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나 비가 오는 게 고맙고 감사한 건 누구에게나 평등해서가 아닐까. 우리 사는 세상에서 땅은 불평등하게 갈라졌대도 이적 하늘만은 고맙고 감사한 게 나의 부족함으로 잘라낸 인연이 살아가는 머리 위에도 똑같이 있어 주기 때문인 것처럼. 한국에 폭설이 왔다고 사람들은 상기된 인사를 나누고, 적막한 미시건 시골 한구석엔 오늘 몫의 새 눈이 헌 눈 위를 덮는다.

내 뜻에 관계없이 배달되온 시집들을 펼친다. 책이 무슨 죄랴 웅얼거리며. 시집을 보낸 건 절단된 우리 인연을 아주 부인하지 않는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리 여기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거란 또 다시 상처주는 일 외엔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난 상처는 그 상처가 온전히 새살로 뒤덮힐 때까지는 뭐가 닿아도 쓰리기만 할 뿐이다. '폐차를 하면서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는 제목이 좋아 읽었다.


페차를 하며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

최명란

이십 년 넘게 몰던 차를 폐차한다
그를 폐차장에 버리고 돌아서자 비가 내린다
한 음 내리지 않으면 부를 수 없는 노래처럼
끼익끼익 있는 대로 음을 높여 소리 지르기도 하고
가래 걸린 목구멍처럼 꺼억꺼억 숨이 차오르기도 하는 그를
그래도 사랑하는 일은 폐차장에 버리고 돌아서는 일이다
물론 그는 내게 올 때부터 중고였으므로 굳이
가책의 눈물 따위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걸핏하면 시동을 꺼뜨리는 횡포를 일삼았고
잘 나가다가도 길 한가운데서 넙죽 퍼져버리기 예사여서
정비공장 뿌연 불빛 아래 선 채로 밤을 새우게 했던 그였으므로
굳이 그와 함께 평생 고속도로를 달릴 수는 없다
비를 맞으며 위반한
속도위반 신호위반 주차위반으로 밀린 과태료가 백만원이다
사회의 동의 없이 숨어서 지은 내 죄값이 고작 백만 원이라니
이십 년 저지른 그 많은 위반의 죄값치고는 제법 싸다
폐차장에 그를 버리고 비를 맞으며 돌아서는 길
납작하게 눌린 쥐포처럼 한 장 뼈만 남기고 간 그에게서 비로소
냉담히 맞서다가 뜨겁게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


"잘 나가다가도 길 한가운데서 넙죽 퍼져버리기 예사여서 / 정비공장 뿌연 불빛 아래 선 채로 밤을 새우게 했던 그였으므로 / 굳이 그와 함께 평생 고속도로를 달릴 수는 없다"

매몰차게 비수를 휘두르던 나의 마음이 그랬지 싶다. 그 인연을 잇고 또 이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상처는 더 깊어져 우리의 팔이나 다리를 잘라내야 했지 않았을까.

어쨋든, 나는 평생 이어질꺼라 생각한 인연 하나를 모질게 잘라 내면서 "냉담히 맞서다가 뜨겁게 쓰러"졌더랬다. 하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가 없고 듣지 못하는 것은 느낄 수도 없다. 내가 어떻게 쓰러졌는지 그 사람은 알 수 없었을테고 그저 난 독선적이고 무자비한 사람이었을 뿐일테다.

이런 저런 생각이 일어나는 건 막을 수 없어 그냥 두지만 그 어떤 생각 속에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계속 쓰러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할 밖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