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당 - 괴담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3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 세 번째이자 대미를 장식한 작품입니다.

동시에 출간된 사관장이 햐쿠미(百巳) 가의 죽음의 의례인 장송백의례(葬送百儀礼)

당집 백사당(百蛇堂)에서 겪은 다쓰미 미노부라는 남자의 기이한 공포 경험담이라면,

백사당은 주인공 미쓰다 신조와 그의 동료들이 다쓰미 미노부의 기록,

사관장을 읽은 후에 겪게 되는 끔찍하고 기괴한 현상들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작자 미상에서 미궁초자라는 호러단편집을 읽은 사람들이

작품 속의 기이한 현상을 직접 겪게 되거나 심지어 감쪽같이 행방불명됐던 것과 마찬가지로,

백사당에서는 다쓰미 미노부의 기록을 읽은 미쓰다 신조와 그의 동료들이

느닷없거나 어이없거나 모호하기 짝이 없는 현상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 ● ●

 

다쓰미 미노부의 사관장을 읽은 미쓰다 신조는 괴담 편집자로서 호기심을 갖게 되고,

신이치로, 고스케 등 괴담 전문가인 친구들에게 읽어볼 것을 권합니다.

자료를 조사하던 중 햐쿠미 가가 위치한 나라 현 다우 군에서

수년 전부터 연이어 아이들이 실종된 사건에 주목한 미쓰다 신조는

다쓰미의 기록과 햐쿠미 가의 당집 백사당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사관장을 읽은 동료가 실종되는가 하면, 다쓰미는 책의 출간을 거부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채 교토까지 다쓰미를 찾아간 미쓰다 신조는

직접 목격하고도 믿을 수 없는 기괴한 현상들 때문에 극도의 공포에 빠지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쓰다 신조는 햐쿠미 가의 당집 백사당에 가보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백사당에 다가갈수록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가 하면,

햐쿠미 가를 둘러싼 사악하고 음산한 분위기는 물론

혼이 빠져나간 시신을 차지한 마물 마모우돈의 악의에 찬 기운을 몸소 겪게 됩니다.

 

● ● ●

 

사관장이 아무 것도 해결하지 않은 채 괴이한 현상들 그 자체만을 열거해놓았다면,

백사당은 그 현상들의 이면과 사연을 찾아가는 미스터리를 겸비하고 있습니다.

미쓰다 신조가 햐쿠미 가의 백사당에 호기심을 갖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인데,

하나는 괴담 편집자라면 누구나 매력을 느낄 만한 햐쿠미 가의 장송백의례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백사당에서 벌어진 두 번의 밀실 미스터리와 아이들의 실종 사건 때문입니다.

작가는 괴담과 미스터리라는 두 가지 테마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끔

교묘히 섞어놓으면서 동시에 독자의 공포심이 극대화되도록 풀어놓습니다.

 

(괴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냐를 따져봤자 부질없지 않을까.

어쩌면 그 사람은 진짜로 그런 무서운 현상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단순하게 무서워하는 것이 괴담을 즐기는 올바른 자세 아닐까.

허나 이 원고(사관장)처럼 진한 맛을 내는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그 이야기의 진상을 실제로 확인하고 싶다는 호기심이 고개를 쑥 쳐든다.

 

작자 미상에서도 미궁초자라는 단편 괴담집을 읽은 미쓰다 신조와 신이치로가

괴담 속의 기이한 현상을 직접 체험하게 되는 공포를 맛보지만,

괴담의 수수께끼를 풀면 가까스로 그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탈출구가 있었던 셈인데, ‘백사당은 그런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수수께끼는 절대 풀리지 않고, 풀려고 하는 자에게는 끔찍한 응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느껴지는가 하면,

다쓰미가 기록한 사관장속의 장면들이 밤마다 악몽으로 떠오릅니다.

오히려 도망치려 할수록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끌려 들어가는 불행을 맛보게 됩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마물의 존재,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산과 숲,

뱀을 뜻하는 한자를 품은 수많은 지명들, 피부에 와 닿는 듯한 끈적이는 어둠 등

명백히 비현실적이고 환상에 다름 아닌 괴담 코드들로 가득 차 있지만,

백사당은 밀실 미스터리, 실종 사건,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비극 등을 빈틈없이 버무림으로써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읽는 듯한 사실적인 느낌까지 온전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가 괴담과 전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이성적인 엔딩을 끌어냈고,

노조키메사관장이 괴담 그 자체를 서술해놓은 작품이라면,

백사당은 모든 것이 믹스된, 그러면서도 결코 친절하거나 깔끔한 엔딩이 아닌,

말 그대로 괴담의 여운을 진하게 남겨놓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중반의 전개 부분이나 후반부에 밝혀지는 여러 가지 진상 가운데

일부는 , 이게 뭐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서술 자체가 모호하게 돼있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일반 미스터리나 스릴러처럼 빠른 속도로 읽은 탓에

앞서 등장한 상황이나 대화에서 제시된 결정적인 단서들을 놓쳤기 때문인 경우도 있습니다.

아직 사관장백사당을 안 읽은 분이라면 천천히 정독할 것을 권하고 싶고,

(저 역시 그럴 계획이지만) 이미 읽은 분이라면 기회가 될 때 재독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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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장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3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햐쿠미(百巳) 집안의 장손이지만 밖에서 태어난 첩의 자식의 신분인 다쓰미 미노부는

5살이 되던 해 여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햐쿠미 가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햐쿠미 가의 독특한 죽음의 의례인 장송백의례(葬送百儀礼)를 거듭 겪으면서

명백히 비현실적이지만 피부에 와 닿는 것처럼 생생한 공포의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유일하게 자신을 따뜻이 대해주는 다미 할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찬 신당 백사당(百蛇堂)과 도도야마() 산을 찾은

어둠 속을 기어 다니는 듯한 그것과 마주치곤 혼절에 혼절을 거듭합니다.

 

쫓겨나듯 햐쿠미 가를 떠나 30대의 나이에 이른

또다시 죽음의 의례를 치르기 위해 햐쿠미 가의 백사당을 찾게 됩니다.

구경꾼에 불과했던 유년기와 달리 의례를 주관하는 장손의 자격으로 백사당에 들어간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 녹아있던 생생한 그것의 공포를 경험하면서

잊은 줄 알았지만 실은 억눌려 있을 뿐이던 유년의 끔직한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 ● ●

 

출간 소식만 들었을 때는 제목의 을 당연히 특정 건물을 가리키는 으로 생각했습니다.

사관장이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괴이한 이야기라고 멋대로 추측했지만,

정작 표지에 인쇄된 장례의 을 보곤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그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2014년에 발간된 미쓰다 신조의 노조키메에서 비교적 상세히 묘사됐던

저주받은 사야오토시 가문의 특이하고 기분 나쁜 장례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실제로 곳곳에서 노조키메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데,

장례 장면은 물론, 공포의 기운을 내뿜는 인근의 산, 비탈진 곳에 자리 잡은 가문의 묘지,

범접해선 안 되는 건물과 그 안에 모셔진(또는 숨겨진) 기이한 그것

유사한 설정과 코드들이 사관장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조키메가 호러와 미스터리를 융합하는 듯 하면서도

결국엔 설명되지 않는 것은 억지로 설명할 필요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식의 논리를 폈다면

사관장은 애초에 미스터리라는 포장을 배제한 채

죽음과 관련된 설명 불가능한 수많은 현상들을 소름 끼칠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햐쿠미 가의 죽음의 의례인 장송백의례에 깃든 공포담이랄까요?

작품 제목에 이 들어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후속편인 백사당에서 작가 시리즈의 주인공 미쓰다 신조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백사당에서는 미스터리 코드가 끼어들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보지만,

어쨌든 사관장호러 그 자체라는 말 외엔 달리 어울리는 수식어가 없는 작품이며,

미쓰다 신조 식 괴담 서사의 진수라고 감히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비밀의 폭로, 연이은 반전, 트릭의 해체 등 깔끔한 미스터리 엔딩을 기대한 독자들에겐

기괴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묘사들로 가득 찬 사관장읽기가 불편할 수도 있지만,

죽음의 의례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인간 본연의 공포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도전해볼 만한 작품이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아직 읽진 않았지만) 본격적인 작가 시리즈의 이야기가 전개될 백사당에서는

작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작자 미상의 엔딩만큼 강렬한 여운이 느껴지기를,

또 약간이나마 미쓰다 신조 식 미스터리 설정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햐쿠미 가문의 과거사, 장송백의례와 백사당의 유래 또는 비밀, 다미 할멈의 정체,

, 애너그램 같은 두 작품의 화자의 이름 (사관장=다쓰미 미노부, 백사당=미쓰다 신조)

작가가 사관장곳곳에 흘려놓은 떡밥(?)들을 보면

궁금증을 자아냈던 수많은 정황들이 백사당에서는 그 정체를 드러내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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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머신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박재현 옮김 / 반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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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솔직히 노리즈키 린타로는 킹을 찾아라한 권밖에 읽어보지 못했지만,

녹스머신은 앞서 읽은 작품과 같은 작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간극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SF물을 멀리 하는 편은 아니지만,

과학이 서사의 중심에 있는 작품은 아무래도 가까이 하기가 좀 힘들었는데,

녹스머신은 말 그대로 Scientific Fiction의 정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라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체감 독서시간은 꽤 길었던 것 같습니다.

 

평행이론과 타임 패러독스를 다룬 표제작 녹스머신과 후속편 격인 논리 증발

양자 역학 같은 먼 나라의 개념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해서 정말 많이 난감했지만,

그래도 바탕에 깔린 메인 스토리나 정서 자체가 공감 가능하게 펼쳐진 덕분에

재미와 호기심을 갖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탈출을 테마로 한 바벨의 감옥은 기본적으로 일본어의 특징을 기반으로 한

특이한 서술 미스터리(?)라 그런지 다 읽고도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분의 친절한 서평을 보니 , 그런 거였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피해, 왜 탈출하려는지 결국엔 이해불가의 영역에 남아버렸습니다.

 

그나마 편하게 읽힌 들러리 클럽의 음모은 너무나 유명한 고전 탐정들의 조수들이 등장하여

클럽의 공공의 적 애거서 크리스티와의 한판을 놓고 논리와 자존심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인데

기획의 신선함에 비해 마무리가 아쉬웠던 작품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인터넷 카페에서 이 작품의 서평단을 모집한 적이 있는데,

대략의 소개글을 보곤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응모 자체를 포기했습니다.

기회가 돼서 책을 구해 읽어보곤 응모 안 하기를 정말 잘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가 신인도 아니고, SF물로서의 미덕 또한 분명 있긴 있는데

그것을 이해 못한 독자가 어설픈 서평을 올리는 건 출판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작품이 일본의 주간문춘 미스터리’, ‘본격미스터리’,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등에서

나름 권위 있는 기록을 세운 것을 봐도 그렇고,

국내 인터넷 서점에서 평균 4개 이상의 별을 받은 결과를 봐도 그렇고,

분명 환호하고 깊이 빠져들 독자층이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지만,

학창 시절 내내 과학 수업이 든 날이면 아침부터 스트레스를 받던 저 같은 독자에겐

작품의 진가를 발견하기도 전에 답답함과 자기연민이 먼저 찾아올 것 같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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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 제56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요코제키 다이 지음, 이수미 옮김 / 살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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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의 왕복서간이나 톰 프랭클린의 미시시피 미시시피처럼

10대 시절 이후 오랫동안 봉인해온 비밀이 어느 날 갑자기 해제되면서

과거의 아픈 상처현재의 사건이 교차되듯 전개되는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낄 수 있어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장르입니다.

8수 끝에 에도가와 란포 상을 받은 요코제키 다이의 재회

중고 신인의 작품이긴 해도 그런 맥락에서 짧은 소개글만으로도 무척 기대가 됐던 작품이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이상의 만족스러운 책읽기를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 ● ●

 

냉정한 리더 게스케, 철부지 나오토, 개구쟁이 준이치, 말괄량이 마키코는

초등학생 시절이던 23년 전, 똘똘 뭉쳐 다니던 4총사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을 찾아온 예기치 않은 사고와 불행 탓에

그들은 각자 모양새가 다른 공포와 트라우마를 끌어안게 됐습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기 위해 기약 없는 타임캡슐 안에 그날의 흔적들을 담고 봉인했지만,

결국 4총사는 차례로 마을을 떠나면서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게스케와 마키코는 이후 다시 만나 결혼에 골인했지만 지금은 이혼한 상태입니다.

준이치는 경찰이 되어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나오토는 가업을 물려받았지만 개망나니 이복형 히데유키 때문에 골치가 아픈 상태입니다.

 

운명은 4총사를 23년 만에 다시 재회하게 만드는데,

그 계기는 나오토의 이복형 히데유키가 피살된 사건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사건의 열쇠가 23년 전 4총사가 겪은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날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지만,

수사의 향방은 결국 봉인됐던 4총사의 23년 전 기억을 무자비하게 열어젖힙니다.

 

● ● ●

 

사실 이 작품은 인터넷 소개글처럼

굉장한 트릭이 숨어 있지도 않고, 유혈이 낭자하는 사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독자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4총사의 과거와 현재에 던져진 두 가지 물음 때문입니다.

 

“23년 전, 그들은 무엇을 보았고,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지금,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것과 동시에

3인칭 시점이긴 하지만, 4명의 인물이 번갈아 화자 역할을 맡게끔 구성돼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와 현재에 던져진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마치 양파 껍질 벗겨지듯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두 개의 시제, 네 개의 시선 등 복잡한 서술 속에서

흩어져있던 퍼즐 조각들이 천천히 한 곳을 향해 모여들다가

결국 후반부에 이르러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4총사는 완성된 큰 그림을 보는 순간 충격에 빠집니다.

같은 그림이었지만 4총사는 제각각 다른 형테와 색깔로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겪은 불행이었지만, 각자의 마음속엔 전혀 다른 트라우마가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4총사를 지켜보는 독자의 마음은 내내 착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때, 그들이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때, 운명이란 것이 그들에게 조금만 덜 가혹했더라면, 이라는

부질없는 회한이 4총사 못잖게 독자의 마음에 피어오릅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과거와 현재에 던져진 두 가지 물음에 대한 해답이 드러난 후에도

결코 착잡함과 부질없는 회한은 가시지 않습니다.

아무도 보상해줄 수 없는 그들의 지난 시간들, 기억들, 상처들이 안쓰럽고 애틋할 뿐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적절한 수의 인물과 에피소드를 배치한 덕분에

빠른 독자들은 한나절이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

웬만하면 수상작을 결정한 심사 위원, 즉 기성 작가들의 과찬을 잘 믿지 않는 편인데,

재회에 관한 한은 히가시노 게이고, 덴도 아라타, 온다 리쿠의 칭찬 릴레이가

결코 과장되거나 작위적인 홍보용 멘트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란포 상 결선에 올랐던 작가의 이력으로 볼 때

조만간 새로운 작품의 출간을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새로운 미스터리 작가와의 기분 좋은 만남이 반갑게 느껴진 책읽기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퍼즐을 모으고 끼워 맞추는 역할은 가나가와 현경에서 파견된 특별한 형사 나라가 맡았는데,

팀플레이 대신 독립군노릇을 허락받을 정도로 뛰어난 추리를 자랑하는 캐릭터입니다.

그 역시 마지막 반전에서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데,

작가 요코제키 다이가 수상작가의 입지를 넘어 두드러진 활약을 하게 될 날이 온다면

시리즈물의 주인공으로 삼을 수도 있을 만큼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이 작품의 완성도만 놓고 본다면,

요코제키 다이의 나라 시리즈를 기대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일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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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일
히라야마 유메아키 지음, 윤덕주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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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단편집을 통해 처음 만났던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호러는 여느 작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잔인하고 섬뜩한 묘사로 가득 찬 작품들을 읽으면서

인간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듯한 작가의 뇌 구조가 궁금해질 정도였습니다.

 

표지 자체부터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남의 일유니버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수록작마다 피와 살점이 튀고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인 작품입니다.

특히 유니버설~’이 말하는 지도라든가 사체를 처리하는 기이한 존재 등

비현실적이거나 SF적인 설정을 종종 엿볼 수 있었던 반면,

남의 일15편의 수록작 가운데 위안 로봇의 반란을 다룬 크레이지 하니를 제외하곤

하나 같이 일상 속에서, 내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엽기적인 상황들을 다루고 있어

읽는 내내 놀라움과 역겨움, 불편함과 호기심이 번갈아 진동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쇠톱으로 자신의 다리를 자르고, 칼과 전동톱으로 가족을 살해하는가 하면,

상처가 썩어 팔다리가 뽑힌 채 죽거나, 하찮은 이유로 죽을 때까지 몰매를 맞기도 합니다.

그밖에도 인육, 납치, 토막 살인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혹함을 목격할 수 있는데,

독자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은 이런 끔찍한 소재들이 모여 만들어진 서사가

너무도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스토리 속에 녹아있다는 점입니다.

증오심과 공포만 남은 가족들의 이야기 (남의 일, 자식해체, 딱 한 입에, 어머니와 톱니바퀴),

오로지 재미를 위한 살인과 폭력 (새끼 고양이와 천연가스, 정년 기일, 인간실격)

이즈음 들어 심심찮게 인터넷이나 미디어를 통해 볼 수 있는 엽기적인 현상들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생생하고 집요하게 묘사되어 있다 보니

말 그대로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처럼 느껴지는 공포감이 고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딱히 엔딩이라 할 만한 대목 없이 그저 툭, 하고 끝나곤 합니다.

독자는 아직도 긴장감과 흥분에 사로잡혀 한껏 고조돼있는데

작가는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주지 않고 느닷없이 막을 내려버리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둘 중 한가지입니다.

가라앉지 않은 흥분과 공포심이 전해주는 여운이거나

마치 씻기지 않을 그 무엇이 몸에 묻기라도 한 것 같은 불쾌감이거나...

이 서평 때문에 히라야마 유메아키를 일부러 찾아 읽는 독자도 있겠지만,

반대로 히라야마 유메아키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히라야마 유메아키 만큼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의 작품을 쾌감을 느끼며 읽는 독자는 아니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를 통해 불쾌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끼고 싶은 욕망은 관음증과 비슷해서

본능처럼 자꾸만 기웃거리거나 찾아 읽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히라야마 유메아키는 저건 아무리 무서워도 픽션이야라는 심리적 안전판을 부수고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는 일상의 공포를 강조함으로써

독자들의 본능을 더욱 강하게 자극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내에는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남의 일두 권만 출간됐지만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맛볼 수 있는 단편들이 계속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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