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가 여자들
파스칼 디에트리슈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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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동부 그르노블을 무대로 마피아 집안의 세 모녀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대부 레오네의 아내이자 명예 마피아인 어머니 미셸, 아버지와 마피아에 대한 반감으로 인도주의 단체에서 일하는 장녀 디나, 현대적인 방식으로 가업을 이어가려는 차세대 보스 후보 차녀 알레시아. 어느 날, 알츠하이머를 앓던 남편 레오네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지지만 미셸은 그 사실보다도 남편이 사전에 써놓은 편지 때문에 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 편지엔 레오네가 자신을 배신한 아내 미셸을 죽이기 위해 킬러를 고용했으며, 조만간 그가 미셸의 숨통을 끊기 위해 방문할 거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셸은 두 딸과 함께 킬러의 정체를 밝히고 살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합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마피아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은 매체를 불문하고 예외 없이 남성 중심의 서사를 펼치기 마련입니다. 비장미 넘치는 영웅도, 차기 보스를 노리는 야심가도, 심지어 사업에서든 권력투쟁에서든 덜 떨어진 모습을 보이는 조연이나 그저 총알 세례 장면을 위해 동원된 단역들조차 모조리 남자들의 몫입니다. 여자들은 무기력하거나 순종적이거나 성적 대상이거나 잘 해야 알코올이나 마약에 중독된 채 무의미한 저항을 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목에서부터 도발적인 기운을 감추지 않은 마피아가 여자들은 기존의 마피아 물과는 정반대의 성 역할을 기대하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혼수상태에 빠진 마피아 대부의 아내와 두 딸인데, 그녀들은 마피아 세계에서 여자들이 스스로 선택하거나 억지로 강요당할 수 있는 몇몇 삶의 방식을 사실감 있게 대변하고 있습니다.

 

대부의 아내인 미셸은 마피아의 여자로서의 소극적인 역할을 수긍한 채 살아온 인물입니다. 낭만적이지만 갑자기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남편에게 평생 순종해왔고, 마피아가 제공한 부유한 삶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마피아 아내들이 뜻을 모으면 얼마든지 남편들을 구워삶을 수 있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깨달은 인물입니다.

장녀 디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마피아에 대한 반감에 사로잡혔고, 그로 인해 보란 듯이 인도주의 단체에서 활동하지만, 실은 마피아와 인도주의 단체가 이복형제란 사실을 깨닫곤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내를 죽이기 위해 킬러를 고용한 아버지를 혐오하지만, 똑같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려는 동생 알레시아 역시 불편하게만 여겨질 뿐입니다.

약국을 운영하며 몰래 마약을 판매하고 돈 세탁을 일삼는 차녀 알레시아는 차세대 그르노블 마피아 보스 자리를 넘보는 야심찬 여성입니다. 기존의 마피아 서사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캐릭터로, 마지막까지 멍청한 남자들 대신 새롭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마피아를 이끌고 갈 여자들의 역할을 모색하는 인물입니다.

 

띠지에 인쇄된 낡은 전통과 침묵의 규율을 깨부수는 짜릿하고 통쾌한 코믹-여성-누아르!”라는 카피는 절반쯤은 맞고 절반쯤은 과장됐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인데, 짜릿함과 통쾌함에 대해선 기대치를 너무 높게 가져선 안 되고, 코믹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판타지 같은 남성 중심의 마피아 서사와 달리 차분하면서도 사실감 넘치는 여성 마피아 스릴러라는 카피가 더 어울려 보입니다. 미셸을 살해하기 위해 고용된 청부살인업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대목이나 알레시아가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차세대 보스 자리를 노리는 과정은 딱히 놀라운 반전이나 흥분을 일으키는 화려한 액션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총격전 외엔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는 남성 마피아 서사에 비하면 훨씬 더 리얼하고 그럴듯하게 다가왔고, 이후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도 지니고 있습니다.

 

마피아가 여자들을 포함하여 파리의 대마초 여인’, ‘포커 플레이어 그녀등 최근 들어 프랑스 미스터리 스릴러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 쓸데없이 어렵게 이야기를 풀거나 과장되게 폼만 잡는다고 여겼던 프랑스 작품들에 대한 선입견을 시원하게 날려줄 만큼 매력적이어서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저와 그다지 코드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한 기욤 뮈소의 신작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을 곧 읽을 예정인데, 과연 기욤 뮈소마저도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전해줄지 사뭇 궁금해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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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소녀들
로레스 앤 화이트 지음, 김민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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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하게 살해된 소녀들의 시신이 공동묘지와 해안 협곡에서 연이어 발견됩니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성폭행과 시신 훼손 흔적은 너무나도 끔찍했고, 이 사건에 투입된 캐나다 빅토리아 시경 성범죄 수사반의 앤지 팔로리노는 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과거 자신이 맡았지만 결국 미제로 남고 만 성폭행 사건과 너무나도 닮은꼴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던 파트너를 사건현장에서 잃었던 앤지는 여전히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지만 어떻게든 이 가공할 살인자를 붙잡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새로 파트너가 된 제임스 매덕스 때문에 그녀의 머리는 복잡할 따름입니다. 전날 밤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절대 잊지 못할 첫 인사를 나눴던 탓입니다. 눈앞의 사건도 중요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촉각을 곤두세우며 과연 자신의 등을 맡길 수 있는 파트너인지 신중하게 관찰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눈길을 끈 작품입니다. 19금 판정을 받았고, 낯선 작가인데다 배경은 캐나다 서부 빅토리아이며 무려 776페이지의 벽돌책이기 때문입니다. 두께의 부담감 때문에 읽을까 말까 고민되기도 했지만, 첫 장을 펼쳐보니 조금만 빡빡하게 편집됐더라면 100페이지 정도는 줄어들고도 남을 만큼 꽤 여유있는 여백이 눈에 띄어서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었습니다.

분량에 비해 큰 얼개는 단순합니다. 극단적인 성격을 지닌 남녀 파트너 형사가 우여곡절 끝에 희대의 연쇄 강간살인마를 추격하는 이야기가 메인이고, 앤지의 개인적인 비극 유전으로 물려받은 환각과 환청과 섬망, 그리고 어린 시절에 당한 교통사고의 기억 과 함께 파트너 매덕스와의 복잡미묘한 감정 주고받기가 그 아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작품 속 연쇄살인마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악마입니다. 그는 나쁜 아이들을 구원한다.”는 집착에 사로잡혀 피해자들을 폭력적으로 성폭행한 뒤 세례와 정화를 위해 물에 빠뜨려 익사시키곤 오로지 성적 쾌감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신체 기관을 칼로 훼손하고 이마에 십자가 표식을 새겨놓습니다. 이상성욕에 사로잡힌 사탄이라고 할까요?

앤지가 이 범인에게 더욱 집착하는 이유는 과거에 같은 방식으로 소녀들을 성폭행했던 범인과 동일범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엔 살인이나 신체훼손까지 이르진 않았지만 범행방식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범인을 체포하지 못한 탓에 사악한 연쇄살인마로 진화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은 앤지로 하여금 더욱 폭주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하지만 잔혹한 범행 자체보다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여주인공 앤지의 캐릭터입니다. 10여 년의 커리어 중 6년을 성범죄 수사반에서 보낸 앤지는 주위에서 남성혐오자”, “미친년소리를 밥 먹듯 듣는 인물입니다. 수시로 분노조절장애 수준의 감정을 표출하면서 자기 주위에 철벽을 쳐놓은 탓에 그녀에겐 아군이 거의 없습니다. 유일한 아군이었던 파트너를 얼마 전 사건현장에서 잃은 뒤 더욱 더 심연 속으로 가라앉은 그녀가 선택한 극단적인 치유법은 익명의 섹스입니다. 변두리 클럽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를 사냥한 뒤 모텔로 데려가 거친 방법으로 원나잇 스탠드를 즐기는 것입니다. 성범죄 수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몸에 밴 남성들에 대한 반감을 자신이 주도하는 거칠고 폭력적인 섹스를 통해 보상받으려는 것입니다. 낮에는 강력반 승진을 꿈꾸며 악랄한 성범죄자들을 쫓는 유능한 여형사지만, 밤만 되면 그런 식으로밖에 스스로를 달래지 못하는 앤지의 모습은 오히려 안쓰러움과 애틋함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앤지에게 전혀 낯선 감정을 자아내는 게 새로 파트너가 된 제임스 매덕스입니다. 경력으로 보나 실적으로 보나 관리직급에 어울리는 그는 오로지 딸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 변방이나 다름없는 빅토리아 시경으로의 전출을 요구했고, 낙하산이라는 비아냥을 감수하고 오로지 연쇄살인마 체포에 전력을 다합니다.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앤지와 처음 만났던 매덕스는 누구도 가까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에게서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앤지의 고통스러운 비밀과 과거사를 공유한 뒤로는 어떻게든 그녀를 돕고자 애를 씁니다.

 

분량에 비해 사건 자체가 단순하기도 하지만, 그 해법 역시 딱히 뛰어난 추리나 충격적인 반전을 보여주진 않습니다. 집요한 탐문이 대부분이고 결정적 단서도 딱히 어렵지 않게 주인공들 앞에 나타납니다. 또 사건의 외양을 키우기 위해 꽤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켰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변죽만 울리다 만 느낌이 강했는데, 특히 악의 배후처럼 활약할 것 같았던 몇몇 인물은 그저 병풍노릇만 하다가 별 역할도 없이 퇴장해버리곤 해서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아마 두 주인공 앤지와 매덕스의 매력이 아니었다면 7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다소 단순하고 뻔한 미스터리를 절반도 채 견뎌내진 못했을 것입니다.

 

이력만 보면 로레스 앤 화이트는 로맨틱 서스펜스 혹은 로맨틱 스릴러에 특화된 작가로 보입니다. 앤지와 매덕스의 복잡한 감정을 다룬 장면들이 매력적으로 읽힌 건 아마도 작가의 이런 전문성 때문으로 보이는데, 분량에 어울리는 미스터리가 동반됐더라면 별 5개도 모자란 작품이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마지막에 앤지와 매덕스가 후속작에서 맞닥뜨릴 사건의 예고편이 제시됐는데, 한국에 소개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두 사람의 캐릭터 때문에라도 일단 찾아 읽을 것 같긴 합니다. 다만 이번 작품처럼 미스터리가 허술하고 단순하다면 그 뒤는 기약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말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가가 ‘J’로 시작하는 이름을 무척 좋아하는 듯한데, 엇비슷한 이름들 때문에 읽는 내내 꽤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잭 킬리언, 잭 버지악, 잭 오(반려견), 재크스, 재크 래디슨, 제이든 등이 그들인데 왜 굳이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지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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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뿌리는 자 스토리콜렉터 8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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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력발전단지 건설을 놓고 개발회사 윈드프로와 시민단체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회사 경비원과 시민단체의 대표가 연이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고로 보였던 경비원의 죽음은 과학수사 결과 살인의 가능성이 제기됐고, 거액의 보상 제안을 뿌리치고 풍력발전단지 건설에 반대해온 시민단체 대표는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됐습니다. 호프하임 강력 11팀의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개발회사 관계자들에게서 수상쩍은 느낌을 받지만 동시에 시민단체의 내분에도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특히 개발회사 전직 직원이면서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을 펼쳐온 재니스는 여러 면에서 유력한 용의자 후보로 보입니다. 하지만 살해된 시민단체 대표의 자식들 역시 범행동기가 충분해서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좀처럼 수사 초반에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바람을 뿌리는 자는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 11팀의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주인공으로 한 타우누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앞선 네 작품이 (한국 번역본 기준으로) 300페이지 중반에서 많아야 500페이지 초반 정도였던 것에 반해 바람을 뿌리는 자는 거의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인데, 그만큼 등장인물도 많고 사건도 다양해서 간략하게 줄거리를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우선 두 사건은 어떻게 봐도 동일범의 소행 혹은 연장선상의 살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두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덕분에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은 많지만 어디에서도 확실한 실마리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한 메인 사건과 연관이 있는 듯 없는 듯 보이는 인물들이 꽤 중요한 화자로 등장하는 바람에 과연 이들이 풍력발전단지 건설을 둘러싼 살인사건과 어떤 식으로 연결될지, 연결되긴 되는 것인지 무척 궁금해지게 됩니다.

 

가장 흥미로운 건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진두지휘해야 할 반장임에도 불구하고 사건 외적인 것들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보덴슈타인의 행보입니다. 아버지 하인리히 백작이 풍력발전단지 개발의 갈등 한복판에 휘말리면서 보덴슈타인은 잠시나마 보상금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은 물론 그 사실 자체를 감추는 바람에 큰 곤경에 처합니다. 더구나 아내 코지마에게 배신당한 상처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그는 사건관련자 중 한 명인 여성에게 푹 빠져버리는데, 문제는 그녀 역시 결코 가볍지 않은 미스터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피아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신에게 수사를 떠맡긴 채 밖으로만 도는 보덴슈타인에게 격분하지만 4년을 함께 지낸 파트너답게 인내심을 갖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사실, 막판에 드러난 진실만 놓고 보면 사건의 얼개는 무척 단순합니다. 모든 것이 부와 명예와 허영을 향한 일그러진 탐욕에서 비롯됐고, 진범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은 충격이라기보다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범인이었다.”라고 보일 정도로 정석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8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 가능했던 건 비밀과 거짓말, 사랑과 증오, 믿음과 배신 등 등장인물들 사이의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디테일하게 묘사된 점, 그리고 보덴슈타인의 개인적인 고민과 일탈을 그린 대목들이 적잖은 분량을 차지한 점에 기인합니다. 하지만 앞선 타우누스 시리즈가 그랬듯 바람을 뿌리는 자역시 대단한 페이지터너여서 시작부터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인물관계도라도 그려야 하나?”라는 고민이 들 정도로 인물과 사건이 복잡하게 설정된 것은 여전하지만 말입니다.

 

첫 페이지를 펼치기 전, 이 작품을 처음 읽었던 10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을 땐 다소 허전하거나 단순했다.”라는 인상이었는데, 그건 아마도 이 시리즈의 대표작인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읽고 난 직후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바람을 뿌리는 자는 전혀 허전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숙성된 시리즈의 깊은 맛과 함께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캐릭터가 더욱 매력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물론 조금은 사족 혹은 과잉처럼 보인 대목들이 있었고, 그 때문에 사건의 규모나 질감에 비해 분량 자체가 다소 부풀려진 점은 아쉬웠습니다. 막판 반전 역시 앞서 언급한대로 기대에 못 미쳤던 게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재미있는 책읽기를 만끽할 만큼 미덕이 더 컸다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완벽한 젠틀맨 같던 보덴슈타인의 연약하고 인간적인 모습과 그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우며 쑥쑥 성장하는 피아의 카리스마는 순서대로 다시 읽기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재미라서 여타 아쉬움들을 다 덮게 해준 1등 공신이었습니다. 이야기나 사건보다 주인공의 매력에 푹 빠져 시리즈를 탐독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타우누스 시리즈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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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드로 미샤니 지음, 이미선 옮김 / 북레시피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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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대로 세 명의 여자가 각각 한 챕터씩 주인공을 맡아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이혼 후 홀로 아들을 키우며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오르나는 특별한 기대감 없이 이혼자들을 위한 만남 주선 사이트에서 한 남자를 만납니다. 라트비아에서 온 46살의 외국인 노동자 에밀리아는 자신이 간병하던 노인이 사망한 뒤 그의 아들로부터 아파트 청소를 부탁받았다가 좀 더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30대의 늦깎이 대학원생 엘라는 어느 날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 때문에 낯선 흥분에 사로잡히지만 유부녀라는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남자의 집요함은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게 만들었고 어느 새 그와의 특별한 여행을 기대하기에 이릅니다. 아무런 공통점도 없지만 세 여자는 중년의 변호사 길 함트자니라는 미스터리한 접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난생 처음 접한 이스라엘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역시 거의 처음 접하다시피 한 독특한 플롯입니다. “범행이 이루어질 것인지 말 것인지 불분명한 범죄 소설, 형사가 등장한 것인지 아닌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추리 소설이라는 저자 서문처럼 세 여자는 일반적인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공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첫 번째 여자 오르나의 챕터가 이혼 후 복잡한 심경과 현실적 난관에 부딪힌 싱글맘의 삶을 그린 여성소설 같았다면, 두 번째 여자 에밀리아의 챕터는 외국인 노동자의 곤경 혹은 신과 종교와 구원을 다룬 듯한 고발소설 같았고, 세 번째 여자 엘라의 챕터는 두려우면서도 묘한 흥분을 일으키는 불륜을 앞두고 달뜬 고민에 빠진 중년여성의 체험담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서문대로 독자는 초반 내내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설마, 하는 심정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첫 챕터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작가가 던진 첫 번째 폭탄을 마주하게 됩니다. 물론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엄청난 반전은 아니지만 오히려 충격의 무게는 훨씬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왜?”라는 어이없음 혹은 분노와 함께 말입니다. 나머지 챕터들 역시 비슷한 구성이라 결말이 뻔히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예정된 비극을 막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안감은 한없이 증폭됩니다. 물론 막판에 이르러 갑자기 속도를 끌어올리며 사건 해결을 향해 달려가는 대목에서는 (다소 상투적이긴 해도) 또 다른 스타일의 반전과 짜릿한 쾌감을 맛볼 수 있어서 앞서 누적된 불안감이 어느 정도 해소되긴 합니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끔찍한 연쇄살인 이야기정도가 될 것입니다. 잔혹한 묘사도 없고 선정적인 장면도 없지만 지금껏 책으로 접한 그 어떤 살인사건보다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이유는 바로 이런 말도 안 되는서사 때문입니다. 아마도 노골적이고 잔인한 문장들로 독자를 유혹하려 했다면 이 작품은 그저 그런 범작 수준에 머물렀겠지만, 부드러움, 차분함, 조곤조곤함이 깃든 연쇄살인 이야기라는 묘한 포장 덕분에 색다름 이상의 특별한 매력을 품게 됐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최고 범죄소설 작가라는 타이틀이 과장된 홍보가 아니라면 조만간 드로 미샤니의 또 다른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여자처럼 기존의 미스터리와 스릴러 문법에 반기를 든 작품이든 반대로 그에 충실한 작품이든 일단 한두 편쯤은 꼭 더 만나보고 싶은 작가인데, 언제든 신간 소식이 들린다면 기꺼이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사족으로... ‘세 여자에 등장하는 화폐단위는 모두 한국의 입니다. 예전에 일본 미스터리 익명의 전화’(야쿠마루 가쿠)에서도 똑같은 오류를 본 적 있는데, 그나마 이 작품에선 일러두기를 통해 화폐단위를 ‘1=10이라고 전제라도 했지만, ‘세 여자는 그런 설명도 없이 이스라엘 소설 속 화폐를 한국의 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제가 유독 삐딱하게 보는 건지, 이런 번역 자체가 문제인 건지는 독자 여러분께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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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버린 날 버티고 시리즈
하비에르 카스티요 지음, 김유경 옮김 / 오픈하우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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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 한낮, 보스턴 시내에 젊은 여자의 잘린 머리를 든 벌거벗은 남자가 나타납니다. 체포된 이후 경찰은 물론 정신의학센터 원장 젠킨스에게도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던 그는 조사관으로 투입된 FBI 프로파일러 스텔라 하이든이 나타나자 오직 그녀와만 이야기하겠다며 입을 엽니다. 그런데 같은 시간, 또 한 개의 젊은 여자의 잘린 머리가 발견되면서 젠킨스 원장과 스텔라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두 사람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미소만 지으며 스텔라와의 1:1 면담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는 스텔라에게 자신의 이름이 제이컵이며, 이 사건은 17년 전 솔트레이크에서 벌어진 기괴한 사건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제목이나 간략한 줄거리만 봐도 평범한 미스터리나 스릴러가 아니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 개의 시간적 배경 17년 전인 1996년의 솔트레이크, 2013년 크리스마스이브 직전과 직후 속에 여러 명의 화자가 등장하는데다 사건 역시 꽤 복잡하게 꼬여 있고, 사방팔방에 스포일러 지뢰가 묻혀있어서 큰 얼개를 소개하는 것조차 난감한 일입니다.

 

17년 전 솔트레이크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가족휴가를 왔다가 자기 이름과 기괴한 별이 그려진 쪽지를 발견한 뒤 치명적인 위기에 빠진 소녀, 그 소녀와 서로 한눈에 반했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고 만 소년, 딸에게 닥친 비극 때문에 자책을 거듭하다가 붕괴하고만 소녀의 가족, 그리고 출산 이틀 만에 흔적도 없이 아내가 사라지자 패닉에 빠졌던 한 남자.

이들은 17년이 지난 2013, 다시금 과거의 악몽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됩니다. 그중에는 그 긴 시간을 오로지 가느다란 희망 하나만으로 버티며 폐인이 되다시피 한 사람도 있고, 가까스로 그 악몽에서 벗어난 듯 했지만 더더욱 큰 참극에 휘말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든 건 바로 보스턴 시내에 젊은 여자의 잘린 머리를 들고 나타난 의문의 남자 제이컵입니다.

 

사건 자체도 기괴한데다 체포된 남자 제이컵은 시종 정상인과는 거리가 먼 기이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 이야기의 흐름이 단순한 범인 찾기가 아니라는 것은 금세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뭔가 형이상학적이거나 정신적 문제, 혹은 호러나 오컬트의 냄새가 폴폴 풍기긴 하지만 어쨌든 초반에는 끔찍한 살인사건의 미스터리를 푸는 쪽으로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그러다가 중반부쯤 이 작품을 특징짓는 화두인 운명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면서 비로소 장르적 특징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운명이란 건 팩트 중심의 살인미스터리와는 거리가 한참 멀고, 공포와 불안감을 앞세운 심리스릴러와는 그나마 좀 겹치는 부분이 있긴 해도 역시 잘 어울리는 화두는 아닙니다. 물론 이 작품 곳곳에 살인미스터리와 심리스릴러가 뒤섞여있긴 하지만 운명이 주된 화두인 탓에 아무래도 서스펜스, 그것도 특정 영역의 서스펜스로 읽히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꽤 갈릴 거란 생각입니다.

 

제 경우엔, 사건 자체도 흥미롭고 캐릭터도 매력적이지만, 중반부쯤 진실의 일부 누가, 왜 젊은 여자의 머리를 잘랐는가? - 가 공개될 무렵 한 인물이 내뱉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대사가 100% 공감이 될 정도로 개인적으론 그 지점부터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뭐랄까, 어느 정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작품의 장르가 확연해지자 마음의 벽 같은 게 생겼다고 할까요? 그런 탓에 그 이후 작가가 조금씩 풀어놓는 진실의 조각들이나 등장인물들의 언행들이 낯설거나 억지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고, 그 불편함은 다 읽은 뒤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서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적잖이 열광할 여지가 충분한 것 역시 사실이기도 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이 작품이 꽤 큰 성공을 거뒀고 후속작도 나왔다고 하는데, 막판 에필로그에서 작가가 던진 떡밥이 후속작을 위한 설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와는 궁합이 잘 안 맞는 작가라서 찾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심리스릴러나 서스펜스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신선하고 특별한 재미를 줄 수도 있는 작품이니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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