼 수 있는 1930~40년대 미국 대도시의 아날로그 감성과 잘 맞아 떨어지는 인물들이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도 적지 않고 사건의 배경 역시 꽤 복잡하게 설정돼있어서 대충 숲은 보이는데 그 안의 나무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난감한 상황들과 종종 마주치곤 합니다. 두 번째, 다섯 번째 수록작인 영리한 살인자시라노 클럽 총격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리저리 복잡하게 꼬인 설정들 때문에 범인의 동기나 사립탐정의 행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도 깔끔한 마무리를 맛볼 수 없었습니다. 빠르고 독한 이야기와 확실하고 선명한 구도를 선호하는 요즘의 스릴러 독자에겐 (레이먼드 챈들러가 20세기 초중반에 활약한 작가라는 점과 관계없이) 조금은 버거운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다소 평범한 구도이긴 해도 의외의 범인이 폭로된 황금 옷을 입은 왕과 블랙코미디의 미덕이 빛났던 사라진 진주 목걸이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편집에 관해 몇 마디 꼭 보태고 싶은 점들이 있는데, 우선 책날개에 인쇄된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소개가 너무 부실합니다. 그가 활약했던 시대에 대한 언급 하나 없이 마치 최근까지 활동한 작가처럼 보이게 만든 점도, 또 그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하드보일드에 대한 설명 하나 없던 점도 아쉬웠습니다. , 번역제목을 살인의 예술로 삼았고 원제를 ‘The Simple Art of Murder’로 소개했지만, 레이먼드 챈들러가 기존의 추리소설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짧은 에세이 ‘The Simple Art of Murder’는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제목만 빌려오고 정작 그 에세이는 빠진 셈입니다. 더불어, 각 단편마다 각주로 원제를 표기해줬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도 함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간혹 두세 번 되읽어도 애매모호했던 번역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는데, 원작 자체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때도 있었지만 앞뒤 맥락이 안 맞거나 비문처럼 읽힌 경우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책장에 방치된 필립 말로 시리즈를 볼 때마다 마무리 짓지 못한 숙제처럼 늘 찜찜함을 느끼곤 했는데, 이 작품을 계기로 재도전해보려는 욕심을 가져본 게 사실입니다. 절반쯤은 여전히 그 욕심이 꿈틀대지만, 절반쯤은 역시 나랑은 잘 안 맞나?”라는 회의가 들기도 하는데, 머잖아 시리즈 첫 편인 빅 슬립을 통해 결단(?)을 내려 보려고 합니다. 오래 전 기억과 달리 어쩌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진짜 매력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기대와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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