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대마초 여인
안네로르 케르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사상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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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여성 파티앙스 포르트푀의 직함은 프랑스 법무부 소속 아랍어 통번역사지만, 실은 불규칙한 시간당 페이를 받을 뿐 사회보장도 연금도 못 받는 불법노동자입니다. 두 딸의 교육비와 어머니의 요양 병원비 때문에 25년 넘게 고된 삶을 살아온 파티앙스에게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워낙 어수룩한데다 순진함마저 엿보여 인간적인 호감까지 느꼈던 한 모로코 대마초 딜러의 통화 내역을 번역하던 파티앙스는 프랑스 경찰의 체포 계획을 눈치 채곤 엉겁결에 연락을 취해 당장 대마초를 버리고 신속히 피하라고 권합니다. 문제는 그 직후 복잡한 심경들이 파티앙스를 뒤흔들었다는 점입니다. 늘 돈에 쪼들려온 비루한 자신의 현실, 법을 지키지 않는 법무부의 이중성, 공공연한 마약 거래의 실상... 결국 파티앙스는 그 모든 지긋지긋한 현실을 증오하며 모로코 딜러가 버린 대마초를 빼돌리기로 결심합니다.

 

파리의 대마초 여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롤러코스터처럼 급상승과 급하강을 쉴 새 없이 반복하는 흥미진진한 작품입니다. 아랍권 범죄자의 통화 도청내역을 번역하던 일종의 감시자였던 평범한 여성이 감시대상이던 대마초 딜러를 도우려다가 오히려 대량의 대마초를 손에 넣은 뒤 중간도매상으로 맹활약한다는 설정 자체만 봐도 이야기의 굴곡이 얼마나 크고 급격할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돈은 모든 것이다’(1), ‘겁대가리 없는 유대인 여자에게 불가능이란 없다’(3)라는 소제목들은 주인공 파티앙스가 어떤 캐릭터의 여성인지 잘 대변하고 있는데, 실제 이야기 속의 파티앙스는 그 이상의 카리스마와 매력을 내뿜으며 거침없는 광폭행보를 내딛습니다.

 

하지만 대마초 중간도매상파티앙스의 석세스 스토리만 그려졌다면 아마 단순한 할리우드 액션 스릴러 이상의 미덕을 찾아보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에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끈 대목은 현실에 분노하고 환멸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된 그녀의 기구한 성장기와 가족사입니다.

어린 시절, 불법적인 사업으로 큰돈을 거머쥔 부모 덕분에 파티앙스는 평생 전 세계의 여름을 찾아다니며 불꽃놀이를 수집하겠다는 꿈을 품기도 했지만, 한순간 인생 경로가 나락으로 내팽개쳐진 뒤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해왔습니다. 하루 종일 중국인들의 고함소리가 날뛰는 낡은 아파트는 지긋지긋했고, 딸들과 어머니에게 들어가는 돈은 한도 끝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범죄를 막기 위해 자신의 아랍어 재능을 쥐어짜내면서도 결코 정규직으로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현실들에 치인 나머지 언젠가부터 자신이 감시하는 일부 아랍인 범죄자들에게 차별받는 약자라는 연대감과 함께 동정과 연민을 보내온 파티앙스로서는 엉겁결이긴 해도 어수룩한 모로코 대마초 딜러를 돕는 것이 그리 놀라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후 자신이 다론’(엄마를 뜻하는 은어)이라는 별명까지 얻어가며 대마초 도매상으로 맹활약할 거라곤 전혀 예측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대마초 딜러를 도망치게 돕고, 그의 대마초를 불법적으로 손에 넣은 뒤 큰돈을 거머쥐는 파티앙스의 행동은 올바름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이지만, 파티앙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녀가 혐오한 프랑스의 현실이 설득력 있게 설정된 덕분에 옮긴이의 말대로 일종의 후련함마저 느낄 수 있는 중년여성의 분투기 혹은 판타지로 읽힌 게 사실입니다.

파티앙스의 여정은 그저 돈으로 처바른 즐거움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또 경찰의 주요 목표물이 된 대마초 도매상 다론파티앙스의 행보 역시 결코 순탄하게만 전개되지 않습니다. 300페이지도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쉽사리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짜릿한 롤러코스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족으로... 올해(2021) 프랑스 미스터리-스릴러를 세 편 읽었는데, ‘프랑스 소설하면 떠오르는 어쩔 수 없는 편견을 저 역시 어느 정도 갖고 있었지만, ‘파리의 대마초 여인을 비롯하여 포커 플레이어 그녀’(브누아 필리퐁)마리에게 생긴 일’(이네스 바야르) 모두 독특한 매력과 여운을 만끽할 수 있어서 스스로 무척 놀란 게 사실입니다. 영미권과 북유럽 스릴러와는 사뭇 다른 프랑스 장르물만의 스타일과 힘을 새롭게 발견한 한 해라고 할까요? 내년에도 이런 즐거운 발견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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