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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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도쿄. 2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신문사를 그만뒀던 54세의 마쓰다 노리오는 현재 여성잡지 계약직 기자로 일하는 중입니다. 계약 만료 두 달을 앞둔 어느 날, 편집장의 지시로 심령 소재 취재를 시작한 마쓰다는 한 건널목에서 찍힌 긴 머리 여자의 사진과 영상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조작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다 여자의 모습은 분명 유령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여자가 1년 전 그 건널목에서 피살됐음을 알아낸 마쓰다는 큰 충격과 함께 그녀의 정체를 파악하기로 결심합니다. 사건 당시 그녀의 본명이나 주소는 물론 가족조차 경찰이 전혀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마쓰다는 그녀에 관한 놀라운 정보를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특종 이상의 흥분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제목도 그렇고 출판사의 소개글도 그렇고, 아마도 작가가 다카노 가즈아키가 아니었다면 읽을까 말까 한참을 주저했을 게 분명한 작품입니다. 물론 미쓰다 신조의 도조겐야 시리즈작가 시리즈였다면 체할 정도로 급하게 찾아 읽었겠지만, 기본적으론 현대를 배경으로 한 유령 호러물은 제 취향 중 좀 아래쪽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 중 한국에 처음 소개된 유령인명구조대의 개정판인 줄 알았는데, 검색해보니 제노사이드이후 11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었고, 그래서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당장 읽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구매신청을 해버렸습니다.

 

주인공인 마쓰다 노리오는 54세의 월간지 계약직 기자입니다. 가정을 내팽개칠 정도로 사회부 기자로 평생을 일해 온 마쓰다는 2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절망감에 사로잡혀 신문사까지 그만둔 바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계약직 기자가 된 그가 계약 만료를 앞두고 취재하게 된 건 심령 소재입니다. 먼저 간 아내를 유령 형태로라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흘리곤 했던 마쓰다지만 정작 심령 소재 취재를 맡게 되자 심한 거부감과 함께 기자로서 막장에 이르고 말았다는 자조적인 태도까지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 마쓰다가 취재를 시작한 이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직접 겪으며 혼란에 빠집니다. 심령사진 속의 여자가 1년 전 끔찍하게 살해된 장본인이라는 걸 안 뒤로 마쓰다는 여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과거 사회부 기자처럼 열정적으로 취재에 나섭니다. 그런데 동시에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리 없는 기이한 현상들도 경험하게 됩니다. 심령현상이 일어나기 직전의 전조라는 나무줄기 쪼개지는 소리를 자주 듣기도 하고, 여자가 살해된 새벽 13분만 되면 울리는 전화기 속에서 희미한 비명 소릴 듣기도 하고, 심지어 사건현장인 건널목에서 유령임에 분명한 존재를 발견하곤 기차가 달려오는 줄도 모른 채 건널목 안으로 달려들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한편에선 살해된 여자의 정체와 사건 이면의 진상을 알아내려는 열정적인 기자 마쓰다의 취재 미스터리가 전개되고, 다른 한편에선 명백히 비현실적인 유령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이 든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사실적인 나머지 (마치 영화 사랑과 영혼처럼) 마쓰다가 유령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고, 막판에는 마쓰다가 유령의 원통함을 통쾌하게 풀어주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카노 가즈아키가 절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작가는 아니기에 헛된 바람이란 건 너무나도 잘 알았지만 말입니다.

 

취재를 거듭할수록 마쓰다의 마음은 점점 어둡게 물듭니다. 그녀의 정체는 여전히 요원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해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한 여자.”, “늘 음울하게 웃으며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성격 나쁜 여자.”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평판을 얻기까지의 사연을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지를 알게 되면서 마쓰다는 특종을 노리는 기자의 마음가짐 대신 쉽게 꺼지지 않을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마쓰다가 바라는 건 그녀의 유령을 안식에 들게 하는 것뿐이고, 실제로 마쓰다는 그렇게 되게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합니다.

 

정서는 전혀 다르지만 영화 사랑과 영혼에 등장한 유령 샘도 생각이 많이 났고, 비참함으로 점철된 한 여자의 삶이란 점에서 일본 드라마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많이 생각났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 특유의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성실하고 열정적인 기자 마쓰다를 통해 저널리즘 미스터리의 진한 맛을 만끽할 수도 있었습니다. 무겁고 어둡지만 길고 오래 갈 여운도 함께 말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11년 동안 신작을 내지 않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해서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들을 자주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봐도 이후 신작 소식은 나오지 않는데, 머잖아 그가 새로운 작품을 냈다는 소식이 들려오길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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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없는 검사의 분투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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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재단, 재무공무원, 국회의원까지 연루된 국유지 헐값 매각 사건이 오사카지검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수사결과에 따라 정권을 위협하는 대형스캔들로도 비화할 수 있는 사건이라 오사카지검은 특수부를 비롯하여 유능한 검사들을 다수 투입하지만, 얼마 후 특수부 검사 한 명이 증거를 조작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사카지검은 패닉에 빠집니다. 수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고 그때 바닥까지 추락한 지검의 신뢰는 아직도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검에서 조사팀을 투입하기에 이르렀고, 그때까지 특수부 파견을 거부해온 오사카지검의 에이스 후와 슌타로는 지검장의 명령으로 대검 조사팀과 함께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2020년에 한국에 출간된 표정 없는 검사에 이은 후와 슌타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는 2021년에 출간됐던 터라 곧 만나볼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거의 3년이 지난 후에야 한국 독자를 찾아왔습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주인공들 대부분이 비범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지만 후와 슌타로는 이른바 能面檢事’, 즉 일본 전통극 ’()에 쓰이는 가면을 쓴 듯 그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는 기계와도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어서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뛰어난 능력 덕분에 오사카지검의 에이스라 불리면서도 후와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과 차가운 말투 때문에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과거 도쿄지검 재직 시 저지른 최악의 실책 이후 제대로 된 사법기관으로서 역할하기 위해 표정을 지웠을 뿐 그는 타고난 반골은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분은 어떤지, 좀전에 뭘 했는지 등 그야말로 머릿속의 모든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무관 소료 미하루가 후와의 곁을 지킵니다. 1편에서 후와의 사무관으로 배속된 이후 숱한 좌절과 절망을 겪으면서도 1년 가까운 시간을 견뎌내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후와의 일거수일투족에 놀라고, 당황하고, 허둥댑니다.

 

1편에서 오사카 경찰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후와가 이번에 상대하는 건 자신이 속한 조직인 검찰입니다. 수년 전 세상을 놀라게 했던 특수부 검사의 증거조작이 또다시 되풀이되면서 오사카지검은 궁지에 몰렸고, 대검의 조사팀에게 지검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처지에 빠집니다. 그런데 대검 조사팀 중 한 명인 도쿄지검 차장검사 미사키는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후와를 수사에 합류시켰고, 결과적으로 후와는 대검 조사팀의 일원이 되어 오사카지검의 동료를 조사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합니다. 성과를 올릴 경우 동료를 욕보인 원흉이 될 것이고, 실패할 경우에도 오사카지검의 공중분해를 야기한 주범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후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진실 찾기에 나서겠다고 대응했고, 실제로 그는 주위에서 놀랄 정도로 냉정하게 조사를 진행합니다. 문제는 그가 조사해야 하는 대상도 검사이고, 시기심과 공명심에 사로잡혀 그를 비난하고 견제하는 것도 검사라는 점입니다. 말 그대로 검사가 벌이는 검사와의 전쟁이라고 할까요?

 

다소 딱딱하고 어려운 용어들이 난무하는 국유지 헐값 매각 사건과 증거조작 사건은 중반 이후 후와와 미하루의 현장 조사를 통해 과거의 다른 사건과 맥이 닿으면서 급물살을 탑니다. 이 대목이 살짝 비약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집요한 탐문과 현장조사를 통해 후와가 알아낸 진실은 원래 사건에선 도저히 유추할 수 없었던 소소한 감동과 안타까움을 선사합니다. 나카야마 시치리 특유의 연속 반전의 쾌감과 함께 말입니다. 물론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회의실에 앉아서 후와의 공을 훔치고 오사카지검을 공중분해시키려던 대검 조사팀을 제대로 물 먹이는 일도 잊지 않습니다. (애초 후와를 조사팀에 끌어들인 도쿄지검 차장검사 미사키는 이 작품에서 거의 유일하게 좋은 검사로 활약하는데, 그는 나카야마 시치리의 또다른 주인공 미사키 요스케의 아버지로 밝혀집니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자신들의 업무를 소홀히 하는 공무원들이 심심치 않게 언론과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와중에 영웅 같은 공무원이 활약하는 작품을 쓰는 것이 대중 소설가의 책무라고 집필의도를 밝힌 바 있는데, 요즘의 한국 상황을 보면 후와 같은 검사가 한 명쯤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습니다. ‘표정 없는 검사 후와 슌타로 시리즈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두 작품쯤은 더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옮긴이의 말에 나온 것처럼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신념 투철한 사법기계의 활약은 언제 읽어도 속 시원한 사이다처럼 짜릿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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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유괴 붉은 박물관 시리즈 2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 / 리드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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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하루아침에 경시청 수사1과에서 한직 중의 한직인 경시청 부속 범죄자료관, 일명 붉은 박물관으로 추락한 데라다 사토시와 경찰로서 뛰어난 스펙은 물론 천재적인 추리능력까지 지녔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수년째 붉은 박물관관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히이로 사에코 콤비의 두 번째 이야기로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입니다.

 

붉은 박물관의 원래 목적은 미결 혹은 종결된 형사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보관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는 간혹 이 사건의 재수사를 실시한다!”라는 사에코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곤 합니다. 사에코는 과거의 자료들 속에서 의문점을 발견하거나 위화감이 느껴지면 그것이 미제사건이든 이미 시효가 지난 사건이든 관계없이 기어이 재수사를 감행하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이 붉은 박물관이 법망을 피해 도망치는 범인을 막아내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한다.”라는 멋진 사명감을 갖고 있긴 해도 의사소통능력 자체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탓에 탐문은 아예 불가능한 4차원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아직 초짜 티를 벗진 못한데다 비록 좌천되긴 했어도 수사1과 출신의 자부심을 품고 있는 사토시가 그녀의 곁을 지키며 현장 조사와 탐문을 도맡습니다.

 

사에코의 추리는 대범하다 못해 기괴하다는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망상에 가까운 추리력을 발휘할 때마다 사토시가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발상인가?”라고 탄식을 내뱉곤 하는데, 그것은 곧 독자의 심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긴 사건의 대전제들을 180도 뒤집는가 하면, 애초 상상 자체가 불가능한 추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지다가 곧바로 진상에 도달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에코의 기행이야말로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이자 미덕이기도 합니다. 본격과 트릭의 향연을 맛깔나게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소스라고 할까요?

 

시리즈 첫 편인 붉은 박물관에서 사에코에게 하도 여러 차례 놀란 덕분인지, 두 번째 작품인 기억 속의 유괴는 조금은 더 객관적이고 차분하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섯 편의 수록작 중 한 편은 (비록 과정까지는 제대로 맞히지 못했지만) 중반쯤 범인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전작의 교훈을 제대로 숙지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수록작에서 사에코의 파격적인 추리는 여전히 빛났고,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발상인가?”라는 독자와 사토시의 탄식 역시 매작품마다 반복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작인 붉은 박물관서평에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0.5개를 뺀 건 사에코의 비범한 능력이 종종 과도한 비약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썼는데, ‘기억 속의 유괴역시 비슷한 느낌입니다. 물론 붉은 박물관보다는 훨씬 더 현실감 있고 안정적으로 읽혔지만 아무래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비약하는 사에코의 모습에서 살짝 이물감이 느껴진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비약 없는 사에코였다면 과연 이만큼 재미있게 읽혔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아직 보진 못했지만 붉은 박물관수록작 중 일부가 TV드라마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기억 속의 유괴에도 영상화가 기대되는 수록작들이 몇 편 있습니다. 의문의 연쇄방화범을 그린 연화와 기이한 유괴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표제작 기억 속의 유괴가 가장 기대됐고, 영상화가 쉽진 않겠지만 본격의 맛이 잘 살아있는 황혼의 옥상에서역시 드라마로 보고 싶어진 작품입니다.

 

본격과 트릭의 향연에 4차원 천재와 어리바리 형사의 콤비 플레이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이 일본에서 20221월에 출간됐으니 어쩌면 1~2년 안에 그들의 세 번째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단편이지만 설계와 구성에 적잖은 공이 필요한 작품들이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새 작품과 만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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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대관람차 버티고 시리즈
유우야 토시오 지음, 김진환 옮김 / 오픈하우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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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 정오, 전통 깊은 놀이공원 드림랜드에 설치된 대관람차 드림아이가 갑자기 멈춰섭니다. 그리고 그 직후 꼭대기에 있던 관람차 한 대가 지상으로 추락하며 폭발합니다. 스스로를 난쟁이라고 칭한 범인은 어린 딸과 함께 곤돌라에 갇힌 전직 형사 나카야마 히데오를 교섭자로 지목하곤 자신의 요구사항을 경찰에 전달할 것을 지시합니다. 얼마 후 나카야마는 이 희대의 인질극이 5년 전 미해결 사건으로 마무리된 한 소녀의 처참한 죽음과 관련 있음을 깨닫습니다. 한편 지상에서 수사를 지휘하게 된 경시청 수사1과 카이자키는 오랜 악연으로 얽힌 경찰학교 동기 나카야마와 뜻밖의 상황에서 재회하게 되자 미묘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어쩌면 그를 영원히 파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음울하면서도 한없이 애틋해보여서 단번에 눈길을 잡아끈 표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 더욱 흥미를 갖게 된 건 그동안 로버트 크레이스, 리 차일드, 이언 랜킨 등 영미권 작가의 스릴러만 출간해온 오픈하우스의 버티고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내놓은 일본 미스터리인데다 그것도 신인작가의 데뷔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면에서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결과부터 말하자면 만점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사건 자체도 흥미로운데다 적잖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 이리저리 엉킨 복잡한 감정들이 사건 이면에 자리 잡고 있어서 누가,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건가?” 이상의 호기심을 자아냅니다. 또한 5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벌어진 참혹한 소녀 살해사건이 이번 인질극의 배후에 있는 게 분명하지만 곤돌라에 갇힌 나카야마도, 현장에서 수사를 지휘하는 카이자키도 그 관련성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탓에 독자의 궁금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하더라도 탈출할 방법이 없는 곳을 범행 현장으로 삼은데다 마치 쾌락범에 의한 극장형 범죄를 추구하는 듯 하다가 갑자기 거액의 돈을 요구하기도 하는 등 혼선을 거듭하는 난쟁이의 범행동기와 최종 목표가 미스터리의 핵심이지만, 독자의 눈길을 더 끄는 건 수사의 두 주체인 나카야마와 카이자키의 과거와 현재에 걸친 악연입니다. 경찰학교 시절 정의를 논하며 함께 미래를 그렸지만, 나카야마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지역파출소 근무에 만족하며 시민들의 안전을 우선시 한 반면 카이자키는 출세욕을 감추지 않으며 경시청 수사1과에서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됐습니다. 그렇게 갈라섰던 두 사람은 5년 전 소녀 살해사건을 기점으로 완전히 등을 돌렸고, 당시 미결로 처리된 사건의 그림자가 드리운 대관람차 인질극에서 운명적으로 재회했습니다. 서로를 난쟁이의 공범으로 의심하면서도 함께 난쟁이를 추적해야 하는 기묘한 처지로 말입니다. 이들의 팽팽한 심리전은 미스터리 못잖게 이 작품의 핵심 서사입니다.

 

만점을 주지 못하고 별 1개를 뺀 이유는 세 가지인데, 하나는 일부 인물들의 행동에 현실감이 결여됐거나 설명이 부족하거나 다소 비약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서평을 쓰기 전에 줄거리를 정리하다 보니 이런 부자연스러운 점들이 더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물론 제가 놓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나카야마와 카이자키 입으로 설파되곤 하는 주제의식 혹은 가치관입니다. 필요하긴 했지만 좀 과해 보였다고 할까요? 마지막으로 범인의 정체와 범행동기가 범행수법과 조금은 따로 노는 듯 보인 점입니다. “이 방법밖에 없었을까?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을까?”라는 의문은 서평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몇몇 아쉬움은 있었지만 신인답지 않은 정교한 설계와 풍성한 서사는 후속작을 기대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버티고 시리즈가 첫 일본 미스터리로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조만간 데뷔작을 뛰어넘는 유우야 토시오의 두 번째 작품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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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박물관 붉은 박물관 시리즈 1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 / 리드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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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청 수사1과의 데라다 사토시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하루아침에 좌천되고 맙니다. 그의 새 근무지는 이른바 붉은 박물관으로 불리는 경시청 부속 범죄자료관’. 미결 또는 종결된 형사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보관하는 그곳은 관장 한 명과 관원 한 명이 전부인 한직 중의 한직입니다. 전임자들 대부분이 얼마 못 버티고 경찰 옷을 벗었다는 그곳에서 사토시는 언젠가 수사1과로 복귀할 각오를 다지지만, 4차원을 뛰어넘는 박물관장 히이로 사에코 덕분에 예상치도 못한 특별한 수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과거의 수사 자료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을 느끼면 재수사!”를 선언하는 사에코가 처음엔 망상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에게 천재적인 추리능력이 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경시청 부속 범죄자료관을 무대 삼아 미결 혹은 종결된 형사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통해 오랜 시간 묻혀있던 진실을 알아내거나 잘못 알려졌던 진상을 바로잡는다는 설정 자체도 흥미롭지만, ‘붉은 박물관의 진짜 미덕은 본격 미스터리와 다양한 트릭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특히 모든 단서를 독자와 공유한 상태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과 결말을 이끌어내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작가에게 여러 번 놀라게 됩니다. 오랜만에 맛본 본격과 트릭의 향연은 고전의 풍미까지 품고 있어서 더욱 진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의 미덕을 몇 배는 더 흥미롭게 만드는 건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워 보이지만 묘한 콤비 플레이를 선보이는 두 주인공입니다. 모든 수사관이 꿈꾸는 경시청 수사1과의 멤버가 됐지만 어이없는 실수 때문에 좌천의 쓴맛을 본 데라다 사토시는 사실 뛰어난 수사관으로 보기는 어려운 인물입니다. 오히려 아직 성장이 많이 필요한 초보의 티가 폴폴 풍기는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수사를 이끄는 박물관장히이로 사에코와 잘 어울리는 것은 무척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창백한 피부와 그에 대조되는 검은 머리카락.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데다 웃는다라는 기능이 결여된 듯한 인형처럼 차가운 얼굴. 심지어 의사소통 능력마저 심각하게 부족.”이라는, 이세계 인물에 가까운 사에코의 캐릭터는 그녀의 비범한 추리능력만큼이나 독특한 개성을 자랑합니다. 경찰로서 뛰어난 스펙과 계급까지 지녔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8년째 박물관에서 근무한다는 사실도 사토시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사에코에게는 붉은 박물관에 대한 확실한 철학이 있습니다.

 

나는 이 붉은 박물관이 법망을 피해 도망치는 범인을 막아내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궁에 빠진 사건의 증거품이 여기 오면 나는 그 사건을 한 번 더 검토하지.” (p51)

 

실제로 사에코는 새로 도착한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대할 때면 눈빛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위화감이 느껴지면 주저하지 않고 재수사!”를 선언합니다. 하지만 독자도 사토시도 사에코가 위화감을 느낀 이유를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에코가 지시하는 수사 방향도 도무지 맥락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모든 증거와 서류가 눈앞에 있는데도 뭐가 이상한 건지, 왜 이상한 건지 좀처럼 사에코를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막판에 사에코가 진상을 밝히는 대목에 이르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위화감의 정체와 이해 불가능했던 맥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사토시뿐 아니라 독자 역시 어떻게 그런 발상이 가능하지?”라는 의문과 감탄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수록된 다섯 편 모두 독특한 설정과 의외의 엔딩을 품고 있어서 마치 본격과 트릭의 뷔페를 맛보는 듯한 쾌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수록작 중 몇 편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책에서 느낀 매력이 얼마나 잘 녹아들었는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0.5개를 뺀 건 사에코의 비범한 능력이 종종 과도한 비약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괴짜 천재미타라이 기요시가 활약하는 시마다 소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꼈던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무리한 비약만큼은 아니지만, 사에코의 비범함이 살짝 현실감을 넘어서곤 했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붉은 박물관이후 두 달 만에 후속작인 기억 속의 유괴도 한국에 소개됐습니다. 다시 한 번 본격과 트릭의 정수를 맛볼 수 있게 돼서 반갑기도 하지만, ‘붉은 박물관막판에 떡밥처럼 뿌려진 사에코의 과거 아버지와 관련 있는 듯한 - 가 공개될지도 몰라 더 기대가 됩니다. 조만간 기억 속의 유괴가 제 손에 들어올 텐데 밀린 숙제들이 있긴 하지만 아마도 도착과 함께 첫 장을 펼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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