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차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관 시리즈 첫 편인 십각관의 살인을 읽은 지 거의 5년 만에 두 번째 편을 읽게 됐습니다.

오랜만에 읽었지만 두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점 못잖게 확실한 차이점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십각관의 살인(특이하긴 해도) 보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면,

수차관의 살인은 호러와 미스터리가 잘 융합되어 긴장감을 더욱 끌어올린 작품입니다.

, ‘십각관의 살인이 연쇄살인이 벌어지는 섬 츠노시마의 이야기와

사건을 추리하는 인물들이 있는 육지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교차시켰다면,

수차관의 살인1년 전 경찰에 의해 어정쩡하게 마무리됐던 살인사건의 이야기와

1년 후인 현재, 같은 인물들이 모여든 수차관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을 교차시켰습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과거와 현재를 정교하게 교차시킨 뛰어난 구성의 진가는

후반부에 가서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제대로 빛을 발하게 됩니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라면 어딘가 삐딱해 보이는 괴짜 탐정 시마다 기요시가 가세한 점인데,

그는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리낄 것 없이 수차관을 휘젓고 다니며

크고 작은 단서들을 바탕으로 2년에 걸쳐 벌어진 참혹한 연쇄살인의 진상을 추리하다가

결국 아무도 예상 못한 진범을 확정하게 됩니다.

시마다 기요시의 이런 추리는 십각관~’때와는 전혀 다른 패턴을 보여주는데,

두 작품의 차이는 작가의 후기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십각관의 살인은 커다란 한 방으로 승부한,

말하자면 기습적인 놀라움을 노린 작품이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본격 미스터리의 경향이 조금 더 강한,

즉 주어진 단서를 이용해 진상을 논리적으로 이끌어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자 특징은 주 무대인 수차관의 독특한 분위기와 구조,

그리고 그런 공간에 걸맞는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의 조합입니다.

수차관은 일본 미스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어딘가 음산해 보이는 서양식 저택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어딘가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지만,

거기에 덧붙여 발전(發電)을 위해 설치한 거대한 3대의 수차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더욱 배가시키고 있습니다.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은 거대한 3개의 수차는 이 저택을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이 골짜기에 정지시켜놓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다.”라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더구나 수차관의 설계자가 시리즈 첫 편의 배경인 십각관을 지은 나카무라 세이지라는 설정은

이곳에서 벌어질 참혹한 비극에 대한 예고나 다름없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도 수차관이라는 공간적 배경 못잖게 특이합니다.

10여 년 전 끔찍한 사고로 인해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것은 물론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고무가면 뒤로 숨긴 채 살아가야 하는 41살의 후지누마 기이치,

9살 때 고아가 된 자신을 거둬준 22살 연상의 기이치의 아내가 된 후

수차관의 탑에 갇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는 19살의 유리에를 비롯,

호러물에 어울릴 듯한 다양한 조연들이 수차관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킵니다.

 

의문의 추락사, 토막 난 채 소각로에서 발견된 피살자, 밀실에서 증발된 용의자 등

1년 전 태풍이 몰아치던 밤에 벌어졌던 기이한 사건들에 이어

1년 후 같은 날, 똑같이 태풍이 다가오는 순간 벌어지는 연쇄살인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시마다 기요시의 본격 미스터리 수차관의 살인

출간된 지 30년 가까이 된 시간도 시간이지만, 내용이나 완성도 면에서

고전의 반열에 올라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소장해놓고도 아야츠지 유키토의 신작들에 파묻혀

늘 뒷전으로 미뤄놨던 관 시리즈에게 새삼 관심을 갖게 만든 수차관의 살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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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상어 - 사메지마 형사 시리즈 01 뫼비우스 서재
오사와 아리마사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너무 직설적인 제목과 어딘가 B급 정서가 느껴지는 표지 때문에

숱하게 소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품절상태가 된 뒤에야 중고 상품으로 구한 작품입니다.

 

끝 모를 욕망과 환락이 치명적인 위험과 나란히 공존하는 신주쿠의 밤풍경,

엘리트의 길을 포기한 채 타협 따윈 개나 줘버린 고독한 상어 같은 형사 사메지마,

14살 연상의 사메지마를 사랑하는 밴드 보컬이자 로켓 젖가슴을 지닌 22살의 매력녀 쇼,

그리고 동료들의 비협조와 시기, 질투 속에 경찰 연쇄피살사건의 진범을 찾아 나선

사메지마의 집요한 탐문과 추리, 목숨을 건 위기일발의 액션 등

매력적인 캐릭터에 미스터리한 사건이 잘 조합된 재미있는엔터테인먼트 경찰 소설입니다.

 

1990년부터 2006년까지 9편의 시리즈가 성공적으로 출간된 것은

전성기의 홍콩느와르를 연상시키는 적절한 선정성과 풍부한 오락성 덕분이겠지만,

네 번째 작품인 무간 인형’(1993)이 나오키 상을 수상한 것을 보면 사메지마 시리즈는

단순한 오락물을 넘어선 뭔가 특별한 것을 지녔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기구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사메지마의 과거사가 눈길을 끄는데,

보장된 장래보다 경찰로서의 원칙을 선택한 덕분에 만년 경감이라는 낙오자 처지가 되었지만,

신주쿠 상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무관용의 원칙을 고수하며

오로지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그의 비하인드 스토리 속에는

슈퍼히어로의 포스와 고뇌에 찬 정의남(正義男)의 이미지가 잘 믹스되어 있어

장르물의 주인공이라는 외형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사건 자체에 관한 한 그리 복잡하거나 미스터리가 강조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할리우드 액션물처럼 빠르게 전개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감도 만끽할 수 있어 페이지는 쉴 새 없이 넘어갑니다.

다만, 분량 면에서 볼 때 사건 자체에 관한 묘사가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한 탓에

매력적인 하드보일드 캐릭터 사메지마의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면에 관한 묘사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경찰소설의 대가인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트릭이나 미스터리 못잖게 인간에 대한 관찰이 깊이 있고 진정성 있게 묘사되기 때문인데,

신주쿠 상어의 경우 시리즈의 첫 편이라 그런지

조금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훑고 지나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국내에는 2009신주쿠 상어이후로 더 이상 소개된 작품이 없는데,

출간된 해 비교적 호평을 받았던 이력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전부는 어렵더라도 나오키 상을 받은 무간 인형만큼은 꼭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드는데,

그런 기회가 찾아와줄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사메지마 시리즈 출간을 계획하는 출판사가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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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사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9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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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생각도 못한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서,

한 번 사슬을 끊어도 다른 곳에서 연결되어 있나 봐요.”

 

꽃 사슬의 세 주인공 중 한 명인 사쓰키가 남긴 말입니다.

인연이란 말로 대신해도 문맥이 통하는 문장이지만,

사슬이라는 단어는 왠지 인연의 예쁘고 좋은 면보다는

안타깝거나, 후회되거나, 잊고 싶거나, 지워지지 않는 화인 같은,

그런 밝지 못한 면을 떠오르게 하는 표현인 듯합니다.

그런데 그 사슬의 마디마디가 꽃으로 되어 있다고 하니,

중의적이고 역설적인 제목만으로도

작품 속 인물들의 평탄하지 못한 인생경로를 예감할 수 있습니다.

 

꽃 사슬에는 세 명의 여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미유키(美雪), 사쓰키(紗月), 리카(梨花)가 그들인데,

한 챕터씩 번갈아가며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담담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각각의 이름에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한자(, , )가 들어가 있지만,

정작 세 여자의 삶에서 아름답고 화려한 시절은 이리저리 엮인 꽃의 사슬로 인해

제대로 음미해볼 틈도 없이 그저 순간에 불과한 안타까운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남편과 함께 행복으로 가득한 삶을 누리다가 한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된 여자,

기막힌 사슬 덕분에 한 남자를 사랑했지만 또다른 기막힌 사슬로 인해 비극에 빠진 여자,

자신을 둘러싼 사슬의 미스터리를 캐기 위해 그 열쇠를 쥔 미지의 남자를 찾아 나선 여자 등

사슬 또는 인연 속에서 지난한 삶을 살아간 세 여자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세 여자의 이야기는 한 챕터씩 교차되며 서로 무관한 듯 전개되다가

천천히 베일이 벗겨지면서 퍼즐 조각처럼 모여들고, 끝내 하나의 큰 그림으로 완성됩니다.

 

사실 꽃 사슬은 줄거리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단 한 개의 단어만으로도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을 절대 보지 말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다만 이 작품의 매력을 소개하고픈 욕심에

스포일러 없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 뒷면의 홍보카피를 인용하자면,

 

비밀을 그러안은 세 여자.

한 여자는 돈이 필요하고,

다른 한 여자는 진실을 원하며,

또 한 여자는 과거를 지우려 한다.

 

사실 정서나 분위기를 무시하고 무미건조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축약해놓고 보면

TV드라마에서 많이 본 우연과 막장이 난무하는 스토리라고 폄하할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각각의 개인사는 딱히 신선하다고 할 수도 없고,

그녀들이 꽃의 사슬을 통해 만나는 인물이나 겪게 되는 비극 역시 낯선 장면들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미나토 가나에는 그녀만의 소리 없이 강한문장들과

비극마저 꽃보다 아름답게 그려내는뛰어난 표현을 통해

함부로 축약될 수도, 쉽게 폄하할 수도 없는 묵직한 서사를 구축했고,

고백이나 왕복서간등을 통해 보여준 섬뜩한 형식미를 통해

상투적인 개인들의 비극을 긴장감 없이는 읽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단서는 수두룩하지만 서로를 연결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흐릿한 형태로만 보일 뿐인 꽃의 사슬의 실체는 뒷이야기에 대한 조바심까지 일으킵니다.

특히 세 여자의 이야기의 접점이 눈에 들어올 무렵부터는

비밀, 거짓말, 미스터리 등의 코드가 한꺼번에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으면서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데,

그 순간, 엄청난 힘으로 폭주했던 고백의 미나토 가나에가 떠오른 것은

단지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그동안 고백이후 연이어 아쉬움을 느껴야했던 독자들에게는

이 작품으로 작가인생 제2막이 시작된 듯합니다.”라는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이나

미나토 가나에의 새로운 대표작!”이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가

양치기 소년의 습관적인 외침(?)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꽃 사슬은 미나토 가나에가 오랜만에 자신의 진면목을 발휘한,

그래서 그녀의 이름과 고백의 여운을 기억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미나토 가나에 식 미스터리에 대한 갈증을 풀고 싶어 한 독자들에겐

비교적 소프트한서사로 인해 100% 만족감을 얻기 어려운 작품일 수도 있지만,

꽃을 이야기하며 그 안의 향기와 가시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게 한 꽃 사슬이야말로

어지간히 독한 이야기보다 더 큰 느낌과 더 많은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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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언덕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김미림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이후 세 번째 만나는 가나리야 시리즈입니다.

앞선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애틋한 제목과 추억을 떠올리는 풍경화 같은 표지 덕분에

책을 읽기도 전부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반딧불 언덕에는 표제작을 포함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간단하게 소개하면,

16년 전, 자신의 꿈을 위해 연인을 떠났던 한 남자가 뒤늦게 비밀을 알게 되는 반딧불 언덕’,

감동적인 검은 고양이 곤타 이야기와 선술집 단골들의 음모(?)를 그린 고양이에게 보은을’,

오래된 화방을 지키며 파리로 떠난 연인을 기다려온 한 여인의 이야기 눈을 기다리는 사람’,

미스터리의 늪(?)에 빠진 가나리야 단골들의 이야기를 그린 두 얼굴’,

연인 같았던 삼촌과의 추억이 담긴 환상의 소주(燒酒)에 관한 이야기 고켄등입니다.

 

어두운 산겐자야 골목 한 편에 두둥실 떠있는 사람 크기만 한 초롱,

그 한가운데에 새카맣고 느긋한 글씨체로 쓰여 있는 가나리야’,

그리고 마치 현실과 격리된 낯선 세상으로의 통로처럼 보이는 검게 그을린 삼나무 문은

시리즈 수록작마다 조금씩 다른 문장들로 표현되긴 했지만,

이젠 머릿속에 그 그림이 구체적으로 그려질 정도로 선명하고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으며,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요리사이자

너무나도 사소한 단서 하나로 추측에 추측을 거듭한 끝에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는

안락탐정 구도 데쓰야도 이젠 반가운 이웃집 남자처럼 여겨집니다.

더불어, 국적은 불분명하지만 모든 이를 행복하게 할 정도로 미각의 진수를 담고 있고,

도수 높은 맥주를 절로 생각나게 하는 구도 데쓰야만의 아기자기하고 특별한 레시피 역시

언제나처럼 책을 읽는 내내 침샘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다만 반딧불 언덕에서는 요리에 할애된 분량이 상당히 많아서 조금 거슬리기도 했네요^^)

 

수록작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주인공 중 가나리야를 처음 찾은 인물은 세 명입니다.

반딧불 언덕의 아리사카, ‘눈을 기다리는 사람의 난바라, ‘고켄의 다니자키가 그들인데,

그들은 하나 같이 처음 들른 가나리야에서 안락함과 오래된 단골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부지불식간에 구도나 다른 단골들에게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는 자신에게 놀랍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수수께끼나 의문에 대해 실은 이런 게 아닐까요?”라며

해답 또는 가려졌던 진실을 넌지시 건네는 구도를 보곤 더욱 크게 놀랍니다.

거듭된 놀람 끝에 가나리야 초보자들이 대체 그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었는지..”라고 물으면

누군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가나리야를 찾은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그 말을 입에 담아요.”

 

따뜻하든 가슴 아프든 하나 같이 잊히지 않는 추억을 마음에 담아두었던 사람들은

가나리야에서 보낸 소중한 시간들을 통해

상처를 치유 받고, 오해했던 진실을 깨닫고, 혐오했던 자신 또는 타인을 용서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어도

왠지 지금까지보다는 맑고 따뜻한 날들이 자신을 기다릴 것 같다는 안도감을 찾습니다.

세상을 떠난 연인의 비밀과 상처를 구도 덕분에 알게 된 반딧불 언덕의 주인공 아리사카는

뒤늦게 자책과 회한에 빠지지만 동시에 이제라도 그녀에게 사죄할 수 있음을,

, 그녀를 잊지 않고 영원히 추억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며 이런 말을 남깁니다.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사죄하는 일은 분명 괴롭지만,

동시에 달곰쌉쌀하다고 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 (‘반딧불 언덕)

 

역자의 말에 따르면 이제 가나리야 시리즈는 한 편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지막 작품의 제목은 - 앞선 시리즈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인 - ‘가나리야를 아십니까?’이며,

단골들이 총출동하여 가나리야에 얽힌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합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기대되는 것은 구도 본인의 베일 속에 숨은 이야기인데,

반딧불 언덕에 수록된 눈을 기다리는 사람에서

구도의 친구이자 바텐더인 가즈키가 구도에 관해 남긴 의미심장한 한마디는

시리즈 마지막 편에서 다뤄질 구도의 비밀과 추억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라는

제멋대로지만 조심스런 추측을 하게 만듭니다.

 

그 녀석(구도)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요. 아주 옛날부터.”

 

그럭저럭 10년이 넘은가나리야에서 구도가 기다려온 사람은 누구일지,

구도와 그()가 공유했던 추억과 상처는 무엇일지,

가나리야의 단골들은 구도를 위해 어떤 세리머니와 선물을 준비할지,

그리하여 구도는 어떤 모습으로 독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지,

한참 앞선 느낌이지만 궁금함과 기대, 그리고 아쉬움이 한꺼번에 밀려듭니다.

마지막 작품이라 손에 넣고도 아까운 마음에 쉽게 읽지 못할 것 같지만,

그래도 한시라도 빨리 출간되기를 바라는 것은 한없이 간사한 독자의 마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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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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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에 이어 읽고 있는 김재희 작가의 , 짓하다라는 작품을 보면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라는 좀 생소한 용어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극대화되어 돈을 횡령하고 사기를 치고 그러죠.

심지어 사회복지사, 은행원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대담한 성격에 양심의 가책이 없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사람입니다.

두려움 없고 집중력이 높다는 것도 그들의 특징이죠.

 

종이달의 주인공 우메자와 리카는 김재희 작가가 설명한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의 정의에 99% 가까운 인물입니다.

41살의 계약직 은행원으로 예금증서를 위조하여 고객 예금 1억 엔을 횡령했고,

그 돈으로 12살 연하의 연인과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으며,

횡령이 들통 날 위기에 처하자 태국으로 도피합니다.

 

액면만 보면 우메자와 리카는 가공할 금융 사기꾼이자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가 맞습니다.

하지만 동창, 친구, 옛 연인 등이 기억하는 리카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기억 속의 리카는 갓 쓰기 시작한 비누 같은 청초함과 정의감을 지닌 소녀,

욕심 없고 고상한 품위를 지닌 여자, 계산적이지 않고 따뜻한 사람으로 남아있습니다.

애초부터 금융 사기꾼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거나

한 순간의 실수로 삶을 망쳐버린 그녀에 대한 동정심을 호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 가쿠타 미츠요는 순도 99%의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 우메자와 리카보다는

가계에 보탬이 되고, 남아도는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시간제 은행원이 된

평범한 주부 우메자와 리카의 남은 1%를 묘사하는데 주력합니다.

얼마 안 되는 월급에 감사하고,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검소한 외식에 기뻐하던 그녀가

, 어떻게 파국의 길에 접어들게 됐는지를 담담하지만 지독할 만큼 현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돈에 지배당하는 인간들의 불행을 그려나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백미는 리카가 횡령한 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과 불륜에 빠지는 중반 이후보다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미세한 균열로 가득한 평범한 주부 리카의 일상이 묘사된 초반부입니다.

단편집 죽이러 갑니다에서도 경험했던 가쿠타 미츠요의 담담하지만 얼음장 같은 문장들은

불임과 우울로 인한 자괴감, 단절된 소통과 공공연한 무시 속에 위화감만 남은 부부관계,

어제와 똑같은 날을 답습하듯 사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 등

시한폭탄 같은 리카의 일상을 서늘한 느낌이 들 정도로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중산층 주부에 불과한 리카가 어느 날 갑자기 파국의 첫 걸음을 떼는 장면이

어색하지도, 작위적이지도 않게 보이는 것은 이런 탄탄한 기초공사덕분입니다.

 

자신의 수입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치스러운 삶이 확장되면서

리카는 고객의 예금증서를 위조하는 방식으로 횡령을 시작합니다.

사실, 이후의 이야기는 크게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전개를 보이지만,

파국의 끝을 향해 폭주하듯 달리는 리카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묘사한 작가의 필력 덕분에

독자는 한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습니다.

눈앞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그녀만의 현실을 만들어가며 새로운 리카로 변신하려는 욕망,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만능감(萬能感)을 죄책감 없이 만끽하게 되는 심리,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돌아갈 수 없다면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독려하면서도

한편으론 누군가 좀 알아차려줘라는 소리를 이명처럼 듣게 되는 불안감 등

두 가지 현실 속에서 허우적대는 리카의 심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 우메자와 리카 외에도 그녀와 인연을 맺었던 몇몇 조연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리카의 과거를 설명하는 역할뿐 아니라

돈에 지배당하는 불행을 몸소 겪는 역할도 함께 맡고 있습니다.

절약과 저축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강박관념처럼 돈의 노예가 된 사람,

과거의 부귀영화를 잊지 못해 현실의 곤궁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쇼핑중독에 빠져 이혼당했지만, 끝내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등

돈에 끌려 다니며 불행의 늪에 빠진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병행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돈을 소재로 삼은 사쿠라바 카즈키의 토막 난 시체의 밤

극단적인 캐릭터와 사건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킨 반면,

종이달은 현실적인 캐릭터와 상황들 때문에 시종 차분한 느낌을 주지만

그래서 더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로 읽혔던 것 같습니다.

옮긴이의 글에서도 이 점을 강조했는데, 인상적인 한 줄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칠까 합니다.

 

이 소설은 마치 꿈틀거리는 장어를 맨손으로 만지는 기분이었다. 무섭도록 생생하다.

  

사족으로..

중간중간 리카가 달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만으로는 제목 종이달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궁금하더라도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글 등을 통해 미리 그 의미를 알려고 하지 말고,

직접 이 작품을 다 읽은 후 옮긴이의 글에서 확인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특별한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작품을 읽은 뒤 그 의미를 알게 된다면

좀더 각별한 여운이 남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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