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그러니까 나는 반성한다. 월급 적다고 징징대고 출근하기 싫다고 울고불고 난리 피우고(진짜 울었다. 그것도 길에서) 일 시키면 겉으로는 웃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욕했던 것, 그 모든 것을. 대학 졸업하고 별다른 노력 없이 어쩌다 직장을 가졌고(그때는 젊었는데. 왜 그렇게 안이하게 살았을까. 자격증 따고 이력서도 여러 군데 넣어보고 하지는) 다행히 공백기 없이 꾸준히 일을 다닐 수 있었다. 계속 그렇게 살 줄 알았지, 뭐.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 강제 백수가 됐고 생각지도 못한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땄다. 직업군을 옮기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놈의 경력, 경력, 경력자. 하긴 나 같아도 경력자를 뽑겠다. 일 하는 차원이 다를 테니. 나이 많은 신입을 받아주는 데는 없었다. 뉴스에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서류 몇 백군 데를 넣고도 면접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게 내 이야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을 꼭 읽으시라. 아니, 다들 읽었다고요? 또 나만 몰랐지. 또 나만 늦었지. 그래도 아직 읽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꼭 읽으셔야 한다. 읽는 동안 소름과 눈물과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올 테니. 여기는 남부 지방. 지각 장마는 늦게 온 걸 벌충이나 하려는 듯이 장대비를 퍼붓고 있다. 비가 쏟아지는 내내 『인간의 조건』을 읽어 나갔다. 나 대신 울어주는구나. 하늘.


나는 그들을 판단하고 싶지 않다. 조롱을 감수하면서 맞지 않는 일을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을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가 보기엔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삐뚤어지게 만든다. 내가 경멸하는 사람은 황소 심줄 같은 끈기를 지닌 사람들이다. 참고 참아서 끝내는 어디선가 한자리 꿰차는 사람들. 그러니 너희들도 인생의 절반을 무의미한 일을 하며 살라고 권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중도 포기자들은 언제 어디서고 "이제 그만!"이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라 해야겠다. 참을성 좋은 사람들은 체면이니, 부모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명분에 충성을 다하는데,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건 여지없이 이런 부류다.

(한승태, 『인간의 조건』中에서)


한승태는 오랜 기간 면접을 보고 취업 준비를 했다. 모두 탈락. 스물여섯에 꽃게잡이 배를 탄다. 소개소에서 한 달 기본 급료가 100만 원이라는 말을 듣고 덜컥 선원이 된다. 숙소에 도착해 들은 질문은 깨끗하냐는 거였다.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했다. 깨끗하냐는 말은 전과가 있냐 없냐라는 뜻이었다. 그날부터 한승태의 고생은 시작된다. 꽃게를 잡는 건지 자신을 잡는 건지 모를 일을 했다. 배 안에서의 생활은 개고생 그 자체였다. 조금만 방심하면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곳이었다, 배는.


일이 힘들어도 월급이 괜찮으면 버틸만하다.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버틸만하다고 믿는 것이다. 선주는 경비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고 월급을 주지 않았다. 식사, 숙소 어느 것 하나 괜찮은 것이 없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담인데 간결하고 요점을 명확하게 요약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밉다. 중국 선원들이 도망치기 위해 바다를 헤엄치다 죽은 걸 본 후 한승태는 선원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선주는 40만 원을 줬다. 6주 동안 일했는데. 남은 선원들은 돈을 받았다는 것에 신기해했다. 꽃게잡이 선원의 시간은 그런 것이었다.


이후 그는 편의점, 주유소, 돼지 농장, 오이 비닐하우스,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한다. 최저 시급 정도를 받거나 최저 시급에도 못 미치는 월급을 받으면서. 한 달에 이틀 휴무를 가지면서. 『인간의 조건』은 마지막 6부를 빼놓고는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 6부도 약간의 허구가 가미됐을 뿐 실화에 근접한 이야기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모두가 꺼려 하는 일을 하면서 쓴 글은 차라리 거짓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이다. 화장실과 수도가 갖춰져 있지 않은 숙소. 돼지 똥의 악취를 맡으며 일을 하고 똥이 묻어도 닦을 수 없는 작업 환경. 한 달에 마스크와 장갑 두 개로 일을 해야 했다.


『인간의 조건』을 읽으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동안 내가 한 고생은 고생 축에도 못 드는구나.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 싸는 소리를 하며 살았구나. 한 달에 이틀 쉬면서 일을 해도 150만 원을 못 받았다, 한승태와 그의 동료들은.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을 아는가. 또라이를 피해도 새로 또라이를 맞이하게 된다는 《심야 괴담회》에서 어둑시니들에게 44개의 촛불을 받을 수 있는 법칙. 일도 일이지만 그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기가 막힌 에피소드가 『인간의 조건』을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게 만든다.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 책이 약간 두꺼운데 술술 읽혀 더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건 이 모든 이야기가 진짜라는 사무침 때문이다. 현재에 만족하며 살자 같은 기만의 말을 하지 않는다. 노동력 착취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기업의 해괴한 논리를 조곤조곤 반박한다. 부당함을 겪고도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되는 시절. 착하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는 요즘의 말. 이게 아니다 싶으면 도망가도 된다고 해준다. 그건 용기라고 말한다. 그래서 소중한 책이 되어 버렸다, 『인간의 조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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