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자
드로 미샤니 지음, 이미선 옮김 / 북레시피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대로 세 명의 여자가 각각 한 챕터씩 주인공을 맡아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이혼 후 홀로 아들을 키우며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오르나는 특별한 기대감 없이 이혼자들을 위한 만남 주선 사이트에서 한 남자를 만납니다. 라트비아에서 온 46살의 외국인 노동자 에밀리아는 자신이 간병하던 노인이 사망한 뒤 그의 아들로부터 아파트 청소를 부탁받았다가 좀 더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30대의 늦깎이 대학원생 엘라는 어느 날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 때문에 낯선 흥분에 사로잡히지만 유부녀라는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남자의 집요함은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게 만들었고 어느 새 그와의 특별한 여행을 기대하기에 이릅니다. 아무런 공통점도 없지만 세 여자는 중년의 변호사 길 함트자니라는 미스터리한 접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난생 처음 접한 이스라엘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역시 거의 처음 접하다시피 한 독특한 플롯입니다. “범행이 이루어질 것인지 말 것인지 불분명한 범죄 소설, 형사가 등장한 것인지 아닌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추리 소설이라는 저자 서문처럼 세 여자는 일반적인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공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첫 번째 여자 오르나의 챕터가 이혼 후 복잡한 심경과 현실적 난관에 부딪힌 싱글맘의 삶을 그린 여성소설 같았다면, 두 번째 여자 에밀리아의 챕터는 외국인 노동자의 곤경 혹은 신과 종교와 구원을 다룬 듯한 고발소설 같았고, 세 번째 여자 엘라의 챕터는 두려우면서도 묘한 흥분을 일으키는 불륜을 앞두고 달뜬 고민에 빠진 중년여성의 체험담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서문대로 독자는 초반 내내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설마, 하는 심정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첫 챕터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작가가 던진 첫 번째 폭탄을 마주하게 됩니다. 물론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엄청난 반전은 아니지만 오히려 충격의 무게는 훨씬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왜?”라는 어이없음 혹은 분노와 함께 말입니다. 나머지 챕터들 역시 비슷한 구성이라 결말이 뻔히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예정된 비극을 막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안감은 한없이 증폭됩니다. 물론 막판에 이르러 갑자기 속도를 끌어올리며 사건 해결을 향해 달려가는 대목에서는 (다소 상투적이긴 해도) 또 다른 스타일의 반전과 짜릿한 쾌감을 맛볼 수 있어서 앞서 누적된 불안감이 어느 정도 해소되긴 합니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끔찍한 연쇄살인 이야기정도가 될 것입니다. 잔혹한 묘사도 없고 선정적인 장면도 없지만 지금껏 책으로 접한 그 어떤 살인사건보다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이유는 바로 이런 말도 안 되는서사 때문입니다. 아마도 노골적이고 잔인한 문장들로 독자를 유혹하려 했다면 이 작품은 그저 그런 범작 수준에 머물렀겠지만, 부드러움, 차분함, 조곤조곤함이 깃든 연쇄살인 이야기라는 묘한 포장 덕분에 색다름 이상의 특별한 매력을 품게 됐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최고 범죄소설 작가라는 타이틀이 과장된 홍보가 아니라면 조만간 드로 미샤니의 또 다른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여자처럼 기존의 미스터리와 스릴러 문법에 반기를 든 작품이든 반대로 그에 충실한 작품이든 일단 한두 편쯤은 꼭 더 만나보고 싶은 작가인데, 언제든 신간 소식이 들린다면 기꺼이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사족으로... ‘세 여자에 등장하는 화폐단위는 모두 한국의 입니다. 예전에 일본 미스터리 익명의 전화’(야쿠마루 가쿠)에서도 똑같은 오류를 본 적 있는데, 그나마 이 작품에선 일러두기를 통해 화폐단위를 ‘1=10이라고 전제라도 했지만, ‘세 여자는 그런 설명도 없이 이스라엘 소설 속 화폐를 한국의 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제가 유독 삐딱하게 보는 건지, 이런 번역 자체가 문제인 건지는 독자 여러분께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