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빠진 소녀들
로레스 앤 화이트 지음, 김민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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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하게 살해된 소녀들의 시신이 공동묘지와 해안 협곡에서 연이어 발견됩니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성폭행과 시신 훼손 흔적은 너무나도 끔찍했고, 이 사건에 투입된 캐나다 빅토리아 시경 성범죄 수사반의 앤지 팔로리노는 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과거 자신이 맡았지만 결국 미제로 남고 만 성폭행 사건과 너무나도 닮은꼴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던 파트너를 사건현장에서 잃었던 앤지는 여전히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지만 어떻게든 이 가공할 살인자를 붙잡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새로 파트너가 된 제임스 매덕스 때문에 그녀의 머리는 복잡할 따름입니다. 전날 밤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절대 잊지 못할 첫 인사를 나눴던 탓입니다. 눈앞의 사건도 중요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촉각을 곤두세우며 과연 자신의 등을 맡길 수 있는 파트너인지 신중하게 관찰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눈길을 끈 작품입니다. 19금 판정을 받았고, 낯선 작가인데다 배경은 캐나다 서부 빅토리아이며 무려 776페이지의 벽돌책이기 때문입니다. 두께의 부담감 때문에 읽을까 말까 고민되기도 했지만, 첫 장을 펼쳐보니 조금만 빡빡하게 편집됐더라면 100페이지 정도는 줄어들고도 남을 만큼 꽤 여유있는 여백이 눈에 띄어서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었습니다.

분량에 비해 큰 얼개는 단순합니다. 극단적인 성격을 지닌 남녀 파트너 형사가 우여곡절 끝에 희대의 연쇄 강간살인마를 추격하는 이야기가 메인이고, 앤지의 개인적인 비극 유전으로 물려받은 환각과 환청과 섬망, 그리고 어린 시절에 당한 교통사고의 기억 과 함께 파트너 매덕스와의 복잡미묘한 감정 주고받기가 그 아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작품 속 연쇄살인마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악마입니다. 그는 나쁜 아이들을 구원한다.”는 집착에 사로잡혀 피해자들을 폭력적으로 성폭행한 뒤 세례와 정화를 위해 물에 빠뜨려 익사시키곤 오로지 성적 쾌감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신체 기관을 칼로 훼손하고 이마에 십자가 표식을 새겨놓습니다. 이상성욕에 사로잡힌 사탄이라고 할까요?

앤지가 이 범인에게 더욱 집착하는 이유는 과거에 같은 방식으로 소녀들을 성폭행했던 범인과 동일범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엔 살인이나 신체훼손까지 이르진 않았지만 범행방식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범인을 체포하지 못한 탓에 사악한 연쇄살인마로 진화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은 앤지로 하여금 더욱 폭주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하지만 잔혹한 범행 자체보다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여주인공 앤지의 캐릭터입니다. 10여 년의 커리어 중 6년을 성범죄 수사반에서 보낸 앤지는 주위에서 남성혐오자”, “미친년소리를 밥 먹듯 듣는 인물입니다. 수시로 분노조절장애 수준의 감정을 표출하면서 자기 주위에 철벽을 쳐놓은 탓에 그녀에겐 아군이 거의 없습니다. 유일한 아군이었던 파트너를 얼마 전 사건현장에서 잃은 뒤 더욱 더 심연 속으로 가라앉은 그녀가 선택한 극단적인 치유법은 익명의 섹스입니다. 변두리 클럽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를 사냥한 뒤 모텔로 데려가 거친 방법으로 원나잇 스탠드를 즐기는 것입니다. 성범죄 수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몸에 밴 남성들에 대한 반감을 자신이 주도하는 거칠고 폭력적인 섹스를 통해 보상받으려는 것입니다. 낮에는 강력반 승진을 꿈꾸며 악랄한 성범죄자들을 쫓는 유능한 여형사지만, 밤만 되면 그런 식으로밖에 스스로를 달래지 못하는 앤지의 모습은 오히려 안쓰러움과 애틋함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앤지에게 전혀 낯선 감정을 자아내는 게 새로 파트너가 된 제임스 매덕스입니다. 경력으로 보나 실적으로 보나 관리직급에 어울리는 그는 오로지 딸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 변방이나 다름없는 빅토리아 시경으로의 전출을 요구했고, 낙하산이라는 비아냥을 감수하고 오로지 연쇄살인마 체포에 전력을 다합니다.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앤지와 처음 만났던 매덕스는 누구도 가까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에게서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앤지의 고통스러운 비밀과 과거사를 공유한 뒤로는 어떻게든 그녀를 돕고자 애를 씁니다.

 

분량에 비해 사건 자체가 단순하기도 하지만, 그 해법 역시 딱히 뛰어난 추리나 충격적인 반전을 보여주진 않습니다. 집요한 탐문이 대부분이고 결정적 단서도 딱히 어렵지 않게 주인공들 앞에 나타납니다. 또 사건의 외양을 키우기 위해 꽤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켰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변죽만 울리다 만 느낌이 강했는데, 특히 악의 배후처럼 활약할 것 같았던 몇몇 인물은 그저 병풍노릇만 하다가 별 역할도 없이 퇴장해버리곤 해서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아마 두 주인공 앤지와 매덕스의 매력이 아니었다면 7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다소 단순하고 뻔한 미스터리를 절반도 채 견뎌내진 못했을 것입니다.

 

이력만 보면 로레스 앤 화이트는 로맨틱 서스펜스 혹은 로맨틱 스릴러에 특화된 작가로 보입니다. 앤지와 매덕스의 복잡한 감정을 다룬 장면들이 매력적으로 읽힌 건 아마도 작가의 이런 전문성 때문으로 보이는데, 분량에 어울리는 미스터리가 동반됐더라면 별 5개도 모자란 작품이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마지막에 앤지와 매덕스가 후속작에서 맞닥뜨릴 사건의 예고편이 제시됐는데, 한국에 소개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두 사람의 캐릭터 때문에라도 일단 찾아 읽을 것 같긴 합니다. 다만 이번 작품처럼 미스터리가 허술하고 단순하다면 그 뒤는 기약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말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가가 ‘J’로 시작하는 이름을 무척 좋아하는 듯한데, 엇비슷한 이름들 때문에 읽는 내내 꽤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잭 킬리언, 잭 버지악, 잭 오(반려견), 재크스, 재크 래디슨, 제이든 등이 그들인데 왜 굳이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지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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