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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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에 이어 읽고 있는 김재희 작가의 , 짓하다라는 작품을 보면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라는 좀 생소한 용어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극대화되어 돈을 횡령하고 사기를 치고 그러죠.

심지어 사회복지사, 은행원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대담한 성격에 양심의 가책이 없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사람입니다.

두려움 없고 집중력이 높다는 것도 그들의 특징이죠.

 

종이달의 주인공 우메자와 리카는 김재희 작가가 설명한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의 정의에 99% 가까운 인물입니다.

41살의 계약직 은행원으로 예금증서를 위조하여 고객 예금 1억 엔을 횡령했고,

그 돈으로 12살 연하의 연인과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으며,

횡령이 들통 날 위기에 처하자 태국으로 도피합니다.

 

액면만 보면 우메자와 리카는 가공할 금융 사기꾼이자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가 맞습니다.

하지만 동창, 친구, 옛 연인 등이 기억하는 리카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기억 속의 리카는 갓 쓰기 시작한 비누 같은 청초함과 정의감을 지닌 소녀,

욕심 없고 고상한 품위를 지닌 여자, 계산적이지 않고 따뜻한 사람으로 남아있습니다.

애초부터 금융 사기꾼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거나

한 순간의 실수로 삶을 망쳐버린 그녀에 대한 동정심을 호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 가쿠타 미츠요는 순도 99%의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 우메자와 리카보다는

가계에 보탬이 되고, 남아도는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시간제 은행원이 된

평범한 주부 우메자와 리카의 남은 1%를 묘사하는데 주력합니다.

얼마 안 되는 월급에 감사하고,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검소한 외식에 기뻐하던 그녀가

, 어떻게 파국의 길에 접어들게 됐는지를 담담하지만 지독할 만큼 현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돈에 지배당하는 인간들의 불행을 그려나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백미는 리카가 횡령한 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과 불륜에 빠지는 중반 이후보다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미세한 균열로 가득한 평범한 주부 리카의 일상이 묘사된 초반부입니다.

단편집 죽이러 갑니다에서도 경험했던 가쿠타 미츠요의 담담하지만 얼음장 같은 문장들은

불임과 우울로 인한 자괴감, 단절된 소통과 공공연한 무시 속에 위화감만 남은 부부관계,

어제와 똑같은 날을 답습하듯 사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 등

시한폭탄 같은 리카의 일상을 서늘한 느낌이 들 정도로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중산층 주부에 불과한 리카가 어느 날 갑자기 파국의 첫 걸음을 떼는 장면이

어색하지도, 작위적이지도 않게 보이는 것은 이런 탄탄한 기초공사덕분입니다.

 

자신의 수입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치스러운 삶이 확장되면서

리카는 고객의 예금증서를 위조하는 방식으로 횡령을 시작합니다.

사실, 이후의 이야기는 크게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전개를 보이지만,

파국의 끝을 향해 폭주하듯 달리는 리카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묘사한 작가의 필력 덕분에

독자는 한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습니다.

눈앞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그녀만의 현실을 만들어가며 새로운 리카로 변신하려는 욕망,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만능감(萬能感)을 죄책감 없이 만끽하게 되는 심리,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돌아갈 수 없다면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독려하면서도

한편으론 누군가 좀 알아차려줘라는 소리를 이명처럼 듣게 되는 불안감 등

두 가지 현실 속에서 허우적대는 리카의 심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 우메자와 리카 외에도 그녀와 인연을 맺었던 몇몇 조연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리카의 과거를 설명하는 역할뿐 아니라

돈에 지배당하는 불행을 몸소 겪는 역할도 함께 맡고 있습니다.

절약과 저축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강박관념처럼 돈의 노예가 된 사람,

과거의 부귀영화를 잊지 못해 현실의 곤궁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쇼핑중독에 빠져 이혼당했지만, 끝내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등

돈에 끌려 다니며 불행의 늪에 빠진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병행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돈을 소재로 삼은 사쿠라바 카즈키의 토막 난 시체의 밤

극단적인 캐릭터와 사건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킨 반면,

종이달은 현실적인 캐릭터와 상황들 때문에 시종 차분한 느낌을 주지만

그래서 더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로 읽혔던 것 같습니다.

옮긴이의 글에서도 이 점을 강조했는데, 인상적인 한 줄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칠까 합니다.

 

이 소설은 마치 꿈틀거리는 장어를 맨손으로 만지는 기분이었다. 무섭도록 생생하다.

  

사족으로..

중간중간 리카가 달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만으로는 제목 종이달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궁금하더라도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글 등을 통해 미리 그 의미를 알려고 하지 말고,

직접 이 작품을 다 읽은 후 옮긴이의 글에서 확인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특별한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작품을 읽은 뒤 그 의미를 알게 된다면

좀더 각별한 여운이 남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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