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하게 헌신적인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9
제프 린제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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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에 이은 덱스터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꽤 오래 전 미드 덱스터를 흥미롭게 본 덕분에 뒤늦게 원작소설을 찾아 읽게 된 건데, 기대와 달리 시리즈 첫 편은 여러 가지 아쉬움만 남겼습니다. 그래서 딱 한 편만 더 읽어본 뒤 시리즈 나머지를 읽을지 결정하기로 하고 두 번째 작품인 끔찍하게 헌신적인 덱스터를 집어 들었습니다.

 

경찰에 소속된 혈흔분석가지만 동시에 용서받지 못할 살인범만 골라 살해하는 특이한 연쇄살인범인 덱스터는 이 작품의 초반까지 모두 마흔 명을 세상에서 제거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형사이자 피 한 방울 안 섞인 여동생 데보라로 인해 덱스터는 엽기적인 토막상해사건에 끼어들게 됩니다. 범인은 피해자의 사지와 혀와 눈꺼풀을 잘라냈으면서도 정작 목숨은 살려둡니다. 단서 하나 잡지 못한 채 수사의 향방조차 못 정한 상태에서 워싱턴에서 날아온 연방요원 카일은 경찰의 수사를 중지시킵니다. 그리고 데보라를 연락책 수준의 파트너로 지목합니다. 애초 수사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동업자처럼 보이는 범인에게 호기심을 보이던 덱스터는 데보라와 카일이 위기에 빠지자 본의 아니게 수사의 한복판에 서게 됩니다.

 

이번 작품에서 덱스터가 상대하는 범인은 일반적인 연쇄살인마가 아닙니다. 20여 년 전 정부기관이 중남미에서 자행한 비밀 살상임무가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고, 범인은 무차별 혹은 쾌락살인마가 아니라 명백한 복수의 의지로 움직입니다. 한마디로 덱스터로서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상대라는 뜻입니다. 소아성애 연쇄살인마와 그 공범을 쫓던 덱스터가 이 사건에 말려든 건 순전히 여동생 데보라 때문입니다. 열혈형사인 그녀는 연방요원 카일과 함께 짝을 이뤄 범인 찾기에 나서는데, 연쇄살인사건에 특별한 촉을 갖고 있는 오빠 덱스터를 집요하게 밀어붙여 수사에 끌어들인 것입니다.

 

사건 못잖게 덱스터를 신경 쓰이게 하는 건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는 독스 경사입니다. 그 때문에 피의 향연을 즐기지 못하게 된 덱스터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던 중 독스 경사가 엽기적인 토막상해사건에 연루돼있으며 어쩌면 그 역시 범인의 목표물일지도 모른다는 추리에 이른 덱스터는 엉뚱한 기대감 자신을 의심하는 독스 경사를 이번 사건의 범인이 제거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 을 갖게 됩니다. 상식 밖의 발상이지만 덱스터라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또 한 가지 덱스터의 엉뚱한 면모는 범인에 대한 태도입니다. 전작에서도 피 한 방울 남기지 않은 채 완벽하게 토막살인을 저지른 범인에게 존경심을 품었던 덱스터는 이번에도 뛰어난 동업자에 대한 호기심에 사로잡힙니다. 흉악범을 체포해야 된다는 사명감 따윈 없고 어떻게든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욕망이 덱스터를 수사에 몰입하게 만드는 더 큰 원동력입니다.

 

전작에서 인연을 맺은 이혼녀 리타와 그녀의 남매(코디, 애스터)와의 관계 역시 흥미로운데, 애초 사랑 같은 감정은 품을 줄도 모르고 섹스조차 관심 없는 덱스터가 본의 아니게 리타와 끈끈하게 연결되는 대목이라든가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소심하고 내향적으로 성장한 6살 소년 코디에게서 이상한 동질감(“얘 혹시 나랑 같은 과아니야?”)을 느낀 덱스터가 충격과 기대를 동시에 품게 되는 장면들이 그것입니다. 아무런 감정도 못 느끼며 오로지 연쇄살인범을 처단하는 피의 향연에서만 행복을 느끼는 덱스터가 과연 가족이란 걸 이루게 될지, 또 양아버지에게 배운 킬러로서의 자질과 소양을 코디에게 물려주게 될지 무척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떡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덱스터 시리즈는 모두 다섯 편이 출간됐습니다. 첫 편보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나머지 작품들을 꼭 읽고 싶다는 생각에까진 이르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덱스터의 캐릭터는 그 어떤 연쇄살인 스릴러의 주인공보다 매력적이지만 2% 남짓한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한 스토리가 발목을 잡았다고 할까요? 몇 년쯤 지나 문득 덱스터가 생각나서 후속편인 어둠 속의 덱스터를 중고서점에서 구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여기에서 잠시 쉬는 게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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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들
제스 루리 지음, 안현주 옮김 / 네버모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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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미네소타 주의 릴리데일에서 한 소년이 납치되었다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이 강간을 당했다고 수군거린다. 그리고 얼마 뒤, 또 다른 소년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마을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12살 소녀 캐시는 납치당한 후 돌아온 소년들이 자신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은 버스를 타고 통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이나 뒤표지의 카피만 보면 연쇄소년납치범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라고 예단하기 쉽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12살 소녀 캐시가 1인칭 화자를 맡은 지독한 성장소설이자 심리 서스펜스에 더 가깝습니다. 분명 소년들이 납치당하고 잔혹한 짓을 당하는 사건이 등장하긴 하지만 사건 자체보다는 캐시의 눈에 비친 일그러진 세상의 단면들과 그것들이 내뿜는 악취나 공포가 이야기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을의 소년들을 노리는 외부의 괴물과 자신을 노리는 집 안의 괴물과 맞서야 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훌륭한 성장소설이자 범죄소설.”이라는 출판사 소개글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보면 됩니다.

 

범죄에 휘말린 희생자 대부분이 문제적 가정이 몰려있는 지역의 거친 소년들이다 보니 그 외 지역의 사람들은 물론 경찰마저 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오로지 캐시만이 릴리데일에 사는 괴물들 하나하나를 주목하며 범인을 찾아내려 애쓸 뿐입니다. 경찰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 역시 캐시 눈에는 믿을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아버지 도니와 공모하여 불온한 짓을 일삼는 괴물로 보일 뿐입니다. 사냥개를 풀어놓은 이웃의 고블린 역시 소년납치범이 되고도 남을 무시무시한 괴물이라 캐시의 주목을 받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캐시가 상대해야 할 괴물은 집안에도 존재합니다. 조각가라고 자칭하지만 작품도 돈도 내놓지 못하는데다 스와핑을 연상시키는 역겨운 행위들이 거리낌 없이 벌어지는 파티를 수시로 열기도 하며, 가족들을 소유물로 여기는 것은 물론 친딸인 캐시와 언니 세피에게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아버지 도니가 바로 그 괴물입니다. 말하자면 캐시에게 안전한 곳은 아무데도 없는 셈입니다.

 

미국이 성범죄자 등록법을 시행하게 된 사건을 바탕으로 쓴 화제작!”이라는 카피와 연쇄소년납치범을 강조한 출판사 소개글 때문에 범죄 스릴러라는 기대를 잔뜩 품은 탓인지 12살 소녀 캐시가 끌고 가는 심리 서스펜스에 가까운 서사는 다소 낯설고 당혹스러웠던 게 사실입니다. 막판에 캐시의 집요함 덕분에 범인이 밝혀지고 정의가 구현되긴 하지만 그 역시 통쾌함이나 징악의 쾌감보다는 소도시 릴리데일과 캐시의 집을 지배하고 있던 더럽고 역겨운 기운을 몰아냈다는 안도감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에필로그를 읽은 뒤에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건 괴물에 둘러싸인 채 홀로 외롭게 성장해야 했던 캐시의 캐릭터였습니다.

 

사족으로, 가장 아쉬웠던 점 하나는 번역입니다. 마지막 수정을 거치지 않은 듯한 애매모호한 문장들이 여러 곳에서 보였는데, 같은 번역가의 작품 낫씽맨’(캐서린 라이언 하워드)에서 번역의 문제를 전혀 못 느낀 걸 보면 원작 자체 때문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번쯤 더 문장을 다듬었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여러 차례 든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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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러티
콜린 후버 지음, 민지현 옮김 / 미래지향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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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에 직면한 무명작가 로웬 애슐레이는 어느 날 거짓말 같은 제안을 받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베스트셀러 작가 베러티 크로퍼드 대신 그녀의 유명 시리즈 마지막 세 편을 집필해달라는 것입니다. 베러티의 명성에 부담을 느낀 로웬은 처음엔 제안을 거절하지만 베러티의 남편 제러미가 엄청난 고료를 제시하자 자기도 모르게 수락하고 맙니다. 베러티가 남겨놓은 메모와 원고 등 필요한 자료를 구하기 위해 베러티 부부가 사는 대저택에 도착한 로웬. 하지만 그녀는 베러티의 서재에서 미발표 자서전 원고를 발견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거기엔 베러티 본인 외엔 아무도 모르는 베러티 가족의 끔찍한 비극의 진실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베러티는 한 가족에게 연이어 들이닥친 비극과 그 진실을 다룬 심리 스릴러이자 집착과 광기에 가까운 사랑을 그린 노골적인 성애 로맨스이기도 합니다. 로웬이 발견한 베러티의 미발표 자서전 원고는 그녀가 어떻게 제러미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어떻게 3남매를 둔 가족을 일궜으며, 연이은 사건과 사고가 어떻게 가족을 붕괴시켜 지금에 이르게 만들었는지를 상세하게 담고 있는데, 그 자체가 심리 스릴러이자 성애 로맨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안 그래도 몽유병, 광장공포증, 대인기피증 등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로웬이 제러미의 대저택에 도착한 이후 겪는 질풍노도와도 같은 감정적 동요와 갈등, 그리고 위태로운 로맨스까지 더해져서 평범한 도메스틱 스릴러와는 사뭇 다른 결의 서사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읽을 리 없다는 전제 하에 쓰인 내밀한 자서전에 담긴 베스트셀러 작가 베러티의 충격적인 비밀과 그 가족에게 닥친 연이은 비극의 실체, 그리고 홀로 그 모든 것들을 알게 된 로웬이 베러티의 남편 제러미에게 품게 되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 - 연민과 동정에서 시작된 뒤 자신이 알게 된 비밀을 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엔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고 마는 - 은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드는 가장 큰 힘입니다.

 

마지막에 몰아치는 파국과 에필로그의 반전은 그 자체로는 큰 힘을 지니고 있진 않지만, 독자에게 당신이 목격한 진실들가운데 어떤 게 참이고 어떤 게 거짓일까?”라는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불편하면서도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독자 입장에선 로웬과 베러티를 통해 목격한 진실들가운데 어느 쪽이 참이라고 해도 조금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습니다. 각각의 진실은 어느 쪽이 더 비참하다고 판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상막하의 비극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끝났지만 끝나지 않는 논쟁적 소설이라는 평가는 이런 이유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콜린 후버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베러티가 한국에 소개된 첫 작품인 줄 알았는데, 검색해보니 무려 다섯 편의 작품이 출간돼있었습니다. 다만 다섯 편 모두 그녀의 전공인 로맨스 작품이라 장르물로서는 베러티가 처음인 셈인데, 스릴러와 로맨스를 절묘하게 결합한 필력을 감안하면 언젠가 베러티를 능가하는 작품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5개를 주진 못했지만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니 치명적인 로맨스와 심리 스릴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만나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딱 한 가지만 흠을 잡자면, 남자 주인공인 제러미는 대략 30대 후반인데 그의 대사는 모두 하오~ ’, 그러니까 밥 먹었소?”, “편하게 생각해주시오.”, “금방 가져오겠소.” 식의 사극 톤으로 번역된 점입니다. 그가 딱히 고전적인 캐릭터도 아닌 상황에서 독자로 하여금 남자 주인공을 10~20년이나 늙게 느끼게끔 만든 이유를 정말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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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 Medusa Collection 1
토머스 H. 쿡 지음, 김시현 옮김 / 시작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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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가을, 뉴욕. 공원 연못가에서 8살 소녀 캐시 레이크의 사체가 발견되고, 인근 굴다리 아래 살던 노숙자 앨버트 스몰스가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됩니다. 하지만 심증만 가득할 뿐 물증도 목격자도 없고 자백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더는 스몰스를 붙잡아둘 수 없게 됐고, 경찰은 그를 풀어줘야 하는 다음날 오전 6시까지 12시간 동안 최종 심문을 가하기로 합니다. 담당형사인 코언과 피어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몰스를 심문하지만 좀처럼 자백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스몰스의 과거를 파헤치기로 한 코언은 피어스를 그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보내고 홀로 심문을 이어갑니다. 잔혹한 연쇄 아동살해범이 분명해 보이지만 심문이 진행될수록 코언은 스몰스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위화감만 느낄 뿐입니다.

 

토머스 H. 쿡은 해외에서의 명성에 비해 한국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한 작가입니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앤솔로지를 제외하고 그가 펴낸 작품이 2018년까지 모두 33편인데, 한국에는 6편만 소개된 상태이고, 그나마도 2017년에 출간된 브레이크하트 힐’(Breakheart Hill, 1995)을 끝으로 5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6편 중 줄리언 웰즈의 죄를 제외하고 모두 읽었으니 쿡의 성향을 어느 정도는 파악했다고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쿡이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해외에서 그의 강점이자 미덕으로 꼽는 이유, 아름다우면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때문으로 보입니다. 깔끔한 미스터리도, 화려하거나 인상적인 스릴러도 아닌 그의 작품들은 매번 비슷한 인상과 여운을 남기곤 했는데, 읽는 내내 마음 한쪽에 무거운 돌이 얹힌 듯한 불편함과 묵직함을 감수해야 했고,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한없는 안타까움 혹은 비정함이 전신을 뒤덮는 경험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상처 입은 천사처럼 글을 쓰는 작가’, ‘어두운 렌즈를 통해 밤을 그려내 영혼을 사로잡는 작가’, ‘음울한 아름다움과 철학적 고민을 담은 스릴러등이 쿡에게 바쳐진 헌사들인데, 바로 이런 매력들이 한국에선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심문은 개인적으론 붉은 낙엽다음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역시나 쿡의 환영받지 못한 재능이 강렬하게 배어있는 작품이라 소수의 팬들 외엔 쉽게 소구하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증이나 단서 외에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용의자의 자백밖에 없습니다. 심문은 용의자가 뛰어난 연기력을 지녔거나 애초 무죄라면 그저 강압적이되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는 무력한 수단입니다. 8살 소녀를 상대로 악랄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분명한 노숙자 스몰스가 범행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 과거의 행적에 대해서도 입을 꼭 다문 탓에 담당형사인 코언과 피어스는 12시간이라는 시간제한까지 걸린 이 최종 심문이 더더욱 무력하게만 느껴집니다. ‘착한 경찰-나쁜 경찰’, ‘어르고 달래다가 느닷없이 윽박지르기’, ‘감정에 호소하기등 폭력 외에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전략을 구사하지만 스몰스의 태도는 체포됐을 당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어쩌면 잔혹한 연쇄 아동살해범일지도 모르는 스몰스가 자유의 몸이 될 오전 6시는 속절없이 다가옵니다.

 

심문정의롭고 선한 경찰이 심문과 단서 추적을 병행하며 악당을 응징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딘가 다른 세계에 정신줄을 놓고 온 것 같은 평범한 노숙자 스몰스에게서 소녀 살해범의 기운 같은 건 엿보이지도 않습니다. 담당형사 중 유대인인 코언은 2차 대전 중 목격한 동족의 대량학살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있고, 피어스는 어린 딸을 무참한 범죄로 잃은데다 그 용의자가 유유히 자유의 몸이 된 악몽을 품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 외에도 마약중독으로 만신창이가 된 아들을 둔 수사반장, 중후한 은발과 관대한 인격을 지닌 듯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진 경찰청장, 무능하기 짝이 없지만 유일한 쓸모 한 가지 때문에 해고를 면한 부패한 경찰 등 소녀 살인사건을 둘러싼 인물 대부분이 악취와 불온함이 잠식한 1950년대 초반 뉴욕의 뒷골목 풍경과 꼭 닮아있어서 단순히 누가 범인인가? 스몰스는 정말 무고한가?”라는 미스터리 자체보다 더 눈길을 끕니다.

 

인물도, 사건도 어디 하나 밝은 구석을 찾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문아름다우면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로 읽히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쿡의 문장은 아름다움도 고통스러움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냉엄한 하드보일드 스타일마냥 건조하고 객관적입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은 페이지와 챕터를 이루면서 쿡에게 바쳐진 헌사들이 그저 사탕발림이나 형식적인 예의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입증합니다. 읽을 때마다 힘들고 불편하면서도 간혹 그의 작품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오르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약 같은 매력이라고나 할까요?

 

심문의 엔딩은 화들짝 놀랄 정도는 아니어도 묵직한 반전을 품고 있습니다. 동시에 소녀 살해사건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 특히 최종 심문에 관여한 사람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과 허탈함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깊디깊은 심연 같으면서도 아주 미약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미묘한 엔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에 소개된 쿡의 작품 중 유일하게 읽지 않은 건 줄리언 웰즈의 죄밖에 없습니다. 언제 읽을지 기약은 없지만 분명 언젠가 쿡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튀어오를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더 이상 쿡의 작품이 한국에 소개되지 않는다면) “더는 읽을 게 없구나.”라는 진한 아쉬움을 느낄 것만 같습니다. ‘다시는 읽고 싶지 않지만, 기어이 다시 읽게 되는 작가가 몇 명 있는데 아마도 쿡은 그 목록에선 거의 최상단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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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선 Oslo 1970 Series 2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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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온 스노우에 이은 오슬로 1970’s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다르지만 시공간적 배경이 동일하고 조연들(오슬로의 암흑가를 양분하고 있던 보스들)도 같은 인물이라 두 작품은 거의 쌍둥이 급으로 닮은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를 연상시키는 비장미와 로맨스의 조합이라든가 킬러지만 킬러로서의 덕목을 상실한 아이러니한 캐릭터라든가 주인공 주변을 위성처럼 떠돌며 그의 트라우마를 보듬어주는 상처투성이 여인이라든가 많은 부분에서 무척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6년 만에 다시 읽었지만 두 작품 모두 요 네스뵈의 새로운 면모를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작품들이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오슬로의 암흑가는 호프만과 뱃사람이 양분하고 있었습니다. 전작인 블러드 온 스노우의 주인공 올라브는 피도 눈물도 없는 프로페셔널 킬러였지만 아내를 살해하라는 보스 호프만을 배신하고 비극의 길을 걸었던 인물입니다. 반면 미드나잇 선의 주인공 울프는 호프만 사후 오슬로를 장악한 뱃사람을 배신하는 킬러인데, 문제는 그가 사람 하나 제대로 죽이지 못하는 어리숙한 인물이란 점입니다. 애초 킬러의 자질이라곤 조금도 없는 소심남이지만 엉뚱한 오해 때문에 반강제로 등을 떠밀린 끝에 킬러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 울프가 딸의 치료비를 위해 암살 대상을 살려 보낸 뒤 돈을 챙깁니다. 하지만 운명은 울프의 편이 아니어서 그는 우여곡절 끝에 황량하고 척박한 노르웨이의 최북단 핀마르크 주의 코순이라는 마을에 몸을 숨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0살 소년 크누트와 그의 어머니 레아를 만납니다. 언제 자신을 찾아올지 모르는 뱃사람의 킬러를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블러드 온 스노우의 올라브가 그랬듯 울프 역시 절망적인 캐릭터입니다. 가족으로부터, 사랑으로부터 도망치기 급급했던 고독한 존재였고, 지금도 심연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어둠과 추위와 죽음 뿐이라 확신하며 생각하는 사람도, 돌봐줄 사람도, 돌봐야 할 사람도 없는삶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런 그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땅으로 도망친 끝에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인 레아를 만난 일은 새로운 비극의 시작일 수도, 연약한 희망의 끈을 잡는 일일 수도 있어서 시종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말하자면 미드나잇 선은 소심한 킬러의 사투의 기록이자 수렁에 빠진 두 남녀의 로맨스입니다. 이야기의 흐름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통속적으로 흘러가지만, 요 네스뵈 특유의 문장과 매력적인 인물들 덕분에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습니다.

 

(‘블러드 온 스노우의 서평에서도 썼듯이)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요 네스뵈의 대표 캐릭터 해리 홀레가 경찰이 아니라 킬러가 됐다면 올라브 아니면 울프 둘 중 한 인물이 됐을 게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안과 밖으로 가시를 두른 채 자신은 물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상처 주는 인물, 하지만 저 깊은 곳 어딘가에 아주 작은 한 조각의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 그래서 차라리 자신이 더 다치고 상처받더라도 결국엔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고 마는 인물. 해리와 올라브와 울프는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긴 하지만 속내를 뜯어보면 이란성 쌍둥이 같은 형제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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