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뒤돌아 보면



뒤돌아 보면 후회뿐인 것을
그땐 아니라고 했다
날은 궂고
벗은 멀리에

봄이라고 나선 수선화도
지난 추억에 빠져든듯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드물게 창으로 든 햇살이 비추어낸
수없는 먼지의 잔해들처럼
지난날에 대한 그 많은 후회도
생을 관통하는 사랑으로 하여
이렇게 짙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상하리만치
봄날이 궂고
벗들은 먼길로 떠난다

뒤돌아 보면 사랑뿐이었던 것을
그때는 한사코
아니라고만 했다

5. 18. 2010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느린산책 2010-05-2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지 모르지만 그냥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여운이 있네요..

꼼미 2010-06-09 01:17   좋아요 0 | URL
여운이 있었다니 고맙...^^

2012-01-18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창래의 소설 <Aloft> 의 주인공 제롬은 쉰아홉살 미국 남자다. 그는 여자친구를 걸고 필사의 테니스 시합을 제안한 연적 앞에 선 자신을 이렇게 생각한다.


"this fifty-nine-year-old idiot...killing himself on the court"

(오십 아홉의 바보같은 자식, 테니스 코트에서 죽으려고 작정한...)


제롬의 여자친구가 보기에도 이 두 남자의 테니스 시합은 철부지 소년들이나 벌일 충동적 기싸움에 불과했다. 그걸 제롬 스스로도 모르는 바 아니었겠지만, 그의 소년적 감성(또는 감정)이 그의 물리적 나이를 지배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물리적 나이와 감성적 나이의 관계는 어떤걸까. 아직 채 스물이 못된 마일스란 청년에게 말하는 '나이 먹음'에 대한 제롬의 생각은 이렇다.


"You have to understand something here, buddy. You've got another twenty-five years before you're that age, so it's hard for you to fathom. But it's going to go quick. Before you even know it, you'll know up and suddenly your buddies will have beer guts and will be getting gray all over and they'll be talking about sex but not in great anticipation, but with dread."

(이걸 알아야되, 자넨 스물 다섯이 되기도 전에 또다시 스물 다섯살을 먹게 될꺼야. 스물 다섯살이 어떤 건지 그 깊이를 알기도 전에 말이지. 재빨리 가버리는 거라구. 그 나이를 채 실감하기도 전에, 어느 순간 나이를 더 먹고 자네 친구들이 술독에 빠지고, 머리카락 하얗게 덮히고, 여자얘기를 지껄여 대지만 뭔가 그럴듯한 여자관계를 가지지도 못한채 그저 벌벌떨기만 하는 거지)


"I'm not trying to scare you. That'll only be the surface. But what I'm really saying to you, Miles, is that, mostly, you won't change. At least not in the way you think of yourself. You'll stay in a dream, the Miles-dream."

(자넬 겁주자고 하는 얘기가 아냐. 이건 그저 맛뵈기에 불과해. 내가 진짜 해주고 싶은 말은 말야, 마일즈, 대체로 자네는 절대 변하지 않을꺼라는 말이지. 최소한 자네가 생각하는 어떤 모습으로는 말이야. 자넨 그저 환상, 그러니까 '마일스의 꿈' 속에 머무르게 될꺼라고)


"The Miles-dream. Maybe you'll have more than one. It's like this. You'll have an idea of yourself being a certain age, and for years and years when people ask you'll still think you're twenty-five, or thirty-five, or whatever age that seems right to you because that will be the truth of your feeling inside."

('마일스의 꿈.' 어쩌면 그 꿈은 하나 이상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런거지. 자넨 자네가 어떤 특정한 나이의 사람이란 생각을 갖게되는 거야. 몇년이 흐르고 또 흐른 후에, 사람들이 자네 나이를 물어봐도 자넨 여전히 자네가 스물 다섯이나, 아님 서른 다섯이라고 여기는 거지. 아님 그게 어떤 나이이든 그 나이가 자네에게 딱 맞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냐하면 자네 마음속의 감정이 정말 그럴꺼거든)


물리적 나이 쉰 아홉의 제롬이 생각하는 그 자신의 감성나이는 서른 둘이나 서른 셋 쯤이다.


마일스가 제롬에게 묻는다.


"What, were you getting a lot of pussy back then?"

(그땐 많은 여자랑 놀아났던가 부지?)

"I wouldn't put it that way, exactly."

(그런 말을 하는게 아냐, 이놈아!)

"Yo, I was just kidding! I'm just fucking with you, man. But hey, you were happy, right?"

(에이~, 농담이야 아저씨~. 그저 장난 좀 해보려고 한거야. 그래도, 그땐 -제롬의 감성나이 서른몇 시절- 행복했다는 말이지? 그지?)

"Actually not really too happy, either."

(사실 별로 그리 행복하지 않았어. 그때도 말이지...)



이 소설은 여느 미국 환타지 소설이나 충격적 소재의 사실주의 소설과는 다르다. 특별한 소재도 없고 사건도 없다. 이 꽤 긴 장편소설을 이어가는 그럴듯한 소재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소설은 그 몇개의 소재들을 부추기기 위해 시시콜콜한 생각과 대화가 있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시시콜콜한 생각과 대화를 펼쳐 놓기 위해 사건들이 존재하는 식이다.


오십 아홉살 먹은 미국 남자가 생각하는 건 뭘까? 영웅? 범죄자? 청소년 희롱? 애정행각? 이 소설엔 이에 해당하는 그 어떤 내용도 없다. 제롬은 한국인 아내가 자살한 이후 오랜 세월동안이나 자기 아이들을 끔찍히 아끼며 돌보아준 여자친구 리타에게 청혼조차도 못하고 주저하는 남자다. 위로는 아버지도, 아래로는 딸과 아들에게도 그저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는. 충동적으로 경비행기 타는 법을 배우고 경비행기 훈련을 받은 첫날 충동적으로 경비행기를 사버린, 그런 아무 것도 아닌 남자다.


그런 제롬이 이야기하는 '나이 먹음'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절묘하게 사실적이다.


텍사스에서 오년을 살고 미국에 온지 육년째 되는 해 미시건으로 온 나는, 중학교때 절친 했던 친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애는 대학때 미국으로 와 시카고에서 변호사일을 하는 친구다. 같은 미국에 살아도 텍사스에서는 만나는 일을 꿈도 꿀 수 없었지만 미시건에 오니 시카고는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고 일년도 못된 사이 우린 벌써 세 번이나 만났다. 그애를 만나면 내 나이는 열 댓살의 소녀가 된다.


평소의 '꼼미의 꿈 나이' '서른 살' 보다도 한참 어린 나이가 되어 버리는 거다. 그래서 시카고 그애 집, 그애의 아이들과 내 아이들이 시끄럽게 쿵쾅거리는 소리 사이를 비집고 그애가 만들어내는 음식 냄새며, 그애의 엄마다운 목소리가 외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거다.


오늘은 서재 이곳 저곳을 돌다, 시인 최승자의 신간을 평한 어느 서재지기의 글에서 이와 똑같은 내용을 발견했다. 최승자 시인도 제롬이나 나처럼 '승자의 꿈 나이'를 지니신거다.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 최승자, '참 우습다' 전문




사실, 이런 '꿈나이'를 갖고 사는 건 제롬이나 최승자나 나뿐만 아닐테다. 장담컨데, 서른이 넘어선 모든 이들일 것이다.


덧말: 알라딘에서 찾아 보니 한국 번역서로는 <가족1, 2> 로 출판되어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0-04-27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꼼미 2010-07-23 00:20   좋아요 0 | URL
흠, 아래 댓글에서 바로 또 댓글 달기가 안되네요. 전 아직도 알라딘 서재에 익숙치 않은듯....^^ 비밀글 뭘 썼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어디다 달았는지조차. 별 얘기 아니었을 듯 해요...

2010-04-29 0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1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눈이 나리는 가운데
내친구 나무에
한 무더기 새들이
날아와 앉았다.
한눈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다시 얼어 붙고 있는 근래 들어
드문 일이다
후다닥
내친구 몸을 뒤흔들어 대면서
새들 여럿이
되날아가 갔다.
꼭대기에 한마리만 바보스레
남아 있는가 했더니
날아 갔던 새들이
다시 와
나무 위에 무리를 이루었다.
이번에도 새들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날아 갔고
이제는 다른 한마리가
나무의 펑퍼짐한 엉덩이 근처에 머물렀으나
전처럼 다른 새들을 불러 들이지 못했다.

남아 있던 한마리 새가
떠나가는 무리를 향해 날아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크아이즈 2010-01-28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시건에도 눈이 많이 오겠네요. 꼼미님 때문에 미시건을 찾아 봤더니 역시 미북부에 있네요. 눈 나리는 날들이 많을 것 같아요. 공부하러 떠나신 것 같은데 좋은 소식 사진으로도 올려주세요. 님 덕분에 미시건을 떠올리는 날들도 잦아질지도... 좋은 시 써주세요. 즐감하러 올게요.

꼼미 2010-01-28 09:45   좋아요 0 | URL
눈오는거 싫어 하는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허구 헌날 눈이 와서 좋아요. 미국 오실 일 있으면 연락 하세요. 미시건이 아니면 핑계거리 만들어 제가 찾아갈지도...^^
 




나는
나무 앞에 서 있다
나무 밑에 서 있다
나무 옆에 섰다가
나뭇 가지 사이에 섰다
나무 속에 서 있다
나무 위에 서 있다
나무 아래 묻혔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얼은나무                                                              견디는나무


친구 없이 지내는 나날이고 보니 무심한 나무가 친구다.
무심한 자연을 견딜 수 없어서 사람은 신을 만들어 냈다는데.
나는 마음 나눌 친구를 만들 생각은 않고 무심한 나무와 친구가 됐다.
마루 문을 열고 나가면 매순간 다른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는 나무.
누가 자연을 무심하다고 할까.
나는 그저 얼마 후면 저 나무를 바칠 한 줌 흙이 될 뿐이다.
그러니 나무와 내가 친구인 것은 내가 나기 전부터였던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