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 - 영화가 끝나고 도착한 편지들
조해진.김현 지음 / 미디어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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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모른다. 나인투식스 생활을 할 줄이야. 그러면서 바뀐 건 책을 읽는 횟수. 예전에는 이틀에 한 권꼴로 읽었었는데 요즘엔 일주일에 한 권 정도. 한 권 읽기도 힘든 주가 있기도 하다. 그래도 주말에는 책을 완독하는 걸로 정했다. 유일하게 집에서 안 나갈 수 있는 시간이니까. 할 수만 있다면 집 밖으로 위험한 이불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나는 박명수 말대로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어요다.


11월의 첫째 주는 어땠더라. 금목서 향기가 나는 천변을 부지런히 걸었다. 출퇴근을 걸어서 한다. 버스가 오지 않으면 어쩌나. 버스를 못 타면 어쩌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 싫어서. 걷는다. 집으로 들어갈 때 워치에 만보를 걸어 축하한다고 찍히는 문구를 보는 게 즐거움이다. 만보라니. 만보를 걸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니. 기준점을 어디에 두냐에 따르지만 이걸로만 보자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실감을 느낄 수 있다. 하루에 만 보 걷기.


소설가 조해진과 시인 김현이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는 유독 오래 읽었다. 책에서 소개한 영화를 한 편씩 보느라. 전부는 보지 못했고 글을 읽다가 마음이 끌리는 영화가 있으면 봤다. 총 세 편의 영화를 보았다. 내 마음이 마음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마음이 있기나 한 걸까 의문이 들 때. 마음이 있지만 그건 돌이 아닐까 멀리 차버리면 날아갈 정도로 하찮게 느껴질 때.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를 읽으면.


숨겨져 있던 내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건 사라지지도 날아가지도 않은 채 내가 다시 발견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책의 표현대로 영화를 본다는 건 영화 자체만을 보는 게 아니다. 영화를 보던 날의 기억과 함께 한다. 영화를 보러 가야지 계획하고 가는 것도. 영화관 앞을 지나가다 시간이 맞아서 우연히 들어가는 것도. 다 괜찮다. 영화를 소개해 주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혹은 책을 읽다가. 이 영화는 지금의 나에게 필요해 하면서 보는 것도.


전문적인 영화 리뷰 책은 아니다.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는. 그래서 더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가볍게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일상에 스며든 어떤 영화 한 편을 서로에게 소개한다. 오늘 영화 한 편을 봤는데 혹시 보셨나요? 과거에 봤던 영화가 떠오르는 하루네요. 하는 식으로 책은 흘러간다. 9시에서 6시까지의 사회적 자아가 왕성하게 활동한 나머지 6시 이후에도 좀처럼 나로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6시 이후의 시간들.


빨리 돌아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를 읽으면서.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예전에 봤던 영화도 괜찮고 책에서 두 작가가 보면서 감동했던 영화를 한 편씩 보는 것도 좋다. 그래서일까. 책의 뒤에는 '동시 상영 중인 영화 목록'이 친절하게 딸려 있다. 의욕 없음을 넘어서 무기력의 시간을 살고 있는 '사무 생활자', '출퇴근러'인을 위한 약 처방전처럼. 의외로 나 영화 많이 봤네.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를 읽으며 안도했다.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였구나.


문화생활을 누리는 게 아니라 간절하게 문화생활을 하고 싶어 했던 시간에 한 일이라고는 책 읽기와 영화 보기였다. 어떤 때는 개봉 중인 영화를 전부 봤던 한 주가 있었다. 구체적인 할 일이 없어서 봤던 영화를 또 보러 가기도 했다. 책은 특이하게도 보지 않은 영화라도 위화감이 들지 않도록 소개해 준다. 서로가 가진 일상의 안전함과 편안함을 바라는 두 작가의 다정한 마음 때문이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소설가와 시인의 우정은 이어진다. 친한 관계란 무엇일까 고민하는 요즘에 조해진과 김현의 관계를 보고 있자면 글 읽기와 쓰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반갑고 고맙다.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를 읽다가 본 영화 세 편의 이야기.


《패딩턴》. 사랑스럽고 따뜻한 이 영화를 왜 나는 모르고 있었을까. 지금에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페루에서 영국으로 밀항한 곰이라니. 마멀레이드 잼을 좋아하고 말하는 곰이라니. 인간 가족과 허물없이 살게 되어 다행한 곰의 이야기. 공손하고 예의 바른 패딩턴. 내가 제일로 여기는 가치는 존댓말과 예의 바름이다. 인간도 하지 못하는 일을 말하는 곰 패딩턴은 한다. 먼저 인사를 하고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한다.


《생일》. 영화가 나온다고 했을 때. 영화가 개봉했을 때. 차마 볼 수 없으리라고 여겼다. 보지 못하겠다고. 영화를 보는 내내 전도연은 최고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영화 설정이고 연기였을 텐데. 전도연은 한다. 그저 하는 게 아닌 감당해낸다. 영화 밖의 현실을. 엄마, 나야.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은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들은 모여서 애도를 한다.


《걷기왕》. 멀미 때문은 아니지만 다행히 일하는 곳이 가까워 왕복 한 시간을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 영화의 주인공 만복이는 4살 때부터 시작된 선천성 멀미 증후군 때문에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서 학교에 간다. 지각은 다반사. 당이 떨어져 담임과 면담할 때 사탕을 폭풍 흡입한다. 상상력이 과도한 담임이 가정 면담을 오고 집으로 걸어가는 만복이를 보고 육상부에 들어갈 것을 제안한다. 뛰지 않아도 좋아. 멈추고 싶으면 멈춰. 영화는 할 수 없음에 대해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준다.


단 한 장의 책도 읽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옆으로 누워 영화 한 편을 때리는 것도 좋지. 당분간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의 영화 목록에 줄을 그어가면서 6시 이후의 나를 달래줘야지. 오랜만에 시를 생각했다. 김현은 추신의 자리에 오늘 쓴 시를 조해진에게 보낸다.


주말 이틀은 왜 이틀뿐일까 사흘이거나 나흘이어도 좋을 텐데 빨간색으로 가득 찬 한 장의 달력을 갖고 싶어 내가 울 때 네가 그걸 가지고 온다면 나는 기쁠 거야 일어나 앉아서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오로라를 보러 가는 일도 어렵지 않겠지 쓰지 않은 머그컵을 꺼내는 일부터 할 거야


내가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한 시절 영화를 보면서 살아낼 수 있었다. 불 꺼진 상영관에 들어가 앉은 내 곁으로 어제의 기억과 추억이 될 오늘이 찾아온다. 다음에 개봉될 영화의 예고편이 끝나면 영화는 시작된다. 잠깐의 어둠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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