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황무지
S. A. 코스비 지음, 윤미선 옮김 / 네버모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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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러가드 버그몽타주는 한때 범죄현장 도주차량 운전에 관한 한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드라이버입니다. 과거를 청산한 뒤로 버지니아의 레드힐 카운티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며 가족과의 안온한 삶을 유지해왔지만, 인근에 대형 정비소가 들어선 이후로 보러가드는 치명적인 위기에 빠집니다. 은행 대출이 막혀 정비소의 존폐조차 위태로워진데다 10대 시절에 낳은 딸의 대학등록금, 어머니의 요양 병원비 단돈 1달러가 절실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함께 일했던 미치광이로니로부터 다이아몬드 탈취라는 솔깃한 제안을 받은 보러가드는 고민 끝에 딱 한 번만 과거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사태는 급변하고 보러가드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위험한 지경에 빠지고 맙니다.

 

첫 장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주인공 보러가드가 모는 머슬카에 탑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옮긴이의 말대로 읽는 내내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급격하게 요동치는 탈선 직전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하이스트 누아르, 즉 범죄의 계획과 실행과정을 상세히 묘사한 전형적인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지만, ‘검은 황무지는 주인공 보러가드의 캐릭터와 그의 상처투성이 가족사 덕분에 혈관을 폭발시킬 것 같은 초긴장에 더해 묵직하고 애틋한 비극의 서사까지 맛볼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지막 딱 한 번!”이란 다짐으로 시작된 다이아몬드 탈취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보러가드는 말 그대로 지옥불에 빠지고 맙니다. 문제는 그 지옥불이 보러가드의 모든 것이기도 한 아내와 자식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친 점입니다. 결국 보러가드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피와 살이 난무하는 전쟁을 치르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의 한복판으로 내동댕이쳐집니다. 과거를 청산하고 평범한 삶을 꿈꾸던 보러가드는 자신에게 내재된 또 하나의 자아, 즉 최고의 도주차량 드라이버였던 시절의 버그가 결국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고 자책합니다.

 

제 자아가 두 개라고 생각해왔어요. 보러가드에게는 와이프와 아이들이 있어요. 사업을 운영하고 아이들 학예회에 빠지지 않죠. 버그는 은행을 털고 급회전구간에서도 시속 160km로 차를 몰아요. 사촌을 죽인 놈들을 차 분쇄기에 넣고 갈아버리죠. 아빠가 옳았어요. 한 사람이 두 개의 삶을 살 수는 없어요. 결국엔 한 놈의 고삐가 풀려 다 망쳐버리죠.” (p342)

 

굉음을 내며 거침없이 폭주하는 머슬카와 함께 보러가드의 삶을 지배해온 건 품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아버지의 망령입니다. 특히 도주차량 드라이버의 완벽한 재능과 잔혹한 폭력성의 유전자까지 고스란히 물려준 아버지는 보러가드에게는 평생 애증의 대상이었습니다. 가족들을 버리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동시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웅으로 여기며 그가 남긴 머슬카 더스터를 목숨만큼 아끼는 집착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자기 자신도 아버지처럼 가족을 위기에 몰아넣고 어디론가 사라져야만 하는 처지가 되자 차라리 범죄자에 술주정뱅이에 나쁜 남편이었던 아버지가 더 솔직하고 당당했다는 자책에 빠지게 됩니다. ‘검은 황무지가 단순히 돈을 목적으로 한 주인공의 범행을 그린 하이스트 누아르 이상의 품격을 갖추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보러가드의 가족사 덕분입니다.

 

다이아몬드 탈취사건이 일으킨 나비효과와도 같은 피비린내 진동하는 살육전은 반전을 거듭하며 팽팽한 긴장감과 잔혹한 폭력성 이상의 흥분을 선사합니다. 때론 보러가드에 지나치게 이입한 나머지 마치 직접 총과 주먹을 휘두르는 듯한 쾌감에 빠지기도 하고, 때론 그가 처한 비참한 처지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안쓰러움과 애틋함에 푹 젖어들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검은 황무지라는 제목에 걸맞게 누아르를 읽으면서 만끽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컷 즐기고도 남을 만큼 순도와 농도가 대단한 작품이란 뜻입니다.

 

검은 황무지S. A. 코스비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데뷔작인 ‘My Darkest Prayer’는 물론 세 번째 작품으로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는 ‘Razorblade Tears’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너무 궁금해졌는데, ‘검은 황무지가 좋은 성과를 내서 그의 작품들이 계속 한국에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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