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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땅

김명인


이몸으로 나도
절름거리며 가야 한다, 돌부리에 엎어지며
피 흘릴 사랑 없어 갈 길 더욱 아득하고
막막하구나, 하루의 끝은
며칠이고 거듭 웅크려 바라보는 이곳의 바다.

문을 열면 눈 높이에 매달리는 어등도 물거품도
소리 죽여 차가와지는 시간 가까이
보고 싶다, 친구여 보고 싶다, 너의 목소리 떨려도
어느 한 발짝 예서 더 나아갈 수 없는
발 밑에선 네 사랑도 돌아와 파도 깨어진다.

얼어붙은 땅 눈물 비벼 입맞추거든
끌려가리, 따라가진 말고.
지워 버린 뜬 별에도 그리움 몇 개 끌려서
가슴에 품은 칼이 제 살에 아픔이 되는
비비고 또 보는 어둠 속엔 입다문 남자들 몇 명.

흔적은, 꿈꾸지 말아다오.
소름에도 돋는 물방울로 타는 목 축이면서
내 칼 끝 더듬어 내렸던 세상,
더러운 사무침에도 이 미친 몸부림 끝없어
뜨거운 피 더 흘려도 헛된 고향길.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도 고향이 그립다. 단성사와 종각을 사이로 좁은 골목 사이에 있던 증조 할아버지 기와집. 작은 마당에 복순이는 꼬리치고 한쪽 분수에선 금붕어 몇마리 헤엄치고 있던 어린시절의 신창동 집. 사춘기를 보낸 창동 연립주택도. 그리운 건 그것들이 아니라 그 속을 통과했던 시간과 나 자신이지.

어제 읽은 로쟈의 '니체'의 초인이야기와 도킨스의 '무덤덤한 자연'이란 언급이 이 시와 더불어 울린다. 우리의 소임이란 그저 역사라는 전쟁의 총알받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중에 읽어서 더 그런가 보다. 우리는 그저 교량일 뿐이라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저 이것과 저것을 잇는 '다리' 일 뿐이라는.

사실 오늘 아침 이 시를 읽은 건, 이 대목 때문이었다.

"문을 열면 눈 높이에 매달리는 어등도 물거품도 / 소리 죽여 차가와지는 시간 가까이 / 보고 싶다, 친구여 보고 싶다, 너의 목소리 떨려도 / 어느 한 발짝 예서 더 나아갈 수 없는 / 발 밑에선 네 사랑도 돌아와 파도 깨어진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있는 친구가 곁에 없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있는 엄마가 더이상 이세상에 없기 때문이었을 거다.

난 아무래도 '먹고자고싸고'로 만족하는 초인은 될 수 없는가 보다. '목적 없는 삶'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도대체 뭔가..'를 이 나이 이 상황에서 계속 생각하는 자신을 지켜보는 건 정말 짜증나는 일이다. 죽을 때까지 계속 외로울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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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3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2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3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근황


아이 하나 낳고
웅큼 머리카락 빠져 나갔다
아이 또 하나 낳고
웅큼 웅큼 머리카락 빠져
온데로 흩어진다
발을 옮길 때마다
손이 머리에 닿을 때마다
옷을 벗고 입을 때
머리를 숙이고 울거나
머리를 젖히고 웃을 때에도
머리카락은 신이나게 달아난다
아이 둘 낳기 전
아이 하나 낳기 전
내가 사랑에 빠지기 전
튼실하게 붙어있던 머리칼처럼
탱탱하던
꿈도 더불어



육십이 훨씬 넘으신 김선생님 화장실에 시집이 있었다. 여류시인의 것이었는데 내 나쁜 머리가 기억을 못한다. "시집이 있네요... 화장실에.."라고 말했더니 "내가 시를 좋아해. 한 30년 넘게 시도 써오고..." 하셨다. 미국에 와서 이런분을 만나다니 퍼뜩 반가웠다. 후루룩 다가가고픈 마음이 솟아 올랐지만 그분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란 되새김이 나를 자제 시켰다. 육년차에 접어드는 미국생활 부작용이다. 간혹 오늘처럼 현재 감성 지수가 떡이란 게 분명한 날은 "언제라도 차마시러 놀러와..." 하셨던 그분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힌다. 곱게 싸인 흰눈 사이를 가로질러 지금이라도 그분과 수다를 떨러 가고 싶다.

둘째 아이를 낳았을때 내 우울증 수치는 최고였지 싶다. 수치가 최고가 아니었을 때라고 호락 호락 했던건 결코 아니지만. 세상 모든 일이 내 우울증을 북돋기 위해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끄적였던 시다. 올해 하기로 한 일을 정리할 공책을 찾고 있는 중에, 대학때와 짧은 기자시절 인터뷰 취재용으로 쓰던 두툼한 탈색된 공책이 눈에 띄었다. 그걸 펼치니 반도 다 쓰지 못한 그 공책 중간 쯤엔 가뭄에 단비처럼 만들었던 시들이 모아져 있었다. 초고 상태로. 문득 그 시절이 다시 떠오른다. 오늘의 내가 그때의 나와 별 다르지 않으니 그 이후로 십년에 가까운 나이를 더 먹었어도 이모양인가 다시 우울한 한숨만 더할 판이다.

꿈이 다 떠나간다고 생각한 게 십년전인데 지금도 나는 그 꿈의 꼬리를 놓지 못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슬프다. 답은 없고 겨우 아는 건 내가 동물과 신 사이에 위치한 인간이라는 것 뿐. 영혼이 외롭다는 건 이런 사실들이 한꺼번에 자각될때고 내 영혼을 닮은 친구가 그립다는 건 내가 꿈에서 멀어졌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함께 시를 읽던 친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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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나 비가 오는 게 고맙고 감사한 건 누구에게나 평등해서가 아닐까. 우리 사는 세상에서 땅은 불평등하게 갈라졌대도 이적 하늘만은 고맙고 감사한 게 나의 부족함으로 잘라낸 인연이 살아가는 머리 위에도 똑같이 있어 주기 때문인 것처럼. 한국에 폭설이 왔다고 사람들은 상기된 인사를 나누고, 적막한 미시건 시골 한구석엔 오늘 몫의 새 눈이 헌 눈 위를 덮는다.

내 뜻에 관계없이 배달되온 시집들을 펼친다. 책이 무슨 죄랴 웅얼거리며. 시집을 보낸 건 절단된 우리 인연을 아주 부인하지 않는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리 여기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거란 또 다시 상처주는 일 외엔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난 상처는 그 상처가 온전히 새살로 뒤덮힐 때까지는 뭐가 닿아도 쓰리기만 할 뿐이다. '폐차를 하면서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는 제목이 좋아 읽었다.


페차를 하며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

최명란

이십 년 넘게 몰던 차를 폐차한다
그를 폐차장에 버리고 돌아서자 비가 내린다
한 음 내리지 않으면 부를 수 없는 노래처럼
끼익끼익 있는 대로 음을 높여 소리 지르기도 하고
가래 걸린 목구멍처럼 꺼억꺼억 숨이 차오르기도 하는 그를
그래도 사랑하는 일은 폐차장에 버리고 돌아서는 일이다
물론 그는 내게 올 때부터 중고였으므로 굳이
가책의 눈물 따위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걸핏하면 시동을 꺼뜨리는 횡포를 일삼았고
잘 나가다가도 길 한가운데서 넙죽 퍼져버리기 예사여서
정비공장 뿌연 불빛 아래 선 채로 밤을 새우게 했던 그였으므로
굳이 그와 함께 평생 고속도로를 달릴 수는 없다
비를 맞으며 위반한
속도위반 신호위반 주차위반으로 밀린 과태료가 백만원이다
사회의 동의 없이 숨어서 지은 내 죄값이 고작 백만 원이라니
이십 년 저지른 그 많은 위반의 죄값치고는 제법 싸다
폐차장에 그를 버리고 비를 맞으며 돌아서는 길
납작하게 눌린 쥐포처럼 한 장 뼈만 남기고 간 그에게서 비로소
냉담히 맞서다가 뜨겁게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


"잘 나가다가도 길 한가운데서 넙죽 퍼져버리기 예사여서 / 정비공장 뿌연 불빛 아래 선 채로 밤을 새우게 했던 그였으므로 / 굳이 그와 함께 평생 고속도로를 달릴 수는 없다"

매몰차게 비수를 휘두르던 나의 마음이 그랬지 싶다. 그 인연을 잇고 또 이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상처는 더 깊어져 우리의 팔이나 다리를 잘라내야 했지 않았을까.

어쨋든, 나는 평생 이어질꺼라 생각한 인연 하나를 모질게 잘라 내면서 "냉담히 맞서다가 뜨겁게 쓰러"졌더랬다. 하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가 없고 듣지 못하는 것은 느낄 수도 없다. 내가 어떻게 쓰러졌는지 그 사람은 알 수 없었을테고 그저 난 독선적이고 무자비한 사람이었을 뿐일테다.

이런 저런 생각이 일어나는 건 막을 수 없어 그냥 두지만 그 어떤 생각 속에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계속 쓰러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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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ing in the Rain (1952)
진 켈리 (Gene Kelly) 감독
진 켈리 (Gene Kelly), 도널드 오커너 (Donald O'Conner), 데비 레이널스 (Debbie Reynolds)





"Talking Picture."

1920년대 말, 무성영화 시대 유성영화가 등장 했을 때, 사람들이 불렀던 그 매체의 이름이다.

"It will be just a toy..."

무성영화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배우들은 새로운 유성영화의 시대를 저평가 했다.

무대에서 풍성하던 미국의 뮤지컬이 영화와 방송으로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제 세상을 만났다.

유년 시절, 나에게 음악적 예술적 즐거움을 주었던 수많은 TV 명화극장작들 중 하나.

수십년이 지나 (!) 다시 보는 이 영화.
미국인들은 정말 "silly (아무 생각없이 웃기기만 하는)" 하다는 생각. 바보같고 멍청하게 보일만큼.
그런데, 가끔은 그 끝없는 낙천성과 순진무구한 행동에 헛웃음이 나오고 만다.

무성영화에서 화려했던 여배우는 말하는 연기도, 노래도, 춤도 추지 못하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She can't act, she can't sing, she can't dance. Triple threats!"

그 웃음 속에서 <Singing in the Rain> 은 무성영화 속의 사람들이 어떻게 유성영화의 시대에 적응하고, 또는 떨어져 나가고, 또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코메디의 연속 속에서. 그리고,
음악과 춤의 '바보스러움 (silliness)' 을 맘껏 활용하고 즐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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