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것들
제스 루리 지음, 안현주 옮김 / 네버모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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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미네소타 주의 릴리데일에서 한 소년이 납치되었다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이 강간을 당했다고 수군거린다. 그리고 얼마 뒤, 또 다른 소년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마을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12살 소녀 캐시는 납치당한 후 돌아온 소년들이 자신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은 버스를 타고 통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이나 뒤표지의 카피만 보면 연쇄소년납치범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라고 예단하기 쉽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12살 소녀 캐시가 1인칭 화자를 맡은 지독한 성장소설이자 심리 서스펜스에 더 가깝습니다. 분명 소년들이 납치당하고 잔혹한 짓을 당하는 사건이 등장하긴 하지만 사건 자체보다는 캐시의 눈에 비친 일그러진 세상의 단면들과 그것들이 내뿜는 악취나 공포가 이야기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을의 소년들을 노리는 외부의 괴물과 자신을 노리는 집 안의 괴물과 맞서야 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훌륭한 성장소설이자 범죄소설.”이라는 출판사 소개글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보면 됩니다.

 

범죄에 휘말린 희생자 대부분이 문제적 가정이 몰려있는 지역의 거친 소년들이다 보니 그 외 지역의 사람들은 물론 경찰마저 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오로지 캐시만이 릴리데일에 사는 괴물들 하나하나를 주목하며 범인을 찾아내려 애쓸 뿐입니다. 경찰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 역시 캐시 눈에는 믿을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아버지 도니와 공모하여 불온한 짓을 일삼는 괴물로 보일 뿐입니다. 사냥개를 풀어놓은 이웃의 고블린 역시 소년납치범이 되고도 남을 무시무시한 괴물이라 캐시의 주목을 받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캐시가 상대해야 할 괴물은 집안에도 존재합니다. 조각가라고 자칭하지만 작품도 돈도 내놓지 못하는데다 스와핑을 연상시키는 역겨운 행위들이 거리낌 없이 벌어지는 파티를 수시로 열기도 하며, 가족들을 소유물로 여기는 것은 물론 친딸인 캐시와 언니 세피에게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아버지 도니가 바로 그 괴물입니다. 말하자면 캐시에게 안전한 곳은 아무데도 없는 셈입니다.

 

미국이 성범죄자 등록법을 시행하게 된 사건을 바탕으로 쓴 화제작!”이라는 카피와 연쇄소년납치범을 강조한 출판사 소개글 때문에 범죄 스릴러라는 기대를 잔뜩 품은 탓인지 12살 소녀 캐시가 끌고 가는 심리 서스펜스에 가까운 서사는 다소 낯설고 당혹스러웠던 게 사실입니다. 막판에 캐시의 집요함 덕분에 범인이 밝혀지고 정의가 구현되긴 하지만 그 역시 통쾌함이나 징악의 쾌감보다는 소도시 릴리데일과 캐시의 집을 지배하고 있던 더럽고 역겨운 기운을 몰아냈다는 안도감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에필로그를 읽은 뒤에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건 괴물에 둘러싸인 채 홀로 외롭게 성장해야 했던 캐시의 캐릭터였습니다.

 

사족으로, 가장 아쉬웠던 점 하나는 번역입니다. 마지막 수정을 거치지 않은 듯한 애매모호한 문장들이 여러 곳에서 보였는데, 같은 번역가의 작품 낫씽맨’(캐서린 라이언 하워드)에서 번역의 문제를 전혀 못 느낀 걸 보면 원작 자체 때문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번쯤 더 문장을 다듬었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여러 차례 든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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